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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01화 (101/119)

101화

* * *

며칠의 시간이 지났고, 필립은 유세프 상회의 본부가 자리한 수도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상회 측에서 보낸 최고급 마차와 전속 하녀 덕에 여행길은 제법 편안했다.

“역시 여행은 사치와 향락이 함께하는 편이 즐겁지.”

프리비아는 최고급 포도주를 홀짝이며 필립에게 말했다. 그녀는 필립의 맞은편에 앉아 다리를 쭉 펴서 필립의 무릎에 얹은 채였다.

“다른 이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노력하는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갑자기 왜 이렇게 철학적인 드래곤이 되셨습니까? 전 그런 거 모릅니다. 별로 특별한 걸 누리고 싶은 생각도 없고, 여유롭게 먹고살 정도만 되면 충분합니다.”

본래 이런 종류의 대화야말로 시간을 보내는 데 가장 적합했다. 그렇기에 필립은 프리비아의 잡담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네놈은 본인이 가진 능력에 비해 야망이 모자란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느냐? 나는 지금껏 살며 너처럼 잘난 놈을 본 일이 없다. 네놈이 어린 핏덩이들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들이는 노력을 개인의 발전에 쏟는다면 모든 인간을 발아래 둘 수 있을 것 아니냐?”

“제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왕이나 제후 같은 건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보고 하라면 그만이죠. 전 지금으로도 만족합니다. 책임 없이 권리만 있는 위치가 좋아서요.”

“흐음… 그래. 그렇다 이거군.”

프리비아는 필립의 대답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심리 테스트 같은 것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필립은 쓴웃음을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던 중 구석진 곳에 앉은 하녀와 눈을 마주쳤는데, 십 대 후반쯤 된 하녀는 필립과 프리비아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웃음을 참고 있다가 필립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색이 되었다.

‘…남이 들으면 같잖은 대화이기는 했지.’

필립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억지로 못 본 척했다.

아카데미에서 수도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카데미가 위치한 분지는 애초에 왕실의 소유였고, 유사시에 왕실이 거느린 병력을 파견하기 위해서라도 가까이 붙어 있어야만 했다.

거리는 마을 두 개 정도로, 마차로 반나절 정도.

벌써 두 시간을 달렸으니 앞으로 네 시간 정도면 도착이었다. 필립과 프리비아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십 분 정도 지나자 마차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귀하들은 누구십니까?…예? 그게 무슨? …아…알겠습니다.”

마부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고, 마차가 멈췄다. 장소는 관도 한가운데였고, 필립은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끼며 마차에서 내렸다.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가씨. 이분들께서 관도를 막고 있는 바람에….”

멋을 낸 판금 갑옷을 입고, 전투마를 탄 무리가 관도를 가로막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방랑 기사 무리가 분명했다.

수는 네 명이었고 한 명은 마상용 창으로 무장하기까지 했다. 마창은 본래도 그랬지만, 이 세상에선 더 무서운 무기였다.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기사라면 단숨에 마차 정도는 박살낼 위력을 낼 것이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필립이 그들을 바라보며 묻자 기사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아아, 경계할 필요 없소. 단지 지나가던 길이오만 안에 어느 귀하신 분께서 타셨는지 궁금해서 말이오.”

그 성의 없는 소개에 필립은 저절로 비웃음이 지어지는 걸 느꼈다.

“그러다 만만하다 싶으면 강도질도 좀 하고 말입니까? 누굴 바보로 아는 것도 아는 겁니까?”

의도가 들키자 기사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필립의 태도가 이상하게 당당했기 때문이었다. 마창을 든 기사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고, 다른 이들은 검에 손을 올려 두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마부는 몸을 떨었고, 전투마들은 흥분해서 콧김을 내뿜기 시작했다.

“뭘 하는 게냐? 그냥 다 죽여버리지 않고?”

그때 프리비아가 마차 문을 열고 나왔다. 긴박감 넘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의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경호원 나으리께서 왜 그리 예민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군. 저런 아가씨를 마차 안에 태우고 있으면 나라도 그랬겠지.”

기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필립은 한숨을 푹 내쉬며 검을 뽑았다. 저런 강도 기사들은 평소에는 일반적인 기사인 척 관도를 누비다가 인적이 드물어지면 강도로 변하는 이들로, 원작에서 제법 흔히 나타나곤 했다.

시골 영지에서 올라오는 귀족들이나, 멀리 원정을 나와 연고가 없는 상인들이 주 표적이었다.

맨 앞의 기사가 수신호로 공격 명령을 내리자 강도 기사들이 일제히 필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필립의 검에 오러로 이루어진 푸른 검기가 솟았다.

가장 서열이 높아 보이는 기사는 필립이 검기를 사용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움직였다. 필립은 검기가 상대의 오러를 제압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가 든 검이 마법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법검 좋지.’

어느 귀족을 죽이고 얻은 물건인 듯했다.

필립은 그 마법검에서부터 강한 힘이 발출되는 것을 느꼈다. 어지간한 기사는 나가떨어질 만큼 강한 척력이었고, 기사는 필립의 자세가 무너지자 희열에 찬 미소를 지으며 그 빈틈을 노렸다.

단숨에 필립의 상체를 가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베기였다.

필립은 가볍게 그 베기를 받아넘기고 마상용 창을 든 기사를 향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창을 든 기사는 재빨리 반응했으나 필립의 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크아악!”

기사의 판금 갑옷이 크게 갈라지며 피가 튀었다. 그의 동료들은 필립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 못했기에 당황하며 일제히 필립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때 멀리서 화살 한 발이 날아들어 한 기사의 갑옷을 꿰뚫었다.

‘판금 갑옷을 꿰뚫는다고?’

보통 화살로는 해내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기사가 고작 화살 한 발에 전투력을 잃을 리 없었으나, 박힌 위치가 매우 좋지 않았다.

화살촉이 심장을 꿰뚫은 듯 기사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곧 말에서 떨어져 숨이 끊어졌다.

곧 근처 나무 위에서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몸을 드러냈다.

“다음으로 뒈지고 싶은 놈은 나와라.”

낮고 거친 여인의 목소리였다. 필립은 후드 밖으로 삐져나온 귀와 까만 피부를 발견하곤 그 여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다크 엘프로군. 그렇다는 건 에이샤인가? 오슬레이 유세프가 제법 신경을 쓴 모양인데.’

순식간에 네 명 중 두 명이 쓰러지자 남은 두 강도 기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의 박차를 걷어찼다.

“이런 씨발! 잘못 건드렸잖아?”

“흩어져! 이 병신아! 왜 같은 방향으로… 억!”

도주하는 기사의 등에 묵직한 화살이 박혔다. 필립은 그 화살에 강력한 오러가 실려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헛웃음을 뱉었다.

‘멀리서 저런 게 날아온다면 나라도 당하겠는데.’

충분히 대비하고 있지 않다면 누구라도 당할 만한 기술이었다. 여인은 마지막 남은 기사가 도망치도록 내버려 두고는 땅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가 나무 위에서 땅으로 내려서자, 필립은 앞으로 몇 걸음 나섰다.

“네가 필립 오스왈드인가? 내 고용주가 널 호위하라더군.”

“고용주라고 하시면?”

“오슬레이 유세프. 그가 날 보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돈만 받고 입을 닦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다크 엘프는 숲에 사는 엘프와 그 출발점이 다르다고까지 여겨지는 종족으로, 보통 엘프가 천 년을 살았으나 그들은 오백 년에서 칠백 년 정도의 수명을 지녔다.

하얗고 윤기 나는 피부 대신 칙칙한 회색 피부를 가졌으나 생김새만큼은 엘프들과 비교해도 그리 밀리지 않았다.

“저 까무잡잡한 계집애는 또….”

한창 싸움을 구경하던 프리비아가 뭐라고 말하려 하자 필립이 급히 그녀에게 눈치를 주었다. 사전에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프리비아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입이 상당히 거친 아가씨로군. 일하는 중만 아니었으면 그 몸에 버르장머리를 새겨줄 생각이었는데.”

다크 엘프 여인은 프리비아를 살짝 노려보다가, 그녀가 딱히 겁먹지 않은 듯 보이자 입술을 핥으며 필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 겁 없는 엘프가 뭐라는 거예요?

사람 피가 닿자 잠에서 깨어난 에고 소드 네리아가 중얼거렸다.

―저 까만 계집애는 나중에 내 장난감으로 삼을 것이다. 불만 있느냐?

뒤이어 프리비아의 텔레파시가 머릿속에 울리자 필립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저 여인은 그리 중요한 인물도 아니었고, 돈 때문에 사람을 수십 명은 죽인 살인자였다.

* * *

‘칠흑의 에이샤’.

그녀는 현시점에서 가장 강한 궁수 중 한 명이었다. 필립은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오슬레이 유세프가 비밀 금고를 상상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성채 하나가 필요하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비싼 용병이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오러마스터라도 대비하지 않으면 큰 타격을 입을 만하지. 다크 엘프는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고, 아까 보니 화살을 쏘는 동작도 극단적으로 짧았어. 프리비아 님과 함께 오지 않았으면 곤란할 뻔했네.’

그 강력한 용병의 호위를 받으며 필립과 프리비아는 유세프 상회의 본점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에이샤의 안내에 따라 수상하게 생긴 뒷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창 몸치장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살롱의 아가씨들이 보였다.

화장품 냄새와 향수 냄새 탓에 필립은 어지럼증까지 느꼈다.

“어머, 멋진 도련님!”

“나중에 한번 놀러오세요!”

속옷 차림의 아가씨들이 키스를 날리며 추파를 던졌음에도 필립은 그녀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걸 확인한 프리비아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살롱의 복도를 지나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에 접어들자, 로브를 입은 초로의 사내와 익숙한 여인이 보였다. 사내는 횃불을 든 채 필립과 프리비아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조금 늦으셨습니다. 이쪽입니다. 인장의 주인이여. 옆에 계신 분은?”

그는 유세프 상회의 회주인 오슬레이 유세프였다. 옆에 선 여인은 리즈리엘 유세프였고, 그녀는 뭔가 불안한 듯한 표정으로 필립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쪽은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마법사입니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니 비밀을 공유할 만합니다. 정 싫으시다면 다시 돌아가도 되고요.”

필립이 프리비아를 소개하자 오슬레이 유세프는 잠깐 불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사람 또한 용병과 함께할 생각이니 한 사람쯤 더 들어간들 어떻겠습니까?”

그 대답으로 필립은 한 가지를 확신했다.

‘함정을 팠군.’

신중하기로는 대륙에서 제일 가는 사람이라 봐도 좋을 오슬레이 유세프가 마법사 같은 변수를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건 그저 대범함을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가 따라오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없다면 이럴 리가 없다는 말이었다.

“따라오십시오.”

오슬레이 유세프가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일행은 암호와 기계장치가 없으면 발견조차 할 수 없는 비밀 계단과 통로를 몇 개나 지나고 나서 넓은 지하실에 도달했다.

“이 너머에 비밀 금고가 있습니다.”

필립은 태연히 말하는 오슬레이 유세프의 표정을 살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당당해서 정말로 이 너머에 비밀 금고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필립은 이미 비밀 금고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필립은 이 지하실이 어떤 공간인지조차도 알고 있었다.

‘여기 몇 번을 왔는데.’

“아. 그렇습니까? 저는 또 회주께서 여기 함정을 판 줄 알았죠. 마법사가 동행했음에도 별말 없으신 걸 보니 아마 마법 시전을 방해하는 진 같은 게 설치되어 있겠군요. 그리고 다크엘프를 고용한 걸 봐선 이제 곧 횃불을 끄시겠죠?”

필립이 여유를 잃지 않은 걸 본 오슬레이 유세프가 피식 웃었다.

“알고도 들어왔나?”

“알고도 들어왔죠. 당신 같은 사람이 상회의 보물을 쉽게 저와 나누려 하겠습니까? 예쁜 막내 따님께서도 상인을 너무 믿지 말라고 하더군요.”

“…허세를 부리는군. 여기까지 와서야 겨우 알아챈 것이 분명한데.”

“그런 것 같으면 어디 그 횃불을 한 번 꺼 보십쇼.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내기하시겠습니까? 저 다크 엘프 활쟁이를 믿고 계신다면 말입니다.”

오슬레이 유세프는 필립을 노려보았다. 저 젊은 청년이 허세를 부리는 것인지 아닌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필립 오스왈드의 무력 수준은 최대로 잡아도 오러마스터 미만이었다. 그리고 이 지하실에는 오러마스터 수준의 적을 제압할 함정들이 즐비했다.

‘저 나이에 저런 배포가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상인을 했다면 대성할 놈인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지하실에 박힌 발광석이 환한 빛을 내뿜었고, 곧 주변이 밝아졌다.

“…인장의 주인께선 이 사람과 한배를 탈 만합니다. 이제 진짜 비밀 금고로 안내하겠습니다.”

오슬레이 유세프는 막간을 이용한 시험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눈앞의 저 청년에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한편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횃불이 꺼지는 그 순간 움직이려던 다크 엘프 여인은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그녀는 필립의 뒤에 있었음에도, 마치 거대한 눈동자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싸움이 일어났다면 큰 손해를 봤겠는데.’

칠흑의 에이샤는 수십 년 만에 안도감이라는 감정을 되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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