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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100화 (100/119)

100화

* * *

교직원 모임이 끝난 뒤 펠리시아와 디아나는 필립의 별장에서 묵었다. 다행히 검사들이라 체력은 좋았기에 아침 일찍 일어날 수는 있었으나, 몸에서 풍기는 술 냄새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으으,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어. 대체 왜 물을 준비해 두지 않은 걸까?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갔는지도 모르겠네.”

“우리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 펠리시아. 마법 학부 교관들은 오죽하겠니.”

하는 수 없이 그녀들은 목욕탕에 설치된 사우나를 이용했다. 땀이라도 내지 않으면 수업 내내 술 냄새를 풍기고 말 것이었다.

가운 차림으로 사우나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절로 땀이 뻘뻘 흘렀다. 디아나는 곧 가운을 벗어 던졌다.

“다 벗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언니?”

“어차피 우리뿐인데 뭐가 어떻다고 그래?”

펠리시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디아나는 그녀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고, 마치 소녀 같은 그녀와 달리 성숙한 여인의 곡선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검술로 단련된 근육은 또 어떤가.

보는 것만으로도 자존감을 갉아먹는 몸매였기에 펠리시아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템스 교관은 어때? 잘 적응하고 있어?”

펠리시아의 질문에 디아나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목숨을 건 전장에서 활동하던 사람이다 보니, 머리가 좀 굳은 것 같긴 해. 하지만 점점 나아지겠지. 네 동생, 필립 교관이 이상하게 능숙했던 거지 다른 신입 교관들에 비교하면 오히려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뭐. 언니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어쩌면 시간이 꽤 필요할 수도 있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착실한 사람이니 곧잘 해낼 것 같아. 그 쓸데없이 높은 자존심만 어떻게 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술기운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펠리시아는 땀으로 젖은 가운을 벗어 손에 들고 사우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그…누구세요?”

그곳에는 은발 머리의 소녀가 서 있었다. 나이는 열여섯에서 열일곱 전후로 보였고, 같은 여자마저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대단히 예뻤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엘프라 하더라도 저렇게 신성하리만치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펠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소녀였는데 어쩐지 익숙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은발 소녀, 프리비아는 벌거벗은 펠리시아와 디아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느 건방진 계집아이들이 이곳에서 밤을 지새웠나 했더니 너였구나. 이 몸으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니 몰라본 것 정도는 너그러이 용서하마.”

“…힉.”

저 말투와 목소리는 펠리시아가 잊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때 마주했던 드래곤이 분명했다.

“당신은 누구십… 응?”

펠리시아는 앞으로 나서려는 디아나를 뜯어말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이구나. 이리 와 봐라.”

펠리시아가 쭈뼛쭈뼛 다가가자 프리비아는 그녀의 어깨와 젖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어린 처녀의 냄새는 언제나 식욕을 돋우지. 그놈의 혈육만 아니었더라면 한입에 집어삼켰을 텐데. 검을 익힌 탓에 씹는 맛이 아주 별미일 것 같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프리비아는 펠리시아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왜…왜 그러세요…네?”

그러자 잔뜩 겁먹은 펠리시아가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때 목욕탕 문이 벌컥 열리며 필립이 들어섰다.

“거, 열흘 만에 일어나서 한다는 게 고작 힘없는 인간 괴롭히는 겁니…응?”

“교……교관!”

디아나는 즉시 손에 든 가운으로 몸을 가렸다. 필립은 손짓으로 그녀에게 사과한 뒤 프리비아의 가느다란 팔을 잡아당겼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이리로 좀 오십시오. 저희 누나 그만 좀 괴롭히시고.”

“응? 아니, 이 건방진 애송이가 지금 누구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게냐? 정말 혼나고 싶으냐?”

프리비아는 빼액 소리쳤으나 그렇다고 억지로 팔을 빼거나 정말로 필립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필립이 그녀를 데리고 나가자 펠리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소녀는 누구니?”

디아나가 묻자 펠리시아는 잠깐 고민하다 대답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수석교수님보다도 훨씬 강한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 두면 될 것 같아.”

* * *

프리비아를 서재로 데려간 필립은 하녀에게 따뜻한 차 두 잔을 부탁했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필립이 묻자 프리비아는 싱긋 웃었다.

“과연 엘릭서는 우리 드래곤들에게도 전설이라 불릴 만하구나. 근 수백 년 내에 이토록 몸이 가벼운 적이 없느니라.”

“그거 다행이군요. 그 개고생을 해서 만든 엘릭서가 별 효과가 없었다면 억울해서 잠도 못 잤을 것 같은데.”

“그래. 그 엘릭서에 관해서 말인데, 본의는 아니라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엘릭서 제조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네가 원한다면 내 기억에서 그 제조법을 소거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지식에 대한 대가를 네게 치를 것이다. 그만한 지식은 받기만 하고 넘어가기엔 너무도 큰 것이니.”

그녀의 말대로 엘릭서의 제조법은 드래곤들에게조차 전승되지 못한 비밀 중의 비밀이었다. 만약 정당한 거래로 이것을 얻으려 든다면 나라 하나를 통째로 바친다 해도 모자랄 터였다.

그러나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 사이에 대가는 무슨 대가입니까. 제게 만들어 주신다는 영약에 신경이나 좀 더 써 주십시오. 그보다 혹시 비밀 금고 같은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던 프리비아가 필립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비밀 금고? 또 무슨 일이 생긴 게냐?”

“유세프 상회의 비밀 금고에 들어갈 일이 생겨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믿기 힘든 사람의 거점으로 들어가는 셈이라 솔직히 좀 부담스럽거든요. 다른 건 바라지 않고 혹시나 그들이 함정을 팠을 경우 절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 별일이라고. 그러마.”

평소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짜증과 귀찮음이 거의 사라진 것으로 봐서 오늘의 그녀는 필립이 무슨 부탁을 해도 들어줄 것만 같았다.

‘너넨 뒤졌다.’

필립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힘을 회복한 드래곤을 보험으로 두었으니 이제 오슬레이 유세프가 어떤 함정을 파 놓았든 겁낼 이유가 없었다.

“아마 이번 주 일요일에 다녀올 것 같습니다. 전 이제 출근해야 하니 편히 쉬고 계십시오. 아, 월랑족 모녀가 별장에 지내게 되었는데,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필립이 뭘 걱정하는지 알아챈 프리비아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알겠다. 이 애송아. 내가 그렇게 할 일이 없는 줄 아느냐?”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출근하기 위해 서재를 나선 필립이 별장을 나서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프리비아는 새로 머물게 되었다는 월랑족 모녀를 찾아나섰다.

‘월랑족은 천 년 전에 모두 사라진 줄 알았거늘, 그놈은 대체 어디서 찾아낸 건지.’

실버 드래곤인 그녀는 그녀와 같은 털색을 지닌 월랑족과 꽤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혹시라도 그녀와 알고 지내던 월랑족의 후손일 수도 있었기에 얼굴 정도는 확인할 생각이었다.

“미야옹.”

그때 복도의 장식장 그늘에서 까만 털뭉치 하나가 솟아나 프리비아에게 달려들었다.

“호오, 너는 한눈에 나를 알아보는구나.”

타니아였다.

오랜만에 만난 프리비아가 반가웠는지 타니아는 프리비아의 종아리에 얼굴을 비비다가 그녀의 눈앞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야옹거리기 시작했다.

“먀옹.”

“그래. 잘 지냈느냐.”

종족을 막론하고 어린 생명에게는 관대한 그녀였기에 조그만 새끼 고양이가 어깨를 타고 오르는데도 짜증조차 내지 않았다.

프리비아는 복도를 지나 정원으로 향했다. 분수가 흐르는 정원 공터에 커다란 은색 늑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조그만 새끼 늑대가 날아다니는 나비를 쫓아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질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프리비아는 곧 숨기고 있던 기운을 아주 약간 흘려보냈고, 그 즉시 늑대의 털이 바짝 일어섰다.

“…아니…이건……어…설마?”

그 기운의 정체를 파악한 월랑족 로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떴다. 그리곤 튕기듯 일어나 프리비아에게로 뛰어왔다.

“세상에, 이게 꿈인지 모르겠어요. 위대하신 분.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오다니….”

프리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반응을 보니 아는 월랑족 같기는 한데 늑대의 모습일 때는 다 비슷하게 생겼던 탓에 드래곤인 그녀의 안목으로도 그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는 없었다.

“네가 날 아느냐?”

“네! 물론이죠! 제가 어릴 적에 저를 꼬리 위에 태우고 놀아주셨잖아요? 아흐나의 딸 로로예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잠시 기억을 되짚은 프리비아가 기억이 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로구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 게냐? 마지막으로 봤을 때 너는 이미 이백 살이 넘었거늘.”

월랑족은 천 년을 사는 장수 종족이었다. 그러나 전사 종족 특성상 제 수명을 모두 누리고 죽는 월랑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한 번의 싸움으로 두 팔이나 두 다리가 모두 잘려 더는 싸울 수 없는 개체만 아니라면 모두 전장에서 죽기를 희망했다.

“그게… 말하자면 조금 길어요.”

로로는 그간 있었던 일을 프리비아에게 설명했고, 프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정말로 운이 좋구나. 본래 그 공간은 누군가를 영원히 가두기 위해 탄생한 것이니라. 마나의 흐름을 봉인했을 정도면 분명히 그랬겠지. 본래라면 너희 부부의 정신이 완전히 마모될 때까지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다행히 유능한 놈이 나타나 구원받았구나.”

“정말 다행이었죠. 작은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저 아이는 세상의 빛을 영원히 보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어요.”

“그래. 잘 되었구나.”

프리비아는 그렇게 말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필립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애송이가 오템 그놈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지. 신경을 좀 써야겠어.’

그녀는 필립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이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인간 중에서 그놈보다 잘난 놈이 앞으로 과연 나오기나 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필립보다 잘난 놈이 태어나 월광검을 계승할 확률은 0에 가까웠다. 필립을 잃기라도 하면 기나긴 용의 삶이 끝날 때까지도 다음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저 아이의 이름은 무엇이냐?”

생각을 정리한 프리비아가 새끼 늑대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 정하지 않았답니다. 본래는 부족의 어르신들께서 지어주셔야 하는데, 그분들은 지금 계시지 않으니… 저, 괜찮으시다면 위대한 분께서 저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어주실 수 있나요?”

프리비아는 로로의 부탁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훗, 드래곤에게 이름을 받은 늑대라. 월랑족의 역사가 이어지기만 한다면 오래도록 전설로 남을 녀석이로구나. 아이를 데리고 이리 오너라.”

로로가 잘 놀고 있던 새끼의 뒷덜미를 물고 다가오자, 프리비아는 용언으로 말했다.

[지혜로운 은룡이 선언하나니 네 이름은 라티아이며, 이는 달맞이꽃을 의미하니 너는 달이 뜨는 밤에 길잃은 자들을 비추리라.]

곧 신비한 빛이 새끼 늑대, 라티아에게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로로는 감격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위대하신 분.”

“뭐 별일이라고.

이 정도는 몸이 회복된 기념으로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프리비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로로에게서 라티아를 받아 들었다. 그 조그만 늑대는 엄마 품보다 조금 빈약한 품에 안기자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프리비아의 옷깃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하, 요 핏덩이가 감히 드래곤의 젖을 탐하느냐?”

프리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로로는 프리비아가 화내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어색한 표정으로 웃을 뿐이었다.

강아지의 촉촉한 코가 민감한 곳을 더듬는 감각에 프리비아는 작게 몸서리쳤다.

“…어떻게 좀 해봐라.”

잘못 만졌다간 조그만 새끼가 다칠 수도 있었기에 그녀는 어미인 로로가 알아서 하도록 두는 것을 선택했다.

“네? 아, 네!”

로로가 급히 새끼를 나무랐다.

“요 녀석! 그러면 안 돼!”

인간으로 변한 로로가 새끼의 옆구리에 손을 넣고 잡아당기자, 당황한 라티아가 자기도 모르게 입 근처에 있는 뭔가를 깨물었다.

“…흡.”

프리비아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이건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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