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 *
‘살다 보니 내게 이런 일도 다 생기는구나.’
페렉 교관은 오늘따라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는 지금껏 성실히 살아온 보상을 받는 듯한 성취감마저 느꼈다.
‘이게 다 평소에 평판을 잘 관리해서 일어난 일이지. 오스왈드 교관님께서 나를 좋게 보아주신 덕이야.’
그가 생각하는 필립은 자신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일단 출신부터가 고위 귀족에, 외모부터가 무슨 소녀들이 좋아하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생겼고, 게다가 검술 실력 또한 대단했다.
‘뭔가 되어도 아주 크게 될 사람이지. 암.’
필립과 같은 사람들은 고작 아카데미의 교관으로 끝날 리 없었다. 저만큼 비범한 사람이라면 나중에 역사에 남을 만한 업적을 세울 게 분명했다.
페렉은 그런 사람과 적당히 친한 관계만 유지해도 어마어마한 부가가치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른바 낙수효과였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페렉 교관님?”
“아, 물론입니다. 오스왈드 교관님.”
페렉 교관은 필립의 질문에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된 고대 마법 주문을 대가로 받는다는 생각에 벌써 몸이 달았다.
필립과 페렉 교관은 다른 교관들이 열심히 실습을 준비할 때 따로 빠져나와 평원 수색을 준비했다. 본래 첫 야영을 끝낸 다음의 실습은 괴수 토벌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위한 것으로, 그리 많은 교직원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자 월랑족 전사 라포가 그 늠름한 모습을 드러냈다.
“출발합니…아니, 이렇게 다들 모여 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반드시 보답하겠다.”
라포는 즉시 두 인간을 자신의 등 뒤에 태우고 평원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의심스러운 장소는 이미 몇 군데 알아봐 두었으니 일단 그곳으로 향하겠습니… 아니, 향하겠다.”
‘누가 개과 아니랄까봐 충성심이 과하군.’
라포는 필립에게 반말을 내뱉는 것이 어려운 듯했다. 뭔가 말을 할 때면 대단히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곤 본래 컨셉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조금 어지러웠다.
인간을 뛰어넘은 고차원적인 본능과 감각을 지닌 라포는 자신이 위화감을 느꼈던 장소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첫 장소는 평원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돌기둥이었다. 비슷한 크기의 돌기둥이 세 개가 있어 마치 고대의 유적처럼 보였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입니다.”
의욕으로 가득 찬 페렉 교관이 먼저 나서서 돌기둥에 탐지 마법을 시전했다. 그의 지팡이로부터 퍼져 나간 무형의 막이 돌기둥을 훑고 지나가자 돌기둥에 쩌억, 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기둥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단순히 돌덩어리가 된 그것들이 공중에 떠오르더니 제멋대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저 현상이 무엇인지 필립은 알고 있었다.
“골렘이군요.”
그의 말대로 돌기둥들은 이내 한 기의 스톤 골렘으로 완전히 변모했다. 고대에 제작된 마법 병기 중 하나를 마주한 페렉의 안색이 새까맣게 죽었다.
저건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핵을 찾아내어 제거하지 않으면 처치할 수 없는 놈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손상된 부위를 끝없이 재생하여 공격하는 쪽이 오히려 지칠 터였다.
“도…도망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흥, 저까짓 돌덩어리 따위.”
라포가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나섰다. 그 든든한 월랑족 전사는 순식간에 마력을 끌어 올렸고, 곧 전신에 창백한 색의 마력이 들끓었다.
저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월랑족의 힘이었다. 마치 발사된 포탄처럼 골렘에게 달려든 라포는 골렘의 몸통 한가운데를 몸통박치기로 관통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골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주변의 땅에서 흙과 돌이 떠올라 골렘의 파손된 부분을 복원했고, 라포는 몇 번이나 공격을 반복했으나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이런 빌어먹을!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고작 골렘 한 기와 천일지투를 벌이려는 라포를 보며 필립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저 늑대를 보며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었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보다 못한 필립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이미 흥분한 라포는 뒤로 물러나 으르렁거릴 뿐 싸움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 시간 없으니까 비키라고요. 좀.”
“아… 예. 하핫.”
짜증이 치민 필립이 중얼거리자 라포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꼬리를 말고 물러났다.
‘핵이 어디에 있는지 딱 보면 모르나?’
라포나 페렉이 들었다면 기가 찼을 소리였다. 필립은 어지간한 건물보다 커다란 골렘을 앞두고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골렘의 느려터진 공격 정도는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눈을 감고도 피할 수 있었으니까.
필립은 골렘의 다리 사이를 몇 번이나 왕복했다. 처음에는 팔을 휘둘러 필립을 맞히려던 골렘은 아무래도 각이 나오지 않자 다리를 들어 필립을 밟으려 들었다.
그 순간 필립의 검이 골렘의 왼쪽 발바닥을 노렸다. 오러를 잔뜩 휘감은 검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골렘의 핵을 관통했고, 곧 골렘을 구성하던 바위들이 가루가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까다로운 골렘을 순식간에 해치운 필립을 보며 페렉 교관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떻게 하신 겁니까? 발바닥에 핵이 있다는 걸 아신 겁니까?”
“보통 골렘의 핵은 저곳에 있습니다. 마법사들 생각이야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급소나 팔다리를 노리는 검사들은 많지만, 굳이 발바닥을 노리는 검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말입니다.”
“이전에도 골렘을 상대해 본 적이 있으신지…?”
“아… 예. 몇 번. 정도.”
필립은 대충 대답하며 라포를 노려보았다.
‘저 개대가리에게 모든 걸 맡긴 내 잘못이 크지.’
라포는 분명히 대단한 수준의 전사였으나, 이런 수색에는 능숙하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라포처럼 골렘의 재생력 이상으로 빠르게 구성물질을 파괴한다면 골렘을 유지하는 술식이 과부화를 일으켜 붕괴되는 것도 맞았다.
그러나 그렇게 가성비가 낮은 방법도 드물 것이었다.
“다시 출발하시죠.”
“…예, 아니. 그러자고.”
필립의 말에 라포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여덟 시간을 돌아다닌 뒤, 페렉은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애초에 늑대는 사람을 태우는 법을 몰랐고, 강한 신체의 소유자인 필립이야 괜찮았으나 나약한 마법사인 페렉은 그저 등에 타고 있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꽤 소모되었다.
그러나 기동력만큼은 대단했기에 일행은 그 넓은 평원을 거의 모두 살피며 의심스러운 장소를 대부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을 고대 종족이라 밝힌 월랑족과 필립 사이의 관계가 조금 묘하게 바뀐 것 같았으나 그는 신경조차 쓸 수 없었다.
입은 로브에선 땀 때문에 짠내가 날 정도였고, 얼굴과 드러난 살갗은 흙먼지로 완전히 더러워졌다. 게다가 뼈마디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됐다.”
“…정말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마지막 장소로 안내해.”
필립 또한 짜증이 치밀었으나 무작정 라포를 탓할 수는 없었다. 고대 지식이나 마법적인 지식이 없는 라포가 선정한 후보지라는 게 뻔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라포는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제기랄, 작은 주인님의 눈에 들어 심복이 될 생각이었는데….’
이대로라면 심복은커녕 골칫덩어리로 낙인찍힐 것만 같았다.
그는 강력한 전사였으나, 월랑족 전사 중에선 그리 높은 계급이 아니었다. 월랑족 대전사나 고위 전사들을 구해낸다면 그들에게 밀릴 것이 분명했다.
월광검의 계승자인 필립의 곁에서 명예를 누리기 위해선 이런 식으로는 곤란했다.
라포는 필립과 페렉을 다시 등에 태우고 평원 외곽을 향해 달렸다.
던소어 평원에는 한 줄기 강이 흘렀다. 평원을 감싼 산맥에서부터 흐르는 강이었는데, 평원이 시작되는 곳에 자리한 폭포에서 하류로 줄기가 흘렀다.
일행이 도착한 곳은 그 거대한 폭포였다.
“이제 남은 건 이곳뿐입니다! 폭포 뒤에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 속에 지하로 향하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제대로 수색하지 못했습니다!”
물소리가 워낙 컸기 때문에 라포는 크게 소리쳐 의사를 전달했다.
‘여기 동굴 같은 게 있었다고?’
필립 또한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페렉은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폭포를 보더니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폭포를 뚫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저 같은 건 방어막을 전개하더라도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할 겁니다.”
라포가 곧 해답을 내어놓았다.
“이렇게 하지. 마법사 그대가 방어막을 전개하면, 내가 인간으로 변해 그대를 동굴 안으로 내던져 주면 되겠군.”
“…예? 진심이십니까?”
당황한 페렉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필립은 그 창의적이면서도 무식한 방법을 듣고 감탄을 금치 못하며 페렉을 달랬다.
“제가 먼저 들어가서 교관님이 다치지 않도록 받아내겠습니다.”
“저…저 거대한 폭포를 뚫고 들어가겠다는 말씀입니까?”
“해야죠. 가서 쉬려면.”
필립은 이곳에서 다른 월랑족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거의 버린 상태였다. 여덟 시간이나 흙먼지 속에서 돌아다닌다면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폭포를 노려보았다.
수영 선수 할아버지가 와도 휩쓸려 죽을 것처럼 무섭게 흐르는 물살은 인간의 접근을 허락지 않겠다는 듯한 기세였다.
“저기! 저쪽이 동굴입니다!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작게 한숨을 내쉰 필립은 라포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어? 어어? 교관님?”
그 무식한 행동에 깜짝 놀란 페렉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곧 필립의 검에서 찬란한 오러가 솟아나더니 나선의 형태를 갖추며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굴착용 드릴처럼 물살을 꿰뚫고 뒤편의 동굴에 안착했다.
“으아아아악!”
곧 페렉 교관의 비명과 함께 새파란 방어막에 휩싸인 페렉 교관이 동굴 안으로 날아들었다. 필립은 검기를 그물처럼 엮어 페렉 교관의 방어막을 감싸며 충격을 대신 흡수해 주었고, 곧 페렉 교관 또한 안전히 동굴 바닥에 나뒹굴었다.
라포는 맨몸으로 폭포를 뚫고 뛰어들었고, 세 명이 모두 모이자 페렉이 마법의 불빛으로 동굴 내부를 밝혔다.
내부는 평범한 종유석 동굴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모두는 뭔가 부자연스러운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법이든, 오러든, 마력이든, 초자연적인 힘을 다루는 이들 특유의 직감이었다.
“이쪽으로.”
처음에 비해 매우 공손해진 라포가 필립과 페렉을 안내했다.
그가 안내한 곳으로 향하니 성인 남자 셋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동굴 한가운데 나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했다. 마치 심연으로 이어지는 구멍 같았다.
필립은 주머니에서 미리 챙겨둔 발광석을 꺼내 구멍 아래로 떨어트렸다. 발광석은 빛을 흩뿌리며 떨어져 내리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라포의 말대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구멍이었다.
“…여길 들어간다는 말입니까? 저는 못 합니다. 탐지 마법의 범위가 안 닿는 걸 보니 깊이가 적어도 수백 걸음 이상입니다.”
페렉 교관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싫다는 듯 뒤로 물러섰다.
“금방 탐색하고 부유 마법으로 올라오면 그만이잖습니까.”
필립 또한 들어가기 꺼려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도 없었고, 어차피 해야 한다면 마법사가 있는 편이 몇 배는 편했다.
“저 안에 무언가 있다면, 그 존재가 무엇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습니다.”
“그 어떤 괴물이라도 위대한 전사인 이 몸 앞에서는 어린양이나 다름없지. 마법사 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라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으나, 그 말을 들은 페렉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저 늑대 새끼, 생각보다 허당이란 말이지. 누군가를 믿어야 한다면 오스왈드 교관님뿐인데….’
“쉽게 생각하십시오. 교관님. 어차피 저 늑대의 도움이 없으면 교관님께서는 여기 계셔야 합니다. 만약 마법의 도움이 없어 우리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교관님께선 영원히 이 안에 갇혀야 합니다. 저는 내려갈 생각이니까요.”
“아니,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그냥 내보내 주십시오!”
페렉 교관이 펄쩍 뛰며 항의했으나 라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필립은 라포를 바라보며 턱짓으로 구멍을 가리켰다. 늦기 전에 먼저 들어가라는 말이었다. 라포는 조금 긴장했으나, 필립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기에 용감히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천천히 따라오십시오.”
필립 또한 검을 뽑고 구멍 안으로 몸을 날렸다. 혼자 남은 페렉 교관은 울상을 지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래서 몸 쓰는 것들하고는 상종을 말아야 하는데!”
페렉은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한 뒤 몇 번 망설인 후에야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물론 부유 마법을 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