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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12화 (112/119)

112화

* * *

필립은 통로 끝에 다다라 묘한 느낌이 드는 문 앞에 섰다. 사슴의 머리뼈가 장식되어 있었고 핏빛이 조금 도는 흑요석이 박혀 있었기에 이곳에 보스가 있다는 사실을 몰라도 알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여기군.”

“그렇습니다.”

필립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치 무덤의 흙냄새와 같은 축축하고 텁텁한 냄새가 훅 끼쳤다.

내부는 마치 드래곤의 레어처럼 커다란 공동이었다. 단지 조금 불결하고, 많이 어두울 뿐. 필립은 공동 중앙에 몸을 말고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형체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거 좀 씻고 살지.”

라포는 털을 바짝 세우고 완전히 전투태세에 접어들려다가, 긴장이라곤 전혀 하지 않는 듯한 필립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저만한 수준으로는 꽤 부담스러울 텐데, 태생적으로 겁을 먹지 않는 건가? 아니, 숨을 쉬고 살아가는 생물이라면 그럴 수가 없지. 하긴, 저렇게 비범하니 월광검을 계승할 수 있었던 거겠군.’

마치 정말 드래곤이라도 되는 듯 거대한 동체, 새까만 비늘, 드레이크라는 종은 고도의 지성과 마력이라는 축복을 제외하면 드래곤과 육체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곧 일부러 긁는 듯한 불쾌한 목소리와 함께 드레이크의 몸통이 움직였다. 그 순간 필립은 라포의 등에 손을 올렸다.

“잘 부탁한다.”

“하하, 물론입니다. 이번 기회에 월랑족 전사의 힘을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저깟 도마뱀 따위는 전사의 상대가 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기회가 찾아왔다는 생각에 라포는 털을 바짝 세우며 드레이크 네펜서스를 노려보았다.

“들어올 때부터 지독한 비린내가 진동하더니, 이렇게 커다란 도마뱀이 있을 줄이야. 하나만 묻지, 네 꼬리도 자르면 다시 자라나나?”

드레이크는 분명 강한 종이었다. 그러나 라포는 꽤 자신이 있었다.

혼자였더라면 제법 애를 먹겠지만, 필립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필립은 대단한 강자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전투를 훨씬 쉬워지게 할 만큼의 능력 정도는 가졌다고 할 만했다.

“너는… 월랑족이군… 몰락해 사라진, 패배한 종족.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폐기물이 왜 여기 있는가? 동족을 구원해 역사를 되돌릴 생각인가? 그래 봤자 너희는 꼬리 내린 들개에 불과한 것들….”

“이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가!”

드레이크는 특유의 긁는 듯한 목소리에 비웃음을 섞어 라포의 도발에 대응했다.

괜히 도발했다가 더 강한 일격을 맞은 라포는 곧바로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드레이크에게 달려들었다.

드레이크 네펜서스는 라포가 자신의 목을 노리자 곧바로 날개를 펼쳤다. 상당히 날렵한 몸놀림으로 라포의 공격을 회피하며 입을 크게 벌리자 그 커다란 입 주위에 새까만 기류가 모이기 시작했다.

평지 드레이크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산성 브레스였다. 마치 광선처럼 뻗어 나가는 공격을 라포는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피해냈으나, 자랑거리로 여기는 털가죽을 스치고 말았다.

갈기의 반이 녹아버린 라포는 시선을 빠르게 돌려 필립이 어디 있는지 살폈다.

월광검을 계승할 만한 천재라면, 분명히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만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을 터였다.

“…어?”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필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어?”

이어지는 드레이크의 꼬리치기를 피하며, 라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런 씨발….”

* * *

‘미안하다. 라포.’

솔직히 별로 미안하지는 않았으나 필립은 라포에게 사과하며 블랙 드레이크를 몰래 피해 뒤편으로 향했다.

뒤쪽에서 라포아 드레이크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깔끔히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필립이 여기까지 온 것도 저 늑대 탓이었다.

본래라면 별일 없이 학생들을 지도하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 조금 꼼꼼히 살피기만 할 터였다.

지하 수백 미터에 나 있는 동굴에서 드레이크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뭐 월랑족이 이기겠지.’

드레이크도 제법 강한 종족이었으나, 월랑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드레이크 따위는 수십 마리가 모여도 드래곤을 당해낼 수 없고 월랑족은 열 마리가 모이면 어린 드래곤 정도는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니 라포 또한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비록 네펜서스의 추정 연령이 천 년을 조금 넘고, 뭔가 불가사의한 어둠의 힘을 다루기는 하지만 말이다.

필립은 콧노래를 부르며 수색을 계속했다. 드레이크가 머무는 공동 뒤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니 뭔가 신전처럼 보이는 공간이 나왔다.

“음?”

필립은 주머니에서 발광석을 꺼내어 앞을 비췄다. 그러자 대리석 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석상 하나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이건?”

석상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나이는 쟈니스나 셰릴과 비슷해 보였고, 소녀의 사랑스러움과 여인의 매력을 동시에 지녔으나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꼬리가 달렸군.”

엉덩이에 늑대의 그것처럼 풍성한 털의 꼬리가 달린 걸 보니 아무래도 월랑족이 맞는 듯 보였다. 본래 수인 중에서도 짐승의 피를 강하게 타고난 이들은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월랑족 또한 수인이기는 하지만 그 근본은 까마득한 고대의 신화종. 그 피를 짙게 타고났다면 무녀가 맞지 싶었다.

문제가 있다면 돌이 되었다는 것. 저건 분명히 석상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기술의 극에 달한 명인이라도 한 인간의 공포를 저렇게까지 표현해낼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석화 저주인가? 월랑족이 석화 저주에 당할 리가 없는데.’

석화 저주는 아주 대단한 수준의 주술이었다. 마법과는 그 원리가 달랐고, 피부 조직을 돌의 그것으로 완전히 변모시키는 술법이었는데, 기본적으로 대단한 항마력을 지닌 월랑족에게는 무용지물일 터였다.

―…불쌍하기도 해라. 저렇게 되기 전까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문득 네리아가 말을 걸었다. 필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부릅뜬 눈과 공포에 질린 표정만 봐도 석상이 된 저 소녀가 겪었을 공포를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필립은 일단 석상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 정신을 집중했다. 돌이 된 소녀의 전신에 필립의 오러가 흘렀고, 그 순간 석상의 허벅지에 쩍, 하고 금이 갔다.

이건 저주가 풀리는 게 아니라 단지 손상된 것임을 알아차린 필립이 즉시 손을 떼었다. 그의 뒤통수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하지?”

하마터면 아랫사람의 처제를 산산조각 낼 뻔한 필립이 묻자 네리아가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땅에 떨어진 돌 같은 걸 잘라서 메꿔 놓으면 어때요?

“그…럴까? 그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생길 텐데. 완전히 돌이 된 건가? 아예 살릴 수 없는 걸까?”

―저렇게 되었으면…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정말 딱하지만요….

지금이라도 라포를 도와 드레이크를 죽여야 하나 고민하던 필립의 머릿속에 네리아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어린 여자의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필립이 석상을 바라보았다. 석상에서부터 뭔가 은은한 진동 같은 것을 느낀 필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혹시 당신이 말한 겁니까?”

―당신이 누구냐고 제가 먼저 물었잖아요!

스트레스와 공포가 극에 달한 반응에 필립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라포라는 이름의 월랑족을 압니까? 저는 그 늑대의 부탁으로 월랑족이 봉인된 곳을 함께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당신을 발견했고, 당신이 죽은 줄 알았기에 드레이크 네펜서스와 싸우고 있는 당신의 형부를 도우러 갈 생각이었습니다.”

필립의 설명에 소녀의 목소리의 톤이 갑자기 바뀌었다.

―라포 오빠가…요? 아니야. 못 믿어요. 당신이 라포 오빠의 이름만 팔고 있을지 어떻게 아나요?

“라포의 아내는 로로이고, 당신은 아마 그녀가 임신하고 있던 것을 기억할 겁니다. 그녀는 현재 내 집에 머무르고 있고 지금은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해서 이것밖에 증명할 길이 없겠군요.”

필립은 그녀가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랜 세월 돌이 되어 있던 소녀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발 저 좀 구해 주시면 안 돼요? 훌쩍… 여기서 나가고 싶어요. 난… 내가 몸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이젠 기억이 나질 않아요.

처량하게 훌쩍거리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리자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겁니까?”

―대전사님께서 저를 지키려고 그곳에 남았고… 저는 혼자 도망치다가 습격을 당해 정신을 잃었어요… 그리고… 눈… 그 빨갛고 커다란 눈과 마주하는 순간 몸이 천천히 굳어서… 그래서….

“눈 말입니까?”

―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이었어요. 눈동자 가운데 새까만 심연이 몰아치는 것만 같은….

필립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마룡 네게브의 마안에 당한 건가? 그 드래곤 눈동자가 딱 그런 모양일 텐데. 그렇게 가정하면 대충 맞아떨어지기는 하네. 월랑족의 무녀쯤 되면 신화종의 피가 제법 짙을 테니 완전히 돌이 되지 않은 것도 말이 되고.’

잠깐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던 필립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도는 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하면 당신의 몸은 산산이 부서져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 그건 싫은데….

“물론 대현자쯤 되는 마법사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완전히 안전한 방법을 찾아내기는 힘들 겁니다. 어쩌면 수백 년이 걸릴 수도 있고요.”

―그것도 싫어요… 무녀에게만 전승되는 방법으로 의식을 가사 상태로 만들어서 지금껏 버텼단 말이에요…그건 두 번은 못 쓰는 건데! 의식이 멀쩡한 채로 수백 년을 견디라니…!

얌전히 듣고 있던 네리아가 중얼거렸다.

―더럽게 깐깐한데 그냥 못 찾은 셈 치고 놓고 가면 안 될까요? 주인님? 저 애가 아직 덜 갇혀 있었나 봐요. 그리고 사실 저 애 동의 같은 게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해요. 주인님께서 한다고 하면 쟤가 뭘 할 수 있는데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사실 필립은 자신이 있었다. 만일 마룡 네게브의 마안에 당해 석상이 된 거라면, 천 년이 지난 지금은 마안의 힘이 많이 약해졌을 게 분명했다.

“조금 따끔할 수도 있습니다.”

―네?

필립은 미리 양해를 구한 뒤 허리춤에서 단검을 한 자루 뽑았다. 그리고 석상의 금이 가지 않은 허벅지 쪽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아야야야! 지, 지금 뭘 하시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를 소음으로 분류한 뒤 필립은 완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이번에는 오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닌 순수한 마나를 움직였다.

오러를 움직이는 것보다 몇 배나 힘든 행위였다. 말하자면 물병에 든 물을 옮기는 것과 물 그 자체를 염력으로 움직이는 것 정도의 차이였다.

순식간에 필립의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완전히 열린 감각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필립은 뼛속까지 돌이 된 소녀의 몸속, 본래라면 심장이 있었을 위치에서 무형의 매듭을 발견했다.

‘이런 식이군.’

마룡 네게브의 마안은 몇 가지 저주를 담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석화의 저주였다. 필립은 그 저주의 원리를 대충이나마 이해했다.

‘세뇌. 아주 강력한 세뇌야. 저주의 대상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 공간에도 영향을 미치는 세뇌지. 천 년 전이면 네게브가 다치기 전이니 저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

다행히 시간이 많이 지난 탓에 필립의 능력으로도 저주를 해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초신경 하나하나가 경련하는 듯한 부담감 속에서 필립은 저주의 매듭을 마나로 이루어진 실로 툭툭 건드렸다.

마치 가시덩굴처럼 억세게 묶인 매듭이었다. 필립의 눈과 코에서 엷은 핏줄기가 흘렀고, 곧 매듭이 점점 헐거워졌다.

―…어?

네리아가 문득 탄성을 질렀다. 꼬리 달린 석상이 갑자기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 필립은 저주의 매듭이 저절로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소녀의 몸속 깊은 곳, 정확히는 심장에 체온이 깃들었고, 단단한 돌이었던 그것은 어느새 활력 넘치는 생명의 원천이 되어 박동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소녀의 가슴이 호흡을 위해 움직이려 들었고, 그 의미가 없을 것만 같던 행위는 소녀의 머리가 피와 살로 바뀌는 순간부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석상은 사랑스러운 소녀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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