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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13화 (113/119)

113화

* * *

필립은 석상에서 사람이 된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지더니 곧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듬어 보았다.

“믿을 수 없어요… 정말 제가…… 다시 살아난 건가요?”

‘그러게. 진짜 이게 되는구나.’

사실 필립도 믿을 수 없었다. 단지 내부를 살피기 위해 그녀의 허벅지에 단검을 박아 그 단검으로 마나를 흘려 넣었을 뿐이었다.

비유하자면 진찰을 하기 위해 청진기를 가슴에 댔더니 갑자기 환자가 앓던 폐결핵이 완치되어버린 것과도 같았다.

‘초심자의 행운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는데?’

이럴 때 할 수 있는 가정은 하나뿐이었다. 소녀가 걸려 있던 석화 저주는 본래부터 저절로 풀리게 되어 있던 것일 터였다.

소녀는 허벅지에 단검이 박힌 게 아프지도 않은지 놀란 눈으로 필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필립이 기적을 행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무섭고 고통스러운 마음에 아무 기대도 없이 도와달라고 빌기는 했으나 이렇게 쉽게 해결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당신은 대체……?”

시각이 돌아오고, 촉각이 돌아오고, 미각은 몰라도 월광족 특유의 민감한 후각이 슬슬 돌아오고 있었다. 소녀는 필립의 전신에서 풍기는 친숙하고 푸근한 냄새를 따라 그의 지척까지 다가갔다.

발끝부터 위로 올라가며 냄새를 맡는 소녀를 보며 필립은 뒤로 조금 물러났다. 소녀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대단히 위험한 것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이었다.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좋겠습니다. 단검을 뽑을 테니 조금만 참아요.”

소녀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필립을 빤히 응시했다. 허벅지에 박힌 칼을 뽑는데도 그녀는 몸을 조금 움찔할 뿐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맞아. 그래. 당신께선… 분명히….”

뭔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소녀는 손을 뻗어 필립의 팔을 붙들었다. 필립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비하고 있던 물품 중 깨끗한 천과 붕대를 꺼내어 그녀의 허벅지에 감았다.

“그랬군요. 나는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던 거예요.”

―좀 정신이 이상한 애 같아요. 주인님.

네리아가 중얼거렸다. 필립 또한 조금쯤은 동의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필립의 응급처치가 끝나자 곧바로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암컷 늑대로 변신하더니 곧바로 필립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당신에게선 그분의 냄새가 나요… 아주 오래전, 모든 월랑족들이 주인으로 모셨던 분. 그분께서 월랑족을 거두기 위해 후인을 보내셨군요.”

“뭐 그런가 보죠. 그보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신 형부인 라포가 위험하니 일단 움직이도록 하죠.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겠군요.”

필립은 어쩔 수 없이 늑대로 변한 월랑족 소녀를 안아 들고 빠른 속도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소녀의 호흡이 이상하게 거칠었지만, 개과가 원래 그렇겠거니 하며 필립은 걸음을 빨리했다.

* * *

‘빌어먹을, 나이를 처먹을 대로 처먹을 놈이라 그런지 더럽게도 노련하군.’

월랑족 전사 라포는 매우 고전하고 있었다. 평지 드레이크 네펜서스는 다른 드레이크들과 달리 포식자로서 그저 군림해 온 개체가 아니었고, 나름대로 꽤 많은 전투를 치러 온 베테랑이었다.

물론 그건 라포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그는 아직 전력을 제대로 끌어올릴 수 없는 상태였다. 전성기의 전투력이 다시 돌아올 만큼 긴장감 있는 전투를 겪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력을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 너무 오랜 세월을 보낸 것이 문제였다.

드레이크와 라포의 상태는 둘 다 좋지 않았다. 네펜서스는 날개 한쪽과 오른쪽 앞발을 당한 데다 꼬리 또한 길게 찢어졌다.

라포는 네펜서스가 내뿜은 산성 브레스 탓에 털가죽이 반쯤 녹았고, 그 과정에서 들이킨 산성 기체 때문에 제대로 호흡할 수 없는 상황.

이대로 전투가 지속된다면 이기기야 하겠으나 타격이 꽤 클 것 같았다.

“크르르르….”

지능이 생각보다 높은 네펜서스 또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놈은 너덜너덜해진 앞발을 흔들거리며 라포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렸다.

라포 또한 이 이상 타격을 받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웠기에, 두 종족은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꼬리 내린 들개 주제에 제법이구나….”

“아가리 닥쳐라. 다 죽어가는 주제에.”

“어떻게… 여기까지 도달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는 결코 동족을 구할 수 없다….”

“그래? 내 동족이 이곳에 있기는 있단 말이지? 그러면 어서 널 죽이고 찾아내야겠다.”

“…할 수 있다면 해봐라. 내가 질 것 같지는 않으니.”

네펜서스는 갑자기 몸을 웅크렸다. 라포는 본능적으로 그 괴물이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수지가 안 맞는 싸움을 해야 하나.’

라포 또한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곧 그의 몸이 창백한 달빛에 뒤덮이더니, 곧 네 발 달린 늑대의 모습에서 마치 웨어울프처럼 두 발로 걷는 늑대의 형상이 되었다.

인간의 손처럼 손가락이 길어졌고, 다리 또한 마찬가지로 길어졌다. 마치 무투가처럼 자세를 잡은 라포는 네펜서스가 뭔가를 하기 전에 앞으로 뛰쳐나갔다.

필립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흡!”

그는 마치 암살자처럼 네펜서스의 등 뒤로 돌아가 아까 월랑족 소녀의 허벅지에 박아 넣었던 단검을 손에 들더니, 곧바로 네펜서스의 몸을 타고 올랐다.

“…뭐냐!”

깜짝 놀란 드레이크가 몸을 비틀려고 할 때 필립의 단검에서 창백한 빛을 흩뿌리는 검강이 솟더니, 나선의 형태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필립은 이를 악물고 오러를 제어했다. 질 좋은 철로 만들어진 단검이었으나, 검강과 나선검의 에너지를 버텨내기엔 무리였다.

지속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초, 필립은 그 안에 드레이크의 등줄기에 단검을 꽂는 데 성공했다.

“크라라라라라!”

드레이크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너덜너덜한 꼬리로 필립을 공격했다. 필립은 급히 에고 소드 네리아를 뽑아 방어했으나, 충격을 모두 상쇄하지 못하고 공동 벽면에 날아가 처박혔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라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필립의 기지를 칭찬하며 드레이크의 머리통에 훌륭한 공중 돌려차기를 꽂았다.

그가 현재 취한 형태는 전투 수인의 형태로, 방어력이 낮아지는 대신 근력과 민첩성, 그리고 공격력이 몇 배는 상승하는 형태였다.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마력을 크게 소모해 결전기로 쓰이기 알맞았다.

터무니없는 충격을 받은 드레이크의 머리통이 목에서 뽑혀나갈 듯한 기세로 크게 움직였고, 벽을 딛고 다시 뛰어오른 라포가 다시 공중에서 앞으로 돌며 그 힘까지 이용해 네펜서스의 머리통을 그대로 찍어 버렸다.

곧 두개골이 깨어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드레이크의 거대한 몸이 무너져 내렸다.

‘…확실히 강하긴 하네.’

필립은 라포의 움직임에 감탄했다. 저렇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본능만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아무래도 월랑족에게 전승되는 무술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라포가 보여준 오러 마스터 이상의 강함은 매력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필립은 그를 가까이에 두고 쓸 수 없었다.

“좋은 전투였습니다. 작은 주인님. 혹시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라포의 질문에 필립은 말없이 공동 구석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뒷다리에 붕대를 감은 어린 늑대 한 마리가 배를 내놓은 자세로 혀를 내밀고 있었다.

“…너…너 설마 셴리냐?”

곧바로 네 발 달린 늑대의 형태로 변한 라포가 급히 어린 늑대의 근처에 다가갔다.

“라포 오빠. 오랜만이야.”

라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주변을 돌며 냄새를 맡았다. 얼굴과 목덜미, 그리고 등을 지나 라포의 코가 꼬리 근처로 향하자 어린 늑대는 앞발로 그의 얼굴을 세게 내리쳤다.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알아? 오랜만이라 반갑기는 해도 그 정도는 아니거든? 이 변태야.”

그 새침한 반응에 라포는 그제야 자신의 처제가 살아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로 네가 맞구나. 네 언니가 널 본다면 정말로 좋아할 거다.”

“네게 소개해야겠다. 저분께선 월랑족의 새로운 주인이 되실 마스터 오템의 후계자시며….”

“알아, 아니까 설명하지 않아도 돼! 오빠. 난 저 너머 아주 좁은 곳에서 석상이 되어 있었어… 백 년쯤 지났을 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셴리라고 불린 월랑족 소녀는 곧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필립이 자신을 어떻게 구해내었는지 과장을 섞어 자랑하기 시작했고, 라포는 앞발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부와 사춘기 처제 사이의 따뜻한 재회를 지켜보던 필립은 피로 탓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걸 느꼈다. 그는 지친 목소리로 라포에게 지시했다.

“미안한데 드레이크 심장부터 뽑아줄 수 있나? 저게 좀 귀한 거라.”

“예? 물론입니다. 작은 주인님.”

라포는 숙련된 해체업자처럼 발톱으로 드레이크의 비늘을 가르고 안에 든 심장을 꺼내었다. 앞발로 그것을 눌러 핏물까지 제거하는 센스까지 보였다.

“그래. 고맙군. 그리고 여길 나가서 좀 쉬자고. 우리 모두에겐 휴식이 필요하니까. 밀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많으니까.”

라포 또한 필립의 의견에 동의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힘을 너무 썼더니 저도 조금 피곤하군요.”

라포는 큰 부상을 입지 않았기에 마치 어미가 어린 강아지를 옮기는 것처럼 처제의 목을 물고 필립을 등에 태웠다.

라포의 등에 타고 이동하는 와중에도, 필립은 잠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잘 때는 자더라도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해야만 했다.

* * *

필립은 수색에 나선 캐슬러 교수에게 성공적으로 구조되어 천막에서 쉴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나갔던 페렉 교관은 필립이 구멍에서 되돌아왔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그를 찾아왔다.

“교관님 괜찮으십니까?”

“좀 많이 피곤할 뿐이지 다친 곳은 없습니다.”

눈의 실핏줄이 터지고, 코피가 흐를 만큼 피곤할 뿐이었다.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에 페렉 교관은 흠칫했다.

“제가 도움이 좀 되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러면 편히 쉬십시오.”

천막을 나가려던 페렉 교관은 필립의 침낭 옆에 웅크리고 앉은 은색 털뭉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월랑족과 한 번 마주했던 그는 저 은색 털은 월랑족의 특징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저게 그 늑대가 구하려던 동족인가 보군.’

마치 애완견처럼 필립의 옆에 누워 있는 모습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

월랑족의 무녀, 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페렉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렇게 순하게 생긴 늑대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데….’

평범한 늑대보다 훨씬 동글동글한 인상이었기에, 마치 개량된 품종처럼 보였다. 셴리는 페렉이 자신을 계속 쳐다보자 낮게 으르렁거렸다.

“으르르르….”

“앉아요.”

필립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만류했다. 지시가 떨어지자 셴리는 헥헥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앉아 꼬리를 흔들었다.

‘진짜 개같네.’

다른 월랑족들보다 늑대 쪽의 피를 더 강하게 받았다더니, 아무래도 개과의 특징 또한 더 많이 물려받은 듯했다.

“월랑족 전사가 말하기를, 페렉 교관님께서 들인 노력과 정성에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를 통해서요. 일단 한숨 자게 저를 좀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아… 딱히 보상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제가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으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부디 편히 쉬십시오.”

페렉은 필립의 쾌유를 빌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와 동시에 오필리아 교관이 들어왔다.

“교관님. 괜찮으세요?”

필립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죽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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