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02화 (102/119)
  • 102화

    * * *

    오슬레이 유세프는 일행을 자신의 집무실까지 안내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건가. 현명한데.’

    필립은 비밀 금고의 존재까지는 알았으나 자세한 정보와 위치까지는 몰랐다. 그곳에 갈 수 있을 만큼 이야기가 진행되었을 때는 비밀 금고 같은 것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차고 넘쳤기에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회주의 집무실은 검소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대륙 최대 상회의 회주에게 딱 들어맞는 수준으로 꾸며져 있었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고급 양탄자나 갑옷, 방패 따위는 전시되어 있지 않았고 아마도 드워프의 손에서 탄생했을 조각품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비밀 금고에 대한 전승은 오직 유세프 상회의 회주에게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기에 그 내용물은 누구도 알지 못하나, 이 사람의 대에 이르러서야 그 비밀이 드러나게 되겠습니다.”

    오슬레이 유세프 또한 흥분했는지 말이 길어졌다. 그는 자신의 책상 밑에 깔린 검소한 무늬의 카펫을 들추고, 목재의 어느 한 부분을 다섯 번 두드렸다.

    그러자 창문이 달린 바깥쪽 벽면이 신기루처럼 일렁거리더니 본래의 풍경 대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한 구조물을 투영했다.

    “비밀 공간이구나. 제법 머리를 썼는데.”

    프리비아가 중얼거렸다. 저런 식으로 입장하는 것이라면 지금껏 그 비밀이 드러나지 않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 구조물은 사람 두 명이 함께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문이었다. 마치 왕족의 저택 입구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으며, 금과 보석, 그리고 대단히 아름다운 장식품들로 치장되어 기가 질릴 정도였다.

    “이제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필립은 손가락에 낀 황금 인장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오슬레이 유세프는 곧바로 대답했다.

    “곧 이 문을 지키는 수호자가 말을 걸 겁니다.”

    그의 말대로 곧 문으로부터 금색 기체가 새어 나오더니 마치 유령과 같은 형체를 이루었다.

    ‘기세가 심상찮은데.’

    필립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형체로부터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그도 정체를 알 수는 없었으나, 대단히 격 높은 어떤 존재라는 건 유추할 수 있었다.

    “….”

    프리비아의 표정이 굳은 것만 봐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드래곤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존재임이 분명했다.

    ―그건… 황금 인장이로군요. 그런데 제 생각보다… 사람이 많습니다? 드디어 유세프 가문의 핏줄에서 욕심이라는 놈이 사라진 건지, 아니면 유세프 가문이 사라진 건지 모르겠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소개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지극히 정중하면서도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필립은 반드시 대답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전에 네 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겠지.”

    프리비아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그건 그렇군요. 설명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아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저는 이곳 ‘코피아’의 관리인인 케페르라고 합니다. 문명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곳의 고객이 될 사람을 기다리고 있죠.

    “고객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곳은 유세프 가문의 비밀 금고가 아니라는…?”

    당황한 오슬레이 유세프가 묻자 금빛 형체는 마치 비웃음과도 같은 소리를 몇 번 내었다.

    ―그런 식으로 전승했습니까? 유세프 가문답군요. 그런 식으로 알고 있어야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이곳의 비밀을 지킬 테니. 안타깝게도 이곳은 금고 같은 게 아닙니다. 고작 금은과 보물 따위로는 비교할 수 없는 혜택을 얻을 수 있는 곳이죠.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프리비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자격도 되지 않는 분들에게 알려 드릴 것은 없습니다. 자, 안으로 들어오셔서 여러분이 과연 고객인지, 아니면 그저 과객인지 알아보도록 하죠.

    곧 찬란한 문이 열렸고, 기나긴 통로가 드러났다.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나조차도 모르겠구나. 안전하다고 할 수 없으니 일단 물러나는 게 어떠냐? 물론 이대로 들어가도 된다. 나 또한 궁금증이 일었으니.

    필립은 머릿속에 들리는 프리비아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의 직감은 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 황금색 형체에게서는 딱히 위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케페르라는 존재는 고대신의 권속 중 하나겠지.’

    그의 추측이 들어맞는다면,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나 다름없었다. 고대신들은 드래곤이라는 종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땅과 하늘, 그리고 물에 사는 생명체들을 수호하며 돌보던 존재들.

    딱히 인간에게 적대적일 이유가 없는 이들이었다.

    오히려 그런 존재의 초대를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

    필립은 그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회주님이나 다른 분들은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전 이야기를 좀 나눠 보고 싶군요.”

    “아니,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오슬레이 유세프는 입술을 깨물며 물러날 수 없음을 밝혔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틀어박힌 욕망의 매듭이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난 집에 가고 싶은데….’

    리즈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갈등했으나, 이내 필립의 뒤를 따르겠다고 결정했다.

    * * *

    ―저 수정 구슬이 보이십니까? 먼저 자격을 심사받길 원하는 분부터 순서대로 손을 올리면 됩니다.

    복도를 따라 걷자 나타난 건 무너진 대리석 건축물이었다. 먼 과거에는 작은 신전이었을 건축물은 벽이 사라지고 기둥이 끊어져 가운데 자리한 제단밖에 남지 않았다.

    그 제단 위에는 사람 머리 크기의 수정 구슬이 있었는데, 신비한 빛을 머금어 천고의 보물처럼 보였다.

    ‘아니 저건?’

    필립은 단숨에 그 수정 구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게임을 하면서 꽤 자주 본 물건이었다.

    오슬레이 유세프는 필립의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것이 무엇인지 모르니, 이 사람이 먼저 나서 볼까 합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잖습니까?”

    리즈리엘이 불안한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았으나, 필립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오슬레이 유세프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아주 살짝 꿈틀하더니 제단 위에 올라서 수정 구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던 수정 구슬의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더니, 회색으로 된 안개 같은 것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구슬은 시험받고자 하는 이의 성향과 태어나서 지금까지 쌓은 ‘업’을 보여줍니다. ‘코피아’의 고객이 되기 위해서는 그에 알맞은 격이 필요하죠. 아무나 손님으로 받을 수는 없잖습니까?

    자신을 ‘케페르’라고 밝힌 금빛 형체가 수정 구슬을 면밀히 살폈다.

    ―인간치고는 제법 업을 많이 쌓았군요. 비록 선업보다는 악업이 더 많지만 말입니다. 유세프 가문의 노인, 당신은 운이 좋군요. 저 아가씨가 당신의 막내딸인가요?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최후를 맞았을 겁니다.

    난데없는 악담에 오슬레이 유세프가 흠칫했다. 딱히 목적이랄 게 없이 그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말이었기에 속뜻을 파악할 필요도 없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냥 그럴 운명이었다는 겁니다. 으음, 제법 업을 쌓긴 했으나 코피아의 고객이 되기에는 조금 많이 모자라는군요.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업적 수치’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제 주인님께서 그러라고 하셨거든요. 오슬레이 유세프, 당신의 업적 수치는 사천 육백 사십 구입니다.

    그 수치가 높은 것인지 낮은 것인지 아는 사람은 이곳에서 필립뿐이었다. 드래곤인 프리비아는 ‘업’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그것을 수치화한다는 건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아직 감을 잡을 수 없었다.

    ‘4649? 귀엽네.’

    필립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다른 사람들을 충동질했다.

    “여러분들도 한 번씩 재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리즈, 너부터 가보는 게 어때?”

    “…저요? 왜요?”

    “별일 없을 테니 그냥 해 봐.”

    리즈리엘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차마 필립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녀가 수정 구슬에 손을 올리자 구슬은 옅은 분홍빛을 띤 포근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음씨 착하고 예쁜 아가씨로군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도 알고, 좋은 일도 많이 했어요. 게다가 얼마 전에는 아주 중요한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을 잘 도운 덕에 업적 수치를 제법 많이 쌓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리즈리엘 유세프. 당신의 업적 점수는 육천 이백 팔십입니다.

    “어…? 아, 네.”

    리즈리엘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제단을 내려왔다.

    다음으로 프리비아가 움직일 기색을 보이자 케페르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가씨는 양심이 있거든 가만히 있는 게 어떻습니까? ‘코피아’는 아가씨 같은… 음, 사람에겐 허락되지 않은 곳입니다.

    대놓고 드래곤을 차별하는 모습이었다. 필립은 프리비아가 드래곤이라는 걸 밝히지 않은 케페르의 배려심에 조금 감탄했다.

    “…나는 왜….”

    시무룩한 표정을 짓던 프리비아의 머릿속에 케페르의 엄한 음성이 울렸다.

    ―요 말썽꾸러기 도마뱀 아가씨야. 너는 내게 버르장머리 없이 행동한 벌을 받아야 하니 끝나고 남아야 한다. 알겠느냐?

    그 목소리를 들은 프리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드래곤의 머릿속에 저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의사를 때려 박을 능력이 있다는 건 오직 한 가지를 의미했다.

    절대 함부로 까불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 엘프 아가씨는 어떻습니까? 혹시라도 좋은 조언을 들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필립은 용병 에이샤에게도 권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가 제단에 올라서서 구슬에 손을 올리자 구슬이 섬뜩한 핏빛을 띠었다.

    케페르는 피식, 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마찬가지로 총평했다.

    ―당신은 사람을 많이도 죽였군요. 어차피 곧 죽을 운명이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마치 사형 선고와도 같은 말에 다크 엘프 용병 에이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 호의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분?

    죽는다는 말에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다크 엘프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가 표정을 굳히며 등에 멘 활을 꺼내려 하자 필립이 그녀를 만류했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요? 장담하는데 시위에 손가락을 걸기도 전에 당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겁니다.”

    ―그 말 듣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 문제는 일단 이곳을 나와서 의논하자고요. 무슨 일이 생기든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도와드리도록 하죠.”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제단 위에 올라섰다.

    ‘보자, 지금껏 몇이나 쌓였을까? 뭘 제법 많이 한 것 같기는 하니까 한 50만 정도는 쌓였겠지?’

    ‘업적 수치’는 원작 게임 내에서 여러 특전을 구매할 수 있는 화폐나 다름없었다. 저 수정 구슬은 업적 수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장치였기에 필립은 여유로울 수 있었다.

    아마 지금 시점에서 이 ‘코피아’라는 장소의 정체는 알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고대신이 관련된 장소라면 업적 컷이 최소한 이백만이겠지. 나중에 다시 오면 그만이야.’

    필립은 생각 없이 수정 구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구슬이 공중으로 휙 떠오르더니 찬란한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아 씨,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필립이 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저 구슬에 턱을 얻어맞을 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