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 *
“그래서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다급해진 에이샤가 묻자 필립은 곧바로 대답했다.
“자유를 포기하거나, 목숨을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죠.”
용병으로 오래 활동한 에이샤는 필립의 말을 금방 알아듣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보고 노예가 되라는 건가요?”
“노예까지는 아니고, 종신 계약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죽는 것보다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고 장담해 드리죠.”
“그걸 말이라고….”
“식대 무료, 주거공간 제공, 봉급은 일 년에 금화 100개. 휴일은 한 달에 4회입니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휴일에도 근무하게 되면 보너스를 지급하며 업무 성과가 좋을 시 추가로 보너스를 지급하겠습니다. 물론 이건 가장 기초적인 복지에 불과하고, 나머지 사항은 천천히 논의해보도록 하죠. 이래도 싫으시면 그냥 없던 일로 하고요.”
에이샤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금화 100개라는 봉급은 그녀에겐 말도 안 되는 박봉이었으나, 어느 정도 생활 수준을 유지할 정도까지는 되었다.
“이래도 싫습니까? 그러면 뭐 어쩔 수 없고요.”
“아니! 싫은 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요…?”
“업무 내용은 별것 없습니다. 평소에는 잡일을 돕다가 필요할 때 지시하는 일만 해내면 됩니다. 아마 잠입이나 정보 수집 따위일 겁니다. 암살 같은 걸 할 일은 없지 않을까 싶은데….”
자신의 목숨값을 조금이라도 올려 보려는 한 다크엘프 처녀의 눈물겨운 노력이 진행되는 가운데, 필립은 성문 쪽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을 느꼈다.
“서! 당장 서라! 서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
“아, 그것참 깐깐하게도 구네. 오빠들! 동족 한 명만 깔끔하게 죽이고 나간다니까? 내가 뭐 사람을 죽인다는 것도 아니고!”
“이유를 불문하고 수도에서 소란을 피우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사람으로 보이는 두 형체가 늘어선 건물과 건물 사이를 넘나들며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필립은 다리를 시원하게 드러낸 다크엘프 소녀와 왕실 기사단의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을 확인했다.
곧 단검 두 자루를 손에 든 다크엘프 소녀의 시선이 필립과 에이샤를 향했다.
“찾았다.”
그녀의 손에서 오러가 가득 실린 단검이 쏘아졌고, 필립은 즉시 검을 뽑아 그것을 튕겨냈다. 제대로 자세를 잡지 못한 탓에 필립의 몸이 두 걸음 정도 밀려났다.
“뭐야. 응? 오빠는 누군데 날 방해해? 왕실 기사단이야?”
가까이에서 본 다크엘프 소녀는 대단히 충격적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배꼽을 다 드러내고 봉긋한 가슴을 겨우 가리는 가죽옷과, 허벅지와 다리를 그대로 노출한 반바지 차림.
‘복장만 봐도 집행자겠군.’
다크엘프의 집행자들은 대부분 제정신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조금 있었다. 인격이 형성되어야 할 소년 소녀 시절 동안 전투 병기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훈련과 시술을 받기 때문이었다.
“아아! 짜증 나!”
암습이 실패하자 다크엘프 소녀는 땅에 착지하자마자 바닥을 발로 찼다.
“왜! 왜 방해해? 날 왜 방해하는데? 일하는 중이잖아! 거기 배신자 언니, 그냥 와서 좀 죽으면 안 돼? 삼십 년을 도망 다녔으면 인생도 즐길 만큼 즐겼잖아. 왜 더 살려고 발악하는데?”
뒤따라온 기사는 이십 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는 다크엘프 소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제야 멈추는군! 빌어먹을, 그 어떤 이유를 가져다 대도 사전에 협의하지 않은 살인 및 폭력 행위는 금지라고 분명히 설명했을 텐데! 그걸 무시하고 감히 시민을 공격하다니!”
다크엘프 소녀가 즉시 반박했다.
“기사 오빠는 눈이 없어? 배신자를 공격했는데 저 오빠가 막아 준 거잖아!”
“시끄럽다! 저 의인께서 나서 주셨으니 망정이지 혹시나 무고한 시민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나! 이건 내란죄로 다스려도 될 일이란 말이다!”
‘어지럽군.’
필립은 두통을 느끼며 이마를 짚으려다가, 그 손으로 막 도망치려는 에이샤의 팔을 붙잡았다.
“윽!”
“어딜 도망가시려고.”
필립은 그녀를 질질 끌고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기사와 다크엘프 소녀의 시선이 모두 그를 향했다.
“…잘생긴 오빠. 그 언니 이리 내. 그러면 얌전히 돌아갈게. 응?”
필립은 다크엘프 소녀의 권유에 응하는 대신 되물었다.
“그건 좀 힘들 것 같고, 혹시 다크엘프 집행자입니까? 어느 숲에서 오셨습니까?”
“어? 내가 집행자인 건 어떻게 알았어? 나는 저 멀리 남쪽 룰레이 숲에서 왔어. 집행자 교육을 받다 도망친 배신자를 잡기 위해서. 바로 저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언니가 바로 그 배신자고. 집행자를 안다면 더 설명할 필요는 없지?”
“수도의 성문 안으로 들어온 이상 그 누구든 왕실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고….”
“아 좀, 그 입 좀 다물어 봐! 진짜 죽일 수도 없고 미치겠네! 난 딱히 인간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니까? 그냥 내 할 일만 하고 숲으로 돌아갈 거라고!”
고지식한 인상의 기사가 끼어들자 다크엘프 소녀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필립은 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끼어들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왜입니까?”
“본래 다른 종족 간의 분쟁이나 종족 내부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 게 관례이기도 하고, 지금 쟁점이 되는 배신자 다크엘프가 저와 종신 고용 계약을 맺은 제 아랫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다른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재판을 요청하고 싶으시면 왕실 기사단을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민사 사건은 왕실 기사단의 소관이 아니었기에 기사는 곧바로 돌아갔다. 그 허무한 결말에 다크 엘프 소녀는 짜증이 더 치밀었다.
“종신 고용 계약? 그게 뭔데? 그래서 내놓을 거야 말 거야?”
“종신 고용 계약이란 내가 그녀의 남은 삶을 모두 샀다는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녀는 내 재산이 아니지만, 그녀와의 계약은 제 재산이 되는 셈이며 이 계약을 강제로 파기하려 할 시 그에 알맞은 보상이 치러져야 할 것입니다.”
필립은 소녀를 위해 천천히 설명했다.
“…계약? 보상? 그게 무슨 소린데?”
그러나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쉽게 설명하자면, 당신이 배신자라고 부르는 이 다크엘프를 사과나무라고 생각해 봅시다. 저는 이 사과나무와 ‘앞으로 네 가지에서 열리는 모든 사과는 내게 팔아야 한다.’라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라는 존재가 나타나 갑자기 ‘저 사과나무에서 내 사촌이 떨어졌으니 나는 저 나무를 베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셈이죠. 이 경우 제가 입을 손해는 얼마나 될까요?”
아직 앳되어 보이는 다크엘프 소녀는 머리를 굴리는 듯 왼손 검지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래서 얼만데! 얼마든 내면 되잖아!”
밖에서 만났다면 무력으로라도 해결했겠지만, 이곳은 인간의 도시 한가운데였다. 이곳에서 난리를 피우면 인간과의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기에 집행자 소녀는 일단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는 궁술의 달인이며, 은신에도 능숙합니다. 그녀의 노동력에서 파생될 부가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하기 힘들 만큼 어마어마하지만, 제가 많이 양보해서 금화 백오십만 개 정도로 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필립의 제안에 소녀는 문자 그대로 펄쩍 뛰었다.
“뭐? 금화 백오십만 개? 저깟 반쪽짜리 한 명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지금 나한테 사기를 치려는 거야?”
“사기라고 생각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그냥 돌아가시면 됩니다. 아니면 일단 좀 진정하고 이야기를 좀 나눠 보죠. 제가 좋은 곳을 압니다.”
* * *
필립은 집행자 소녀를 외곽의 한적한 카페테리아로 데려갔다. 눈이 확 뜨일 만큼 아름다운 여자 셋과 함께 들어온 필립에게로 모든 시선이 쏠렸으나, 필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차게 식힌 꿀차 두 잔과 고급 홍차 두 잔을 주문한 필립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도망갈 기회만 노리고 있는 에이샤와 집행자 소녀를 대면시켰다.
“일단 묻겠습니다. 그녀가 정확히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집행자까지 동원된 겁니까?”
“저 언니는 집행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던 중 지급된 무기와 보급품을 가지고 도망쳤어.”
필립은 소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다크엘프 집행자가 사용하는 무기는 종족의 대장로들이 수명을 깎아서 제작하는 무기였고, 신체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각종 약품은 천금의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왜 그랬죠?”
필립이 자신을 돌아보며 묻자 에이샤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기적인 년! 네 가족은 너 때문에 영원히 외출이 금지되었어. 빛도 잘 들지 않는 숲에서 오백 년 동안 나뭇가지만 쳐다보다가 죽어야 하지. 게다가 너는 자원했잖아? 그냥 포기했어도 되었을 걸 왜 활과 보급품을 들고 도망친 건데?”
‘그러게, 왜 그랬대?’
이런 배경 스토리까지는 알지 못했던 필립 또한 궁금증이 일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에이샤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때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없이 차만 홀짝이고 있던 프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더 고통받기는 싫고, 지금까지 힘들었던 시간은 보상받고 싶었던 게 아니냐? 심리적으로 내몰린 것들은 가끔 그런 판단을 하더구나. 그리고 너, 까만 엘프 계집애야. 목소리를 한 번만 더 높이면 혼이 날 줄 알아라.”
집행자 소녀는 프리비아의 말에 발끈했다.
“뭐야, 넌 누군… 응?”
프리비아의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지며 흉포한 빛을 발했다. 그러자 다크엘프 소녀는 순식간에 프리비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드……드……드….”
“더 말하면 입을 꿰매 버리겠다.”
“네…넹.”
집행자 소녀의 입을 다물게 한 프리비아가 필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배신자 계집애는 네 밑으로 들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으니라. 배신이라는 건 본래 한 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으니. 차라리 저 계집애를 삼십 년 정도 써먹는 게 어떠냐?”
“예? 집행자를 말입니까? 다크엘프들이 허락하지 않을 텐데요?”
“허락 같은 게 필요하진 않을 것 같구나. 저 건방진 계집아이가 내게 범한 무례를 그대로 떠안을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가야. 이름이 무엇이냐?”
“저…저요? 라니라고 하는데요….”
집행자 라니는 자신이 단단히 잘못 걸렸음을 깨달았다.
‘아니 왜 여기 드래곤이…?’
불운에 불운이 수십 번 겹쳐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 왜 하필 자신에게 생긴 건지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감히 그 눈을 부릅뜨고 내게 대든 죄를 어찌 갚겠느냐?”
“아… 그게… 으으… 흑… 훌쩍….”
답이라곤 나오지 않는 상황 앞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울음뿐이었다. 다크엘프 집행자는 상황에 따라선 오러마스터와 맞먹는 무력을 지닌 강자였으나, 그렇다 하더라도 드래곤 앞에선 나약한 소녀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