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 * *
필립은 피닉스의 심장을 손에 든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성격 급한 수컷 월랑족이 곧바로 필립을 다그쳤다.
“…피닉스를 죽였는데 힘이 돌아오질 않는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잠깐 기다리라는 말을 할 시간조차 아까웠기에, 필립은 말없이 정신을 집중했다. 이곳의 마나를 통제하는 술식이 새겨진 피닉스의 심장에는 아니나 다를까 마나가 존재했다.
물론 술식에 갇혀 술자가 아닌 다른 이가 다룰 수 없는 마나였으나, 필립은 피닉스의 심장이 발하는 미량의 마나만으로도 뭔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본래라면 이걸 들고 퍼즐을 세 개 정도 풀어야 하지만. 이게 된다면 시간을 아낄 수 있겠지.’
복잡하게 얽힌 술식 도형에 획을 하나 더 긋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필립은 눈을 질끈 감고 심장의 마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 피니스의 심장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주변에 있던 늑대 두 마리와 사람은 곧 자신의 오러와 마력이 되돌아왔음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아악!”
그때 암컷 월랑족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이가! 아이가 나올 것 같아요! 지금… 아아…!”
“뭐라고!”
갑자기 시작된 진통에 수컷 늑대는 당황하며 아내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내, 내가 뭘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거지?”
필립은 여자인 펠리시아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평생 검이나 만지작거린 그녀가 출산을 돕는 법을 알 리가 없었다.
“제가 좀 보겠습니다.”
반려견의 출산을 경험한 적이 있던 필립이 암컷의 상태를 살폈다. 양수가 터졌는지 그녀의 배 아래로 물이 흥건했고, 당장이라도 새끼가 나올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산도가 안 열리는데? 저거 저대로 놔두면 큰일 나는데.’
그가 가진 지식으로는 이 상황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보아하니 저 수컷 월랑족 또한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팔자에도 없이 산파 노릇을 해야 하다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필립은 허리에 찬 검을 검집째로 암컷 월랑족의 입에 물렸다.
“힘줘요. 힘! 당장!”
* * *
필립은 피 묻은 손을 씻으며 막 태어난 강아지의 상태를 살폈다. 아주 오랜 시간 어미의 뱃속에서 시간을 보낸 탓인지, 갓 태어난 강아지라기보다는 생후 3주 정도는 흐른 모습처럼 보였다.
월랑족이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녀석은 태어난 지 고작 몇 분 만에 걸음마를 떼었고, 삼십 분이 지난 뒤에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배가 고파졌는지 어미의 젖을 빨았다.
“…너무 귀여워.”
펠리시아는 젖을 빠는 월랑족 새끼를 보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양수를 물로 씻어내자 복슬복슬하고 동글동글한 은색 강아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태어났으니 다행이야. 그렇지. 필립?”
“그래. 다행이네.”
그때 아내를 돌보던 수컷 월랑족이 필립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매우 정중하고 각이 잡힌 태도로 필립에게 고개를 숙였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은혜를 입었습니다. 작은 주인이시여. 마나의 흐름이 이어진 지금은 알겠습니다. 당신이야말로 그분의 후계자라는 것을.”
마나의 흐름을 막는 술식이 사라지자 그는 필립의 몸에서 아주 익숙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천 년 전, 모든 월랑족이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했던 바로 그 사내에게서 나던 냄새였다.
“뭐 따로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까?”
“그러시지 않는다 해도 저는 이미 당신을 인정했습니다만, 그분의 기술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필립은 말없이 검을 뽑으려다, 검날이 뭔가에 걸리는 것을 느꼈다. 암컷 월랑족이 출산할 때 너무 강하게 문 탓에 검날이 다 나간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필립은 손날에 오러를 형성했다. 월광검의 묘리를 섞자 창백한 달빛과도 같은 오러가 그의 손에서 이글거렸고, 그것을 목격한 월랑족들이 경건한 자세로 고쳐앉았다.
‘아니 대체 저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펠리시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필립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동생은 비밀이 너무 많아서 일부러 모른 척 넘어가기도 힘들 정도였다.
“월랑족 전사 라포가 월랑족의 주인을 뵙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제 발톱과 이빨은 당신의 것이며, 기꺼이 당신의 적을 물고 찢을 것입니다.”
“월랑족 전사 로로가 월랑족의 주인을 뵙습니다. 전… 전 정말로 감사해서… 흑….”
수컷의 이름은 라포, 암컷의 이름은 로로였다. 필립은 그들의 인사를 정중히 받아들인 뒤 산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좀 나갑시다.”
그때 하늘에서부터 요란한 독수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필립이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바네사 비톨로 교수가 그리폰의 등에 탄 채 활공하고 있었다.
“펠리시아 오스왈드 교수님! 필립 오스왈드 교관! 들리면 대답하세요!”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자마자 그리폰을 소환해 그들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필립은 손을 흔들어 자신이 이곳에 있음을 알렸고, 곧 그리폰이 내려섰다.
“무, 무사하셨군요. 이곳에서 이탈할 수 있는 포탈을 찾았습니다. 어째서인지 다시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덕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려섰던 그녀는 월랑족이 풍기는 흉포한 기운을 느끼곤 몸을 흠칫 떨었다. 적대감을 표출하지도, 으르렁대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그녀가 소환한 그리폰은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바짝 얼어 있어야 했다.
‘저게 그 전설의 월랑족….’
고대 종족의 기록 정도는 비톨로 교수 또한 읽어본 적이 있었다. 그저 강력한 종족이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실제로 마주한 월랑족에게선 강렬한 존재감과 압박감이 느껴졌다.
“…학생들을 인솔해서 먼저 나가시겠어요? 교관과 저는 이분들과 알아볼 게 좀 있어서요.”
펠리시아가 눈치껏 나서 주었다. 비톨로 교수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그러겠습니다. 뭘 하시든 부디 몸조심하시길.”
“끼에에엑!”
소환된 그리폰은 소환자인 그녀를 버리고 갈 생각이었던 듯 몰래 날개를 펼치려다 교수가 떠날 것처럼 보이자 냉큼 날아올랐다.
그녀가 떠나자 필립은 자연스럽게 월랑족 라포에게 지시했다.
“당신 아내를 따뜻하고 편한 곳으로 옮겨야 하니 인간의 형태로 변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해 봅시다.”
* * *
몇 시간 뒤, 로로의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두 인간과 세 늑대는 곧 탈출 포탈을 찾아내었다.
포탈을 통과한 필립과 펠리시아는 뒤따라온 두 은발 남녀와 한 마리의 강아지를 바라보았다.
“제가 말한 곳으로 가서, 필립 오스왈드가 보냈다고 하면 쉴 곳을 제공해 줄 겁니다.”
필립은 일단 월랑족들을 자신의 저택에 머무르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컷 월랑족, 라포는 엄숙한 표정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작은 주인이시여. 저는 자유를 되찾은 지금 이 순간부터 제 동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올라야만 합니다.”
어이가 없어진 필립이 되물었다.
“딱히 말릴 생각은 없는데, 휴식을 좀 취하고 떠나도 되지 않습니까? 털이랑 가죽이 다 탔잖습니까. 게다가 당신의…… 새… 아니, 딸도 태어났는데 말입니다.”
‘새끼’라고 표현할 뻔했던 필립은 가까스로 호칭을 수정하는 데 성공했다.
“월랑족은 모두 가족입니다. 저와 제 아내, 그리고 자식이 누리는 것들을 동족 또한 마땅히 누려야만 합니다. 이것은 종족의 사내로 태어난 저의 의무이며, 당신께서 그러지 말라고 명령하시지 않는 한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필립은 그의 아내인 로로와 갓 태어난 은빛 강아지를 잠깐 눈에 담았다.
“…저도 이 아이만 아니었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작은 주인님. 부디 제 남편이 의무를 다하도록 해 주세요.”
남편과 생이별을 한다는데도 로로 또한 같은 말을 했다.
“아니… 뭐 여러분만 괜찮다면 마음대로 해도 됩니다. 그러면 아내와 아이를 제 집으로 데려다준 뒤에 떠나세요.”
“감사합니다. 작은 주인이시여.”
라포는 정중히 인사한 뒤 인간 형태로 변한 아내와 아직 변신하지 못하는 어린 딸을 품에 안고 필립이 알려준 별장을 향해 움직였다.
“우리도 돌아갈까?”
지친 표정으로 펠리시아가 말했다. 필립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펠리시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가긴 어딜 가, 가려면 수석교수님부터 먼저 뵙고 가야지.”
“…진짜 싫어.”
펠리시아는 신경질적으로 묶은 머리를 풀었다. 땀을 많이 흘린 탓에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당장 따뜻한 물에 목욕한 뒤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하지만 가야지?”
남매는 서로를 마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지꼴로 아카데미 건물에 돌아간 그들은 곧바로 수석교수를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퇴근한 뒤였다.
“…수석교수님이 퇴근했다고요?”
“예? 아, 예, 그렇습니다.”
교직원 대기실에서 멍든 눈 주변에 계란을 문지르고 있던 길모어 템스 교관은 펠리시아 교수의 심기가 영 불편한 듯 보이자 긴장한 채로 대답했다.
“…누구는 오러도 못 쓰는 곳에서 온갖 고생을 했는데, 먼저 퇴근을 해…?”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펠리시아를 보며 길모어 교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고생이 많았나?’
그는 곧 공기를 타고 흐르는 묘한 냄새를 맡았다. 펠리시아의 몸과 옷에서 나는, 땀과 먼지가 섞인 냄새였다. 본능적으로 콧구멍을 벌름거린 길모어 교관은 생각했다.
‘…예쁜 여자라서 그런가, 땀 냄새도 그리 나쁘진 않은데.’
그 사실을 눈치챈 펠리시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죠. 교관?”
경멸과 혐오가 섞인 시선으로 길모어 교관을 노려본 펠리시아가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어서 퇴근이나 하자고요. 교수님. 어떻게 하실래요. 교직원 기숙사로 갈 겁니까? 아니면 제집에서 쉬시렵니까?”
“하아… 교관 집으로 갈래.”
필립의 별장은 교직원 기숙사와 차원이 달랐다. 목욕탕이 그랬고, 침대 또한 몇 배는 더 편했다. 지금은 어디든 등만 대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기왕이면 비싼 곳이 더 좋았다.
“가시죠. 그럼. 아, 템스 교관님. 저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냄새에 매력을 느끼는 남자는 교관님 생각보다 세상에 많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뭐라고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니, 오해입니다. 아니라고요!”
필립은 발악하는 길모어 교관에게 손인사를 건넨 뒤 펠리시아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생각해야 할 일들이 많았지만, 일단은 좀 자고 싶었다.
별장으로 돌아가자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고 했다. 필립과 펠리시아는 깨끗하게 몸을 씻은 뒤 빵과 우유로 대충 배를 채웠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들었다.
그날 밤 필립은 거대한 은색 늑대 밑에 깔리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