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09화 (109/119)
  • 109화

    * * *

    “하아암~”

    순찰이 끝나고 난 뒤 필립과 오필리아 교관은 미리 설치해 둔 천막으로 돌아왔다. 제법 피곤한 하루였기 때문인지 오필리아는 필립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 하품했다.

    “피곤하십니까?”

    “네… 조금요. 아까 긴장을 너무 많이 했나 봐요.”

    필립의 질문에 오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끔찍한 경험이었어요. 늑대라면 제법 많이 만나봤거든요. 어릴 적에는 기르기도 했었는데… 한동안은 집 지키는 개만 봐도 놀랄 것 같아요.”

    “예? 늑대를 기른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혹시 귀족 출신이신지?”

    “앗! 아, 아뇨. 전 성이 없잖아요. 당연히 평민이랍니다. 그러니까, 아버님…… 아니, 아버지가 푸줏간을 하셨어요. 원래 늑대는 생고기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잖아요?”

    긴장이 풀린 탓인지 컨셉을 잃으려 하는 오필리아를 위해 필립은 친히 그녀의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세계관 더럽게 대충 짰군. 푸줏간에 늑대를 기르기는 무슨. 횟집을 했으면 크라켄이라도 길렀으려나.’

    “아. 그렇군요. 푸줏간을 했으면 그럴 수 있죠.”

    신분을 숨기고 싶기나 한지 의심스러운 변명에도 필립은 대충 넘어가 주는 아량을 보였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뭔가 불만이라는 듯 필립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제가 바보로 보이시나요?”

    필립은 그녀의 질문에 무슨 소리냐는 듯 오히려 되물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 누가 봐도 어설프잖아요. 오스왈드 교관님께서 바보도 아니고, 저만한 실력의 평민 교관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났는데, 저에 대해서 아무도 캐묻지 않더란 말이에요. 방금도, 제가 싸움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하셔서 교수님들께서 저를 남긴 게 아닌가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수준 이상의 실력을 지닌 검사라면 오필리아 교관이 풍기는 기세를 어느 정도는 알아차렸을 터였다.

    그러나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죠. 하지만 사생활을 존중하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너무 그렇잖아요. 제가 만약 나쁜 마음을 먹고 아카데미에 잠입한 악당이었으면….”

    “그랬으면 지금쯤 어디 묻혀 있었겠죠. 모르시겠지만, 프리비아 아카데미에는 온갖 종류의 보호와 알람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사령술사들의 마스터라고 해도 아카데미 내부에선 별다른 힘을 쓸 수 없을 겁니다.”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조금 과장을 보태면 인류의 미래였다. 이곳에서 성장한 학생들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자신의 영지를 이어받거나, 북부 전선, 또는 온갖 위험한 싸움터에서 귀족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평민 출신 학생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오히려 귀족 출신 학생들보다 더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편이었다.

    말하자면 마법과 오러가 현존하는 이 세상에서 아카데미라는 교육 기관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장치 중 하나였다.

    올바른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이 끊임없이 사회로 투입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몇 세대 만에 마족에게 대항할 능력을 잃고 말 터였다.

    그런 역할을 하는 기관의 보안이 어설플 리가 없었다.

    “….”

    사실 필립은 그녀가 왜 아무 문제 없이 교관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이미 잘 알았다.

    ‘크리스틴 바로운? 걔가 왜 갑자기 교관 노릇을 하겠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쁜 애는 아니니 상관없지 않을까? 애들 대충 가르칠 성격도 아니고, 동생인 헤일리를 예뻐하는 걸 보면 악영향이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은근히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 적어도 몇 년은 아카데미에 붙어 있을걸?’

    일단 펠리시아는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내버려 두게. 우리로서는 손해가 아닌 일이니. 적당히 해먹다가 질릴 때쯤 돌아가겠지. 바로운 가문 정도면 아카데미에서 개수작을 부릴 일도 없을 테고 말일세. 제법 명예를 아는 가문이니 욕먹을 만한 짓은 하지 않을 걸세.’

    수석교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그 아가씨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반가운 얼굴이 보여서 먼저 인사를 건넸는데, 어울리지도 않게 모르는 척을 하더군요. 뭔가 사정이 있나 싶어서 모르는 것으로 해 두고 있습니다.’

    캐슬러 교수는 아예 대놓고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녀가 아무 문제 없이 교관 생활을 하는 건 평판 좋고 성실한 귀족 아가씨의 일탈을 넘어가 주려는 어른들의 노력 덕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 줬다간 수치심으로 인해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았을 거라 여길 터였으니까.

    “교관님께서 정체를 밝히고 싶으시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딱히 그렇지 않다면 얼마든지 배려해 드릴 수 있습니다.”

    “…피. 그러셔요.”

    뭔가 김이 샌 듯한 표정으로 오필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났다는 듯 갑작스럽게 질문했다.

    “제 동생은 말을 잘 듣나요?”

    이미 그녀에게서 관심을 끄고 라포에 대해 생각하던 필립은 그 갑작스러운 공격에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헤일리 말입니까? 아주 모범적인… 아뿔싸.”

    ‘내가 이런 유치한 수법에 당하다니?’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유도신문이었다.

    가끔은 고도의 심리전보다 이런 유치한 수작이 더 잘 먹히는 때가 있다는 건 필립도 잘 알았으나, 이렇게 쉽게 넘어갈 줄은 몰랐다.

    필립은 당황한 표정으로 오필리아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필립에게 눈을 흘기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역시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아니… 그게….”

    “사람 가지고 노니까 재밌으세요? 이러면 나만 바보가 되는 거잖아!”

    * * *

    필립은 꼬집힌 팔을 쓰다듬으며 천막 밖으로 나와 라포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저 아가씨 성격에 저만하길 다행이로군.’

    다행히 오필리아, 아니 크리스틴은 정말로 화가 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필립에게서 자신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한 변장과 행동들이 전혀 효과가 없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침울한 표정으로 침낭 속에 틀어박혔다.

    그녀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지는 못했으나, 딱히 중요한 이유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야영지를 벗어나 후미진 장소로 이동했다.

    “…그, 작은 주인님? 명하신 대로 도착했습니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것인지….”

    늑대의 형상으로 변한 라포가 필립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각 잡힌 자세로 정좌한 채 필립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수색에 좀 어려움이 있는 건가?”

    필립이 묻자 라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작은 주인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얼마든 도와줄 의향이 있는데. 굳이 혼자서 해결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어서 말이지. 이게 자존심을 세울 일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고 말이야.”

    필립이 그를 다독이자 라포는 한번 크게 낑낑대더니 이내 사실을 인정했다.

    “사실 많이 어렵습니다. 이 근처에 동족의 봉인지가 있다는 건 기억이 나는데, 아무래도 마법적인 수작으로 흔적을 은폐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근처에 봉인지가 있다고?”

    깜짝 놀란 필립이 묻자 라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이곳 근처에는 저희 월랑족의 무녀가 잠들어 있을 겁니다. 그 애라면 아마 대전사께서 잠든 곳도, 다른 동족이 잠든 곳도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애? 많이 친했던 모양이지?”

    “그것이… 그녀는 제 아내 로로의 동생. 즉 제 처제입니다.”

    필립은 라포의 처지를 진심으로 동정했다. 처제가 봉인된 곳을 찾아야 하는 그의 팔자가 너무나도 기구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리를 굴린 필립은 이내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고. 솜씨 좋은 마법사를 한 명 섭외해 줄 테니, 시간을 내서 이 근처를 함께 수색해 보자. 어때?”

    라포는 감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정말이지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주인님….”

    “아까 보니 연기에 꽤 재능이 있어 보이던데,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될 거야.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어. 아직 내가 월랑족과 큰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안 되거든.”

    “맡겨만 주십시오. 반드시 해내어 보이겠습니다.”

    필립은 라포에게 자신이 생각한 계획을 이야기했고, 라포는 즉시 동의하며 필립을 그의 등에 태웠다.

    그렇게 잠깐 달려 도착한 곳은 캐슬러 교수와 페렉 교관이 함께 쓰는 천막 근처였다.

    “무르엘라 교수님? 잠깐 나와 보시겠습니까?”

    캐슬러 교수는 오후에 그를 긴장시켰던 은색 늑대의 기척을 느끼곤 상당히 놀라 곧장 지팡이를 소환했다. 그러나 곧 등 위에 올라탄 필립을 발견하고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교관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보시다시피, 이 늑대가 우리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더군요.”

    필립이 라포의 등에서 내려오자 라포는 헛기침을 몇 번 해 목을 가다듬은 뒤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제법 유능해 보이는군. 나로 말하자면 고대부터 이 땅을 수호했던 월랑족의 일원으로, 지금은 온 세상을 떠돌며 동족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네. 만약 그대들이 날 도와 내 동족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준다면 고대의 보물로 보답하겠네.”

    “…?”

    캐슬러 교수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시선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필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페렉 교관님 좀 빌려 달라는 이야깁니다. 탐지 마법만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이면 될 것 같으니….”

    캐슬러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페렉 교관이 펼치는 탐지 마법이나 캐슬러의 그것이나 그 질은 비슷하다고 봐도 좋았다. 단지 어떠한 마법적인 흔적만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사…상당히 당황스럽지만. 일단은 알겠습니다. 당신은 악한 존재가 아닌 듯하니… 일단 본인 의견을 좀 들어 보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뭔가 멋진 말을 내뱉으며 새까만 늑대를 물어 죽이던 라포의 모습을 기억했기에 캐슬러는 별 의심 없이 페렉 교관을 불러냈다.

    신수나 수호신 따위가 인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은 세상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꿀맛 같은 단잠을 즐기다 불려 나온 페렉 교관은 라포의 늠름한 모습을 보곤 헉, 하고 숨을 삼킨 뒤 중얼거렸다.

    “제발 저 늑대가 야식을 즐기러 나온 게 아니기를….”

    캐슬러와 필립이 그를 안심시켰고, 설명을 들은 페렉 교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저 늑대 신사분을 도우면, 실습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차피 둘째 날은 진지 구축과 병력 편제에 대한 실습이니, 하루 정도는 상관없을 겁니다. 교관. 교관은 아카데미 수업에 익숙하지 않은 저를 위해 이것저것 많이 도와주었으니, 이번에는 제가 교관을 돕도록 하죠. 다른 분들께는 제가 근처 도시로 심부름을 보냈다고 하겠습니다.”

    어차피 탐지 마법이나 몇 번 쓰면 되는 일이었다.

    “보상은 확실히 할 테니 걱정하지 말도록. 인간이여. 나는 천 년을 살아온 몸. 마법사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으니. 이를테면, 지금은 실전된 마법 주문은 어떤가?”

    뭔가 대단해 보이는 늑대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페렉 교관은 은근히 기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교수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실전된 마법 주문이라는 말에 눈이 돌아간 페렉 교관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로 필립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런 기회를 줘서 감사하다는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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