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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03화 (103/119)

103화

* * *

―오… 이건, 놀랍군요. 아니, 놀라운 수준이 아니라…… 마치….

케페르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한 반응이었다.

―미래를 아는 듯한……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요. 따로 덧붙일 말은 없어요. 당신의 업적 수치는 백사십구만 구천육백팔십입니다. 인간으로서 이런 업적을 쌓은 것에 존경심마저 들 정도로군요.

‘아니 백만? 언제 이렇게 쌓였지?’

지금까지의 행보를 봤을 때 기껏해야 십오만 정도일 것이라 여긴 것과는 반대로 백만이 넘는 수치가 쌓였다는 사실에 필립 또한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달성하기 어렵고 희귀한 업적일수록 업적 수치를 더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필립은 자신의 업적 수치를 확인하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당신이라면 ‘코피아’의 고객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마침 세상을 구경하는 일도 질리던 참이었는데 잘 되었군요. 자격 없는 이들을 추방하겠습니다.

케페르가 선언하자 곧바로 오슬레이 유세프와 에이샤, 그리고 리즈리엘의 모습이 제단 근처에서 사라졌다.

“…왜 나는…?”

프리비아가 불만에 찬 표정을 지었다.

케페르는 그녀를 무시하고 필립에게 다가왔다.

―원한다면 곧바로 ‘코피아’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코피아’가 과연 당신에게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 아셔야겠죠.

“업적 수치를 이용해 뭔가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필립의 대답에 케페르는 썩 만족한 듯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코피아’는 신화 시대로부터 전해진 모든 지식과 비밀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장소. 다만 인간의 사회에서 그렇듯 금화나 보물로 교환할 수 없을 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련의 과정들은 말하자면 과연 이곳에서 뭔가를 구매할 능력이 있는가를 검증하는 행위였다고 봐도 되었다.

‘자기 물건을 살 돈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손님 지갑을 뒤지다니.’

웃기지도 않은 일이었으나 뭐라고 불만을 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필립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뭘 파는지 좀 보고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상품이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드리겠습니다.

케페르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주 세련된 감각의 인테리어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마치 현대인이 바로크풍으로 설계한 백화점을 보는 듯한 이질감에 필립은 입맛을 다셨다.

유리로 된 진열장에 온갖 희귀해 보이는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촉매나 희귀한 광석 같은 소모품이었으나, 그 와중 필립의 눈길을 잡아끄는 상품들이 있었다.

‘…코스튬들이군. 업적 상점에선 보통 이런 것들을 구매하곤 하니까.’

원작 게임에서 필립은 업적 상점을 이용할 때 보통 장비나 재료 같은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물건보다 오직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치장용 아이템을 주로 구매하는 편이었다.

‘이런 소모품들만 해도 이곳의 사람들에겐 말도 안 되는 기적이겠지만.’

수년에 걸친 모험과 목숨을 내건 역경을 뚫어야만 얻을 수 있는 소재들이 이곳에 가득했다. 그러나 필립에겐 그리 메리트가 없는 것들이었다.

필립은 문득 옆에 프리비아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케페르의 짓인 듯했다.

‘뭐 죽이기야 했으려고.’

적당히 내부를 둘러보자 곧 ‘특별관’이라는 간판이 걸린 별실이 보였다. 그곳에 들어서자 필립은 눈이 번쩍 뜨였다.

마네킹을 대신한 여인의 동상에 걸쳐진 한 벌의 옷 때문이었다.

“…사막 무희의 드레스?”

한 세트를 맞춰 입으면 불 원소와의 친화력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아이템이었다.

문제는 천의 면적이 매우 좁아 저걸 착용하는 순간 거의 속옷 차림이나 다름없는 꼴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필립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입을 것도 아니었으니까. 불의 상급 정령과 계약하고서도 아직 제대로 친해지지조차 못한 누이를 위한 물건이었다.

가격은 업적 수치 4만. 나름대로 합리적인 가격이었고, 보유한 업적 수치도 꽤 높았기에 필립은 망설임 없이 구매를 결심했다.

‘뭐 누구한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벗겨내기엔 거부감이 들었기에 필립은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 있는지 찾았다. 그때 공간이 열리고 케페르와 프리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프리비아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울상을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상품은 마음에 드십니까?

“예. 몇 가지 마음에 드는 게 있더군요. 그보다 이걸 사고 싶은데 결제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집니까?”

―물건을 가져가시면 저절로 대가가 치러집니다. 포장을 원하신다면 근처에 서 있는 동상에게 지시하시면 되고 말입니다. 명심하세요. 이곳은 ‘코피아’의 넓은 공간 중 고작 한 층에 불과합니다. 상품을 구매하실수록 고객님의 등급이 상승하게 되며, 상층에는 이것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상품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뭐 그렇겠지. 아무래도 이 업적 수치라는 건 격이 높은 존재들에게 통용되는 화폐 같은 건가 본데.’

필립은 옷 몇 벌을 골라 고급스러운 상자에 포장하며 질문했다.

“혹시 정보 같은 것도 파는 겁니까?”

―아, 물론이죠. 원하시는 정보를 말씀하시면 현재 판매 가능한 품목인지 파악한 뒤 가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구매를 결정하시면 됩니다.

“아까 그 다크 엘프의 운명에 관해서입니다. 그녀가 왜 곧 죽을 목숨인지, 막을 방법이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런 거라면 별 값어치도 없는 정보이니 딱히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습…… 아니,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군요. 죄송합니다만 천오백 정도는 받아야 할 것 같군요. 고객님께 정보를 팔아야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 그 아가씨의 정보에 가치가 발생했습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천오백 지불하겠습니다.”

―…오.

합 5만에 달하는 업적 포인트를 단숨에 소비한 필립은 순식간에 케페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이샤, 그녀는 현재 다크 엘프 집행자의 목표가 되었으며, 집행자는 현재 그녀의 목전까지 다다랐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그 집행자를 처치하거나, 혹은 설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말 별것도 아니었네.’

“쉽군요. 감사합니다. 이제 여기서 나가고 싶은데, 이곳으로 다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원하시는 장소에 이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진을 설치해 드리죠. 부디 자주 이용해 주시길.

* * *

“인장의 주인이여, 드디어 나오셨군요.”

‘코피아’에서 나온 필립과 프리비아는 오슬레이 유세프와 마주했다. 그는 아예 필립을 상전으로 여기기로 마음먹기라도 한 듯 매우 정중한 태도로 필립을 맞이했다.

“혹시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필립은 손에 든 상자들을 들어 보였다.

“옷 샀습니다.”

“…예?”

“대단한 건 없었고, 무슨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다행히 마음에 드는 게 몇 가지 있더군요.”

필립의 설명에 오슬레이 유세프는 매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가문이 수백 년을 지켜 온 비밀이 고작…….”

미스릴이나 오리할콘 광석, 그리고 만드라고라 같은 매우 희귀한 소재들 또한 있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필립은 그가 받아들이기 쉽도록 상자를 하나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폭신한 재질의 잠옷이었는데, 모자에 동그란 귀가 달려 있어서 어린아이가 입으면 대단히 귀여울 것처럼 보이는 물건이었다.

“이 잠옷 한 벌에 업적 수치가 팔천이 들었습니다.”

“아… 예.”

케페르의 설명대로라면 오슬레이 유세프가 평생 모은 수치와 저 잠옷 한 벌이 맞먹는 셈이었다. 순간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느낀 늙은 상인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장의 주인께서 원하신다면, 이 사람의 막내딸을 다음 회주로 추대하겠습니다. 그 아이는 지금 이 순간부터 유세프 상회의 적법한 후계자입니다. 그리고 상회에 원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곧바로 요청해 주십시오.”

“금고의 내용물이 상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데도 말입니까? 귀 상회에 이득을 가져다주지도 않을 텐데요?”

“이 사람이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인장의 주인이여, 당신께선 오래 지나지 않아 대단한 거물이 되실 겁니다. 그 거인의 발걸음이 상회의 지붕 위를 지날 때 조금이라도 조심스러워진다면 이런 투자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필립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뒤만 졸졸 따라오는 프리비아를 데리고 유세프 상회를 나섰다.

입구에는 용병, ‘칠흑의 에이샤’와 리즈리엘이 필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됐어요?”

필립은 오슬레이 유세프에게 했던 설명에 몇 마디 보태어 안에서 있었던 일을 리즈리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세상에 별일도 다 있네요.”

“그냥 오기 뭐해서 들어간 김에 네게 줄 선물도 사 왔어. 마음에 드나 한번 볼래?”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고급스러운 상자를 내밀었다. 리즈리엘은 조심스럽게 상자의 포장을 풀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것은 아주 부드러운 실크 재질의 원피스 형태 속옷이었다. 얇고 섬세하게 만들어져 가려야 할 곳을 모두 가리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것을 본 리즈리엘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무, 무슨 이런 걸 다… 어머….”

물론 필립의 기준에서는 그리 선정적인 물건은 아니었기에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속옷의 효능에 대해 늘어놓았다.

“그걸 입고 있으면 씻지 않아도 청결이 유지되고 몸이 가벼워진다고 하던데. 나중에 정말인지 알려줘.”

눈치가 빠른 리즈리엘은 필립에게 정말로 별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아깝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그럴게요. 네. 아무렴요. 선물 고마워요.”

다음으로 필립은 다크 엘프 용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뭔가 할 말이 많다는 듯한 표정으로 필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낯빛이 본래보다 조금 덜 어두워진 것이 아무래도 많이 긴장한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봤습니다. 그리고 답을 들었죠.”

필립이 먼저 서론을 꺼내자 에이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게 정말인가?”

필립은 조용히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왜 그러는 거지?”

“한 번 참았다는 뜻입니다. 당신 목숨은 제게 달린 것이나 다름없는데, 당신은 예의를 전혀 갖추지 않는군요. 두 번만 더 절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이 오면 당신을 도울 생각이 사라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앞의 여인은 어린아이도 아니었다. 수백 년이나 살아온 다크 엘프에게 필요 이상의 배려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필립의 말에 칠흑의 에이샤는 어색한 웃음을 짓더니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자존심 같은 것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용병으로 살아오며 업보를 너무나도 많이 쌓았고, 마침 어떤 신적인 존재로 보이는 누군가가 그녀의 죽음을 예언한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용병이라는 직업과 미신을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걸 믿지 않기에는 뒷맛이 너무 찜찜했다.

그녀는 이것이 일종의 갈림길이라고 느꼈다.

잘못된 길로 접어들면 무조건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갈림길로.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당황해서 그랬어요. 네?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할 테니….”

한껏 자세를 낮춘 그녀에게선 이전까지 보였던 실력자다운 기세와 뻣뻣한 태도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필립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말씀드리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당신은 현재 다크 엘프 집행자의 목표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근처까지 도달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힉!”

종족의 집행자가 자신을 노린다는 말에 에이샤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꽤 대단한 강자였으나, 집행자라 불리는 다크 엘프 전투원들은 같은 종족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이들이었다.

수명이 긴 다른 다크 엘프들은 엘프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숲과 가족을 돌보는 데 소모한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그 기나긴 생애를 전투 기술의 발전에 쏟아붓는 이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이 바로 집행자라 불리는 다크 엘프였다.

습하고 어두운 숲에 사는 다크 엘프들은 종종 사령술에 빠져들거나 종족을 배신하고 마족과 거래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이들을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 종족의 검이 되길 자처하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왜죠? 나는 잘못한 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을 그녀는 끝내 뱉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하나쯤은 잘못한 게 있을 것 같았다.

용병의 삶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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