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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08화 (108/119)
  • 108화

    * * *

    월랑족은 기본적으로 강자존의 법칙을 준수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위계질서가 없는 종족은 아니었다. 종족의 대전사와 지도자가 분리되어 있었고, 한번 충성을 맹세한 이가 있다면 그가 노쇠해져 자신보다 약해진다 하더라도 그 충성을 거두지 않았다.

    월랑족 전사 라포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사실 그는 호기롭게 의무를 다하겠노라 선언한 뒤 여행길에 오르기는 했으나, 이 넓은 대륙에서 동족의 흔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단서라곤 천 년 전의 기억뿐이었고,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기억이 나름대로 선명하다는 것.

    오래된 기억에 의하면 분명히 이 근처가 맞았다. 단지 마법적인 지식이나 능력이 전혀 없어 수색에 난항을 겪고 있을 뿐.

    ‘왜 작은 주인님께서…?’

    이 상황에서 수색이고 나발이고 가장 중요한 건 필립의 심사였다.

    물론 라포는 지금 당장 필립을 찢어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했으나, 필립은 머지않은 미래 월광검을 완전히 계승해 월랑족을 비롯한 달의 아이들을 이끌 존재.

    그 이전에 자신과 아내, 그리고 새로 태어난 딸을 격리된 세계에서 내보내 준 은인이기도 했다.

    라포는 말없이 필립의 눈치를 살폈다. 필립은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말했다.

    ‘아는 척하지 말고 눈치껏 행동.’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라포는 즉시 검은 털의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이, 이노오옴!”

    저 검은 늑대의 정체는 다크엘프 웨어울프였다. 웨어울프 인자에 몸을 지배당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다크엘프로서의 지능이 모두 사라진 개체.

    필립이 아는 원작에선 ‘늑대왕 모지스’라고 불리던 보스였고, 저레벨 보스 중에서는 제법 까다로운 상대였으나 라포에겐 조금 사나운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크르르릉!”

    흉악한 울음을 뱉으며 검은 늑대는 급소를 내주지 않기 위해 몸을 비틀었으나 라포는 곧바로 놈의 목덜미를 물었다.

    으드득, 하고 경추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울린 뒤 늑대왕 모지스는 몇 번 몸을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싱겁기 그지없는 결말.

    본래라면 어느 정도 전투를 즐겼겠으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이 건방진 축생이 감히 인간의 도시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민생을 어지럽히고 치안을 악화시켜! 내 오늘 네게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를 대신해 그 죄 많은 삶을 끝내겠노라!”

    라포는 그렇게 소리친 뒤 똥오줌을 흘리며 경련하는 늑대왕 모지스를 입에 문 채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늑대 아저씨. 주인님이 있다가 밤에 찾아오래요.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고요.

    자세히 보니 필립이 던진 검의 손잡이가 그의 발목에 닿아 있었다. 필립에게 에고 소드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걸 모르는 척했다가는 앞으로가 조금 고달플 것 같았다.

    라포는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즉시 그 자리를 멀리 벗어났다.

    남은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캐슬러 교수가 중얼거리자 알테어 교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뭐, 중요한 건 우리가 모두 무사하다는 게 아닐까요? 방금 상황은 우리 중 누군가 한둘쯤은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말이죠.”

    “다행히 둘 중 하나가 정의로운 신수였던 모양입니다. 한숨 돌렸군요.”

    캐슬러 교수는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필립은 아직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오필리아 교관을 챙겼다.

    “괜찮으십니까?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만.”

    오필리아 교관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이건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대사건인데. 교관님은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저희 모두 다 죽을 뻔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그녀는 충격과 공포 탓에 컨셉을 잊기라도 한 듯 걸걸한 목소리로 속사포처럼 말했다.

    “전 슬슬 퇴직을 생각해 봐야겠군요. 교관 생활만 올해로 4년인데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제명에 죽고 싶으면 슬슬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 자리라도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가만히 있던 페렉 교관 또한 말을 보탰다.

    오필리아 교관은 전혀 여유를 잃지 않은 필립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되먹은 사람이지? 아무래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겠어.’

    * * *

    교수들과 교관들이 돌아오자 멈췄던 야영지의 시간이 그제야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조금 어설픈 솜씨로 불을 피웠고, 각자 가지고 온 식량을 조리하기 시작했다.

    셰릴은 차냐 우제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딱딱한 빵과 질 낮은 육포를 손에 들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즐거운 식사 시간!”

    말없이 자신이 든 최고급 소고기 훈제 육포와 보존용 비스킷을 빤히 쳐다보던 셰릴은 이내 육포의 반을 쭉 찢어 차냐에게 내밀었다.

    “어? 이거 나 주는 거야?”

    차냐 우제추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이것만 먹어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더 열심히 움직여야 하는 건 너잖아.”

    실제로도 셰릴은 입이 꽤 짧았다. 본래라면 그녀 또한 차냐와 비슷한 수준의 식량을 챙겼을 테지만, 쟈니스가 그녀의 몫까지 따로 준비해 준 것이었다.

    “정말 고마워!”

    크게 감동한 차냐 우제추가 셰릴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봐, 식사 중에도 신중함을 유지해야 하는 걸 잊은 건 아니지?”

    다른 두 조원들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떠들던 보리안이 인상을 쓰며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차냐 우제추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를 무시했다.

    “너 진짜 좋은 애구나?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은혜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데….”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셰릴과 차냐를 보며 보리안은 미간을 좁혔다.

    “하! 야만인, 그리고 평민이라. 하긴, 너희들이 협동심이라는 걸 알 리가 없지. 너희,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으면 발목이나 잡지 마라. 알았냐? 특히 야만인 너 말이다.”

    대놓고 자신을 저격하는 말에도 차냐는 셰릴이 준 육포를 오물거리며 생글생글 웃을 뿐이었다. 셰릴은 저렇게 잘 단련된 아가씨도 귀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눈을 깜빡이다가, 차냐가 방금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셰릴이 뭐라고 말하려 하자 차냐가 그녀를 말렸다.

    “됐어, 됐어. 내버려 둬. 어차피 병신들은 자기가 병신인 줄 몰라서, 남들이 뭐라고 하면 화만 버럭 낼 줄 알거든. 저렇게 세상 물정 모르고 나대는 병신이랑 말을 섞어 봤자 너랑 나만 손해야.”

    차냐의 말에 보리안이 눈을 부릅뜨며 앞으로 나섰다.

    “뭐, 뭐라고? 병신? 지금 나보고 한 말이냐?”

    “저거 봐. 셰릴. 그냥 얌전히 자기 말 듣는 애들 데리고 대장 놀이나 하면 될 걸, 왜 거둘 깜냥도 안 되는 사람들한테까지 저러는지 몰라.”

    차냐는 뒤가 없는 것처럼 말했다. 셰릴은 그녀의 패기에 눌려 침을 꿀꺽 삼켰다. 차냐는 셰릴이 살면서 처음 만나는 인간 유형이었다.

    보리안 허비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으나, 다행히 이 상황에서 화만 내면 자신이 질 뿐이라는 걸 잊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휘 체계가 중요하다. 아까도 말했지만, 허비트 자작령에는 해마다 수많은 괴수가…….”

    “아, 그래. 알겠어. 알았다니까? 네가 뭐라고 해도 내가 순한 양처럼 네 말을 듣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냥 거기 두 사람이랑 잘 놀아 봐. 말로만 야만인, 야만인 노래를 부르지 정작 내가 어디서 왔는지 잊은 모양인데. 네가 장난감 칼을 들고 목마 위에서 꺄르륵 웃을 때 나는 아빠가 베어 온 오우거 머리통 위에서 미끄럼틀을 탔다 이거야. 응? 너네 아빠는 어떤데?”

    차냐의 일침에 셰릴은 감탄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대륙 중부의 숲은 ‘마경’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괴수들이 많았고, 그 숲 깊은 곳에서 살아온 차냐는 보리안과 비교하는 게 우스울 정도로 괴수들의 생태에 통달해 있을 터였다.

    “너희는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니?”

    그때 야영지 순찰을 돌던 필립과 오필리아가 천막 근처로 다가왔다. 필립은 물론 멀리서부터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전후 사정을 모두 알고 있었으나, 학생들의 입으로 듣는 것도 중요했다.

    “…교, 교관님. 그게….”

    리더를 자처한 보리안 허비트가 뭔가 설명하려고 애쓸 때, 차냐 우제추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보리안 허비트가 야만인하고 평민 주제에 왜 자기 말을 안 듣느냐고 저희를 몰아붙였어요.”

    뭔가 좀 많이 생략되었으나 따지고 보면 맞는 말뿐이었기에 필립 또한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었다.

    “너는… 차냐 우제추구나.”

    필립은 그녀를 알아보곤 쓰게 웃었다. 차냐 우제추는 원작에서 꽤 쓸 만한 전위 캐릭터였다.

    ‘10인 파티 기준으로 1티어 탱커지. 다만 입이 좀 문제지만.’

    “어… 절 아세요?”

    “내 누님이신 오스왈드 교수님의 애제자니까. 알 수밖에. 차냐 우제추, 네가 내게 거짓말을 하진 않았겠지만, 정말 네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익.”

    차냐는 필립이 강적이라는 사실을 즉시 알아차렸다. 평소 하던 대로 말만 잘한다고 넘어갈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맞습니다! 차냐 우제추가 먼저 소란을 일으켰고….”

    “너는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괜히 끼어들어 한마디 하려던 보리안에게 오필리아 교관이 충고했다.

    “너희는 모두 감점이다. 당장 내일 서로 등을 맡겨야 할 사이인데, 누구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구나. 양보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리적으로 조용히 해결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거다. 내 말이 틀렸니?”

    “…아니요.”

    필립의 말에 학생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겠거든 마찰을 일으키진 말아라. 그리고 보리안 허비트. 네가 한 모욕적인 발언에 대해선 따로 징계하겠다. 셰릴과 차냐 우제추는 잠시 따라오도록.”

    필립은 울상을 짓는 보리안과 나머지 조원들을 내버려 두곤 차냐와 셰릴을 따로 구석진 곳까지 불러냈다.

    차냐는 당당한 태도였으나, 아예 긴장하지 않은 건 아닌 모양인지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네 차례는 다음이니 조금 기다리렴. 셰릴, 네가 말해 볼래?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게, 보리안 허비트는 다른 조원들과 이야기하고 있었고, 저는 차냐랑 같이 밥을 먹고 있었는데…….”

    셰릴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했고,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냐 우제추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보렴.”

    차냐 우제추가 몇 걸음 다가오자 필립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그녀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잘 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결국 적이 늘어날 뿐이다.”

    차냐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반박했다.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보리안이 저를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건 되고, 제가 보리안을 병신이라고 부르는 건 안 되는 건가요?”

    “물론 둘 다 안 되는 일이지. 너도 잘 알잖니.”

    “그러면 저는 얌전히 모욕당해야만 해요?”

    소수민족 출신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녀가 1학년, 그리고 2학년 동안 꽤 심각한 모욕과 괴롭힘을 당해 왔다는 걸 필립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물론 걸어오는 시비를 절대 피하지 않은 덕에 지금은 딱히 괴롭힘을 당하지 않지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 또한 없을 터였다.

    “널 탓하려는 것도 아니고 혼내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젠 다른 아이들과 좀 친하게 지내는 게 어떨까 싶어서 안타까울 뿐이지. 네가 저학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누님께 들었단다.”

    필립은 손을 뻗어 차냐의 정수리 위에 얹었다. 차냐는 움찔하며 그의 손을 쳐내려다가, 필립이 펠리시아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내곤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마치 작은 고양이를 쓰다듬는 듯한 손길은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기에 차냐는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왜 좋지?’

    “셰릴과 친하게 지내는 게 좋을 거다. 생각이 있다면 내가 고문으로 있는 여행 동아리에 가입하는 것도 좋겠지. 나중에 그럴 마음이 들면 셰릴이나 내게 이야기하렴.”

    ‘되도록이면 빨리 좀 부탁한다.’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차냐를 다독였다. 이런 식으로 접점을 만들었으니 되도록 빨리 그녀를 자신의 관리 아래 두어야 했다.

    ‘탱커 키우는 게 제일 빡세거든.’

    학생 중에서 제법 등급이 높은 탱커는 몇 있었으나, 아쉽게도 모두 남학생이었다. 그들은 백이면 백 루아나 쟈니스 같은 여자아이들에게 반할 것이 분명했고, 1년 안에 사랑을 고백하고 말 것이었다.

    ‘열심히 키워 봤자 고백해서 차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놈들이야.’

    헤일리 바로운이나 스테판 브레이 같은 남학생들이 특별한 케이스였지 보통은 그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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