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 *
‘아래로 이백 미터 이상은 내려온 기분인데.’
구멍 아래에 도착한 필립은 미리 내려온 라포와 마주했다.
“마법사는 두고 오셨습니까?”
“저기 오는군.”
필립이 위를 가리키자 페렉이 부유 마법을 건 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착지하자마자 원망 섞인 시선으로 필립과 라포를 한 번씩 쳐다보더니 곧바로 마법의 불빛을 불러내었다.
곧 주변 풍경이 드러났고, 페렉은 침을 꿀꺽 삼켰다.
뼈와 말라붙은 시체 같은 것들이 먼지 쌓인 돌바닥 아래에 가득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은 앞으로 쭉 이어진 통로였는데, 보이는 구간까지는 모두 그런 식이었다.
“이…이게 다 뭡니까?”
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끔찍한 광경이었다. 필립은 나름대로 통찰력을 발휘해 뼈와 시체 중 인간만이 아닌 인간형 괴수, 혹은 아인족의 것들 또한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시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뭔가 불길합니다.”
페렉이 약한 소리를 했다.
“뭔가 불길하다기보다도 대놓고 불길하군요. 이쪽이 차라리 안전합니다. 은근히 불길한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위험이 있다고 알려주는 쪽이 더 낫지 않습니까?”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페렉을 안심시켰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버럭 화를 내려던 페렉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 혼자만 심각하잖아? 사실 지금 그리 큰 위기가 아닌 게 아닐까?’
늑대 라포든 같은 교관인 필립이든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검을 들고 제자리에서 툭툭 뛰며 신체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고, 늑대 라포 같은 경우에는 아예 별일도 아니라는 듯 뒷발로 목 뒤를 긁었다.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아는 겁니까? 하하, 여러분끼리만 알고 계시지 말고 저도 좀 알려 주십시오.”
페렉은 웃는 낯으로 물었다. 하지만 필립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모릅니다. 뭐가 있어도 있겠죠.”
“예? 그러면 저기 가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뭐가 있는지도 모른다면서요.”
“뭐 딱히 죽을 것 같거나 크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굳이 다시 돌아갈 이유는 없죠.”
“고작 그런 근거로 목숨을 건다는 말입니까?”
“그러니까 딱히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 같다니까요? 일단 따라오시죠.”
“아니! 그게!”
페렉은 답답한 나머지 가슴을 쳤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필립은 마음속으로 페렉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교관님. 하지만 교관님은 똑똑한 사람이라 어쩔 수 없어요.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아는 척을 하면 분명히 수상하다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발에 차이는 뼈와 대체 얼마나 된 건지 알 수 없는 미라를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곧 뭔가 목소리 같은 게 들렸다.
“…히…께서…내주실 거야….”
“…하지 말고…해야 해….”
“잠깐만, 지금!”
페렉은 잔뜩 긴장한 상황에서 수상한 목소리가 들리자 바짝 얼어붙었다.
“이, 이곳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은 원혼들의 목소리가 분명합니다. 이런 소름 끼치는 목소리라니…!”
품속의 지팡이를 부서져라 움켜쥔 페렉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구천을 떠도는 재의 형상이여, 타고 남은 모든 것들의 종말이여…….”
그 주문을 들은 필립이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이런 지하에서 그런 걸 소환하면 다 죽습니다.”
방금 페렉이 주문으로 소환하고자 한 존재는 ‘재의 기사’였다.
전신이 재로 이루어져, 상대의 내부 장기로 침투해 마치 잠이 드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환상계의 강자 중 하나로 이렇게 밀폐된 공간이나 다름없는 공간에서는 무적에 가까운 소환수였다.
“방금 들으셨잖습니까? 저 끔찍한 목소리를!”
“아니, 저거 사람 목소리입니다. 너무 겁먹으신 것 같은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어보십시오.”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필립은 말없이 앞으로 더 나아갔다. 페렉은 지팡이를 꽉 쥔 채 그를 따라 걷던 중 다시 문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 응? 분명히 교수님들께서 구하러 오실 거야. 많이 아프겠지만, 조금만 견뎌 보자. 차냐. 보리안의 상처를 좀 막고 있어 볼래? 내가 나가는 길을 찾아볼 테니.”
이상하게 익숙한 목소리였고, 이상하게 친숙한 목소리였다.
“…오필리아 교관 목소리 아닙니까?”
페렉 교관의 질문에 필립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이럴까 봐 여기까지 따라온 건데.”
그가 굳이 2박 3일이나 걸리는 괴수 토벌 실습까지 따라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그는 이 장소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네펜서스의 둥지. 여기 들어온 학생들의 사망률은 70퍼센트 이상이지. 여길 찾아내서 먼저 토벌하려고 따라온 건데, 결국 누가 걸렸군.’
“거기 오필리아 교관님입니까?”
“누,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필립이 목소리를 높여 부르자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필립은 미리 라포에게 지시했다.
“놀랄 수도 있으니까 잠깐 저기 어디 좀 구석에 박혀 있도록.”
“…예.”
라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필립은 페렉 교관과 함께 오필리아 교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필립과 페렉을 확인하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허리에 찬 검을 뽑아 그들에게 겨누었다.
“내가 이런 것에 속을 것 같으냐? 감히 사악한 괴물 주제에 사람의 형상을 취하다니!”
그녀의 비장하고도 엄준한 외침에 필립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공격할 듯 기세가 날카로웠으나, 들고 있는 검의 끝이 조금씩 떨리는 것이 단단히 긴장한 듯했다.
“뭐 하는 겁니까?”
“간악한 괴물! 쓸데없는 수작은 집어치우고 어서 덤벼!”
“정신 좀 차리세요. 오필리아 교관. 저희는 도플갱어가 아닙니다.”
그러자 오필리아는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필립과 페렉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결론이 나온 듯 천천히 오러를 끌어 올리며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교관님들은 분명히 무르엘라 교수님의 심부름으로 근처 도시에 다녀온다고 했는데, 여기 있을 리가 없지. 더 들을 것도 없어.”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오른 필립은 그녀가 그냥 공격하도록 내버려 둘까, 하고 잠깐 고민했다. 지금이라면 합법적으로 정수리에 꿀밤 한 대 정도는 때려도 될 것 같았다.
“오필리아 교관님. 저희가 도플갱어라고 생각하시는 건 너무 지나친 비약입니다. 애초에 도플갱어는 이런 곳에 나타날 만큼 흔한 괴물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희귀한 나머지 실제로 목격된 사례 자체가 최근 7년 동안 단 한 건도 없는 개체인데, 하필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날 리가 없잖습니까. 게다가 저희는 교수님의 심부름으로 나간 걸로 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운 겁니다.”
페렉 교관이 침착하게 그녀가 진정하도록 유도했다. 그의 논리적인 설명을 들은 오필리아의 눈빛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그러면 정말 오스왈드 교관님과 페렉 교관님이세요?”
크고 예쁜 갈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더니 곧 그녀는 눈물을 훌쩍였다.
“…교관님들, 대체 어떻게 알고 구하러 오신 거예요?”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필립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저희도 어쩌다 들어왔다가 길을 잃은 겁니다. 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 * *
오필리아, 아니, 크리스틴 바로운은 화끈한 여자였다. 필립은 세게 꼬집힌 팔뚝을 어루만지며 오필리아가 보호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차냐 우제추와 보리안 허비트였다.
허벅지에 심한 부상을 입은 보리안을 차냐가 돌보고 있었는데, 이미 피를 꽤 많이 흘린 듯 얼굴이 창백했다.
“보리안 허비트가 오래된 구덩이 함정에 당했어요. 차냐가 보리안을 돕기 위해 함정 아래로 내려갔는데, 제가 저 애들을 올려 주려다가 갑자기 땅 아래로 빨려 들어가는 바람에….”
“…뭐 그랬겠죠.”
오필리아의 설명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아는 이야기였다.
페렉 교관은 보리안의 상처를 살피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출혈은 멈춰 놨습니다만, 따뜻한 곳에서 쉬지 않으면 상태가 더 나빠질 겁니다.”
딱히 보리안의 잘못은 아니었다. 눈먼 함정 같은 건 이런 평원에는 종종 설치되어 있는 것이었고, 교관이나 교수도 아닌 학생이 걸렸다고 해서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바로 나가야겠군요.”
“나가는 길을 아세요?”
오필리아가 묻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렉 교관님. 부유 마법으로 몇 명이나 운반할 수 있습니까?”
“아마 네 명 정도는 가능할 겁니다. 그 이상은 제 정신력이 견디질 못하지 않을까 싶은데…오전부터 탐지 마법 때문에 너무 많이 소모해서 말입니다.”
“잘됐군요. 다 데리고 나가십시오. 아마 오필리아 교관님은 그 폭포를 뚫고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페렉 교관님께서 차냐와 보리안을 돌보는 동안 오필리아 교관님이 구조대를 불러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교관님은 어쩌시려고?”
페렉의 질문에 필립은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저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긴 뭐 알아서 올라오실 수도 있으시니 알아서 하시겠죠. 알겠습니다.”
필립은 자신이 내려온 구멍까지 오필리아와 학생들을 인솔했고, 그들이 부유 마법으로 상승하는 모습까지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방해꾼들을 모두 처리했네.”
“그렇습니다. 작은 주인님. 아까부터 저 안에 있는 놈이 부르는 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어둠 속에 숨었던 월랑족 전사 라포가 스윽 모습을 드러내며 동의했다.
“저 안에 있는 놈에 대해서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이빨과 발톱 앞에서는 한낱 고깃덩어리일 뿐입니다.”
라포는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감을 표출했다. 필립은 라포의 새까만 코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믿고 맡기지.”
필립은 라포와 함께 이어진 통로 깊은 곳으로 향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필립은 불길한 기운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법 좋은 싸움이 될 것 같군요. 작은 주인님께선 괜찮으시겠습니까?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이 아닙니다. 최대한 작은 주인님을 보호하겠지만, 아마 조금 힘드실 겁니다.”
라포가 필립을 염려했다. 그가 파악한 필립의 실력으로는 견뎌내기 버거울 만큼 강한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아, 괜찮아.”
‘네펜서스는 그야말로 개창렬 몬스터였지. 난이도는 더럽게 어려운데, 주는 보상은 또 더럽게 짰어. 그래서 잡을 수 있는 타이밍에도 굳이 잡을 필요가 없었지. 하지만 그놈이 문지기라면, 밸런스가 그렇게 이상한 것도 말이 돼.’
원작 게임에서 고인물들에게 외면받는 필드 보스였던 네펜서스.
놈은 강력하기 그지없는 평지 드레이크였다. 드레이크라고 하면 드래곤의 아종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동양으로 치면 이무기 같은 존재였다.
단지 제아무리 오래 살고 열심히 뭔가를 하더라도 드래곤이 될 수 없을 뿐인 몬스터라는 점이 좀 다를 뿐이었다.
오래 묵은 개체 중에서는 이성을 가지고 사람의 말을 하는 놈도 있었다.
필립이 곧 마주치게 될 네펜서스가 그런 존재였다.
“…어쩐지. 그랬군. 그래서 그런 행동을 했던 거야. 그렇게 이어붙이면 말이 되지. 단순한 필드 보스가 아니라고 가정하면 그 모든 게 들어맞아.”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필립을 빤히 쳐다보며 라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아프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