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화
* * *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바네사 비톨로 교수는 필립과 펠리시아가 늘어놓은 그간의 사정을 들으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월랑족에 관한 기록이라면 읽은 적이 있습니다. 천 년 전에 자취를 감춘 종족 중 강함으로는 그 짝을 찾기 힘들었다고 전해지는 종족이죠. 그런 이들과 마주치고도 무사히 돌아오시다니, 정말로 다행인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만일 필립과 펠리시아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동굴에 남은 비톨로 교수와 학생들 또한 이곳에서 나갈 희망을 잃는 셈이었다.
월광검의 존재나 마스터 오템 같은 알려지면 곤란한 종류의 정보들은 의도적으로 빼고 설명했기에 앞뒤가 조금 맞지 않는 구석도 있었으나, 다행히 비톨로 교수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기에 따로 필립을 추궁할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학생 중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아까부터 열이 많이 나고 얼굴이 창백하더군요. 일단 다른 학생들이 돌보고 있기는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비톨로 교수의 말에 필립은 깜짝 놀라 그 학생을 찾았다.
“그 학생은 어디 있습니까?”
“저쪽입니다.”
필립은 곧 동굴 한쪽 구석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옷을 벗겨 놓기라도 했는지 학생들이 로브로 가림막 같은 것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을 본 필립은 펠리시아에게 손짓했다.
“교수님 잠시 저 좀 도와줘요.”
말투에 격식이 좀 모자라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곳에 모인 사람 중 필립과 펠리시아가 남매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 응… 그래. 교관. 뭘 도와주면 돼?”
“안에 들어가서 저 학생의 상태를 좀 확인해 주면 됩니다.”
“그래. 그럴게.”
펠리시아는 로브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가림막을 헤집고 들어가 동굴 바닥에 누워 있는 여학생을 살폈다.
브레타라는 이름의 그 불쌍한 소녀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상태가 매우 나빠 보였다. 마법 학부생이라 그런지 조금 깡마르고 왜소했는데 그 탓에 훨씬 더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자고 있네. 음… 입술이 파랗고, 피부가 창백해. 땀이 계속 흘러서 탈수 증상이 일어날 것 같아….”
마음이 약해진 펠리시아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학생의 상태를 알렸다.
“구토 증상은?”
“응… 토사물이 보이지는 않네. 피도 그렇고.”
“팔이나 다리, 목 같은 곳을 잘 살펴보쇼. 혹시 뭔가에 물려서 부어오른 곳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니까.”
펠리시아는 필립의 지시대로 학생의 몸을 살폈다. 왼쪽 허벅지 부근에 뭔가 벌레 같은 것에 물린 자국이 있었다. 정확히 물린 부분만 푸른색으로 부풀어 있었기에 펠리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정말 좋지 않아 보이는데.’
“물린 자국이 있어. 파랗게 부어올랐고, 뭔가 좀 좋지 않아 보여. 안에 고름이 차는 것 같기도 해.”
“어…… 누…구세요?”
잠들어 있던 브레타가 누군가가 자신을 만지는 감각을 느끼고 눈을 떴다. 가까이 있던 펠리시아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였기에 필립은 그녀가 일어난 것을 듣지 못했다.
“뭔지 알겠군. 독지네한테 당한 것 같은데. 빨리 해독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거야. 물린 지 제법 된 것 같으니 빨아낼 수도 없을 거고, 해독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공간에서 마법사 계열의 캐릭터에게 자주 일어나는 이벤트였다. 물론 필립은 해독제에 필요한 재료와, 조합법을 모두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 넓은 섬을 뒤지며 그것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 하지만 필립은 그것들이 자생하는 장소 또한 꿰고 있었다.
‘나…나 죽어? 그냥 아픈 게 아니라…?’
필립의 목소리를 들은 브레타의 표정이 마치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일이 단단히 잘못됐음을 직감한 펠리시아가 이마를 짚었고, 브레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치 아기처럼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 가슴이 미어지는 울음소리를 들은 필립이 급히 덧붙였다.
“하…하지만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교수님. 재료만 찾으면 해독제 같은 건 금방 만들 수 있으니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펠리시아 또한 장단을 맞췄다.
“그…그렇지? 검술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교관은 아마 마스터 드루이드가 되었을 거야.”
“하하. 맞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전설 속의 엘릭서까지도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이런 해독제 같은 건 몇 시간이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학생이 마음 놓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아마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요?”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바네사 비톨로 교수는 필립과 펠리시아의 행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교육자라는 건 저런 건가.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교수직을 수락했을지도 모르겠어. 저런 대귀족들이 평민 소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저렇게까지 하다니….’
필립은 곧바로 마법 디아나에게 사정을 설명한 뒤 학생 중에서 해독제의 재료를 구하러 나설 자원자를 찾았다.
“기본 검술 훈련을 받았거나,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앞으로 좀 나와 주겠니? 위험하니 너희끼리 보낼 생각은 없고, 파렌할 교관님과 함께 행동하면 된다.”
여덟 명의 소환 마법 수강생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나서는 사람이 없다가, 문득 한 소녀가 앞으로 나섰다.
“제가 도울게요. 교관님.”
그건 바로 쟈니스 무르엘라였다. 그녀가 자원하자 곧바로 최근 영혼의 단짝이 된 셰릴 또한 그녀를 따라 앞으로 나섰다.
“저…저도요.”
그러나 쟈니스가 그녀를 강제로 밀어 넣었다.
“넌 들어가. 허리보다 높은 지대엔 오르지도 못하잖아.”
그녀의 절망적인 신체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셰릴은 아카데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의 몸치였고, 마법을 쓰지 못하는 지금 그녀는 보호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쟈니스는 생각했다.
필립은 기특하다는 듯 따뜻한 시선으로 쟈니스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인두세를 받는 귀족으로서 모범을 보일 뿐이에요. 아픈 애가 귀족이었으면 나서지 않았을 거라고요. 너희 귀족들은 뭘 하는 거니? 너희 부모님들은 혹시 세금을 걷지 않는 거야?”
“그만하렴. 쟈니스 너만 도와준다면 충분하니까. 너는 파렌할 교관님과 함께 동쪽을 수색하면 된다. 뭘 찾아야 하는지 알려 줄게.”
“네. 교관님.”
* * *
해독제의 재료는 생각보다 빨리 모였다. 필립이 가장 찾기 어려운 재료인 해독초를 운 좋게 빨리 발견하기도 했고, 눈이 좋은 쟈니스와 디아나 또한 제 몫을 해낸 덕이었다.
필립은 즉시 평평한 돌을 구해 모인 재료들을 빻고 조합해 역겨운 색의 단약 하나를 만들어 내었다.
정상적인 감각의 소유자였다면 차마 입에 넣을 수 없을 생김새였고, 독한 풀냄새가 진동했으나 다행히 브레타는 중독 증상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문제는 재료를 구하는 동안 증상이 더 심해진 탓에 뭐가 입에 들어온다고 해서 씹어 삼킬 만한 상태 또한 아니었다는 것.
필립은 단약을 손에 든 채 말없이 펠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왜? 왜 날 보는 거야, 교관?”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것 같은데, 교수님이 이걸 잘게 씹어서….”
“으…으으….”
순식간에 울상이 된 펠리시아를 보며 필립이 킥킥 웃었다.
“농담입니다. 그냥 먹여도 되니 안심해도 됩니다.”
필립은 브레타의 입을 벌린 다음 단약을 집어넣고 그녀의 울대뼈를 자극했다. 단약이 식도로 넘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필립은 검을 뽑아 그녀의 손가락 끝을 살짝 베었다.
까맣게 죽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본 필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브레타의 몸이 독이 섞인 혈액을 내보내려 하는 것이었다.
“이대로 푹 쉬게 두면 낫겠지.”
필립은 소매로 그 안쓰러운 학생의 땀을 닦아준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
그때 뭔가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필립은 즉시 검을 뽑고 외침이 들린 곳으로 향했다. 동굴 입구 쪽이었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은색 털을 지닌 두 마리의 거대한 늑대가 동굴 입구에 선 채 필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 네가 말한 유황 백 근을 모두 구했으니 이제 놈을 잡으러 갈 시간이다.”
그중 수컷 늑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마치 무너진 광산에 열흘쯤 갇혔다가 겨우 살아나온 것처럼 보이는 행색이었다.
하지만 그 야수의 흉포한 눈빛만은 그대로 살아있었기에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니, 벌써 말입니까?”
백 근이면 육십 킬로그램이었다. 광부의 왕이라 불리는 자가 있다 한들 고작 반나절 만에 유황 육십 킬로그램을 모을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불순물이 섞인 광석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저 꼴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긴 한데.’
“지체할 시간이 없다!”
참을성이 모자랐던 수컷 늑대는 바람처럼 달려들어 필립의 상의를 물고 그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마치 날아오르는 것처럼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어…어?”
눈에 들어온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는 경험을 한 필립이 정신을 차리자, 그와 똑같은 신세가 된 펠리시아가 암컷 늑대의 입에 물린 채 그의 뒤를 따르는 모습이 보였다.
“꺄악! 잠깐만요, 저는 왜요?”
‘그러게. 쟤는 왜 데려온 거래.’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탈출 포탈을 빨리 찾아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필립은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발버둥치는 펠리시아를 구경하며 산 정상을 향해 운반되었다.
* * *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
“뭘 어떻게 하긴요. 유황 덩어리를 저 알을 향해 던져야죠.”
“언제까지?”
“피닉스가 알을 깨고 나올 때까지.”
“…이상하게 말이 짧군.”
“뭐 그런가 보죠.”
암컷 월랑족은 자신의 남편과 필립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필립이 자격을 증명하게 된다면 그는 곧 자신과 남편, 그리고 모든 월랑족의 주인이 될 것이었다.
‘저래도 되는 걸까?’
자신 또한 나중에 대가를 치를 것 같았다면 당장 남편의 꼬리를 물어뜯었겠지만, 필립이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당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이는 좀 혼이 나야 해.’
인간의 형태로 변한 월랑족 두 명이 곰 가죽에 싸여 있던 유황 덩어리들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봉우리 정상의 피닉스 알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피닉스의 알은 강철도 태울 만큼 뜨거운 열기를 지녔기에, 알껍질에 직접 닿지는 않았으나 광석에 섞인 유황이 발화하며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솟았다.
“…우리도 도와야 하는 거 아냐?”
“아니. 아쉬운 건 저쪽인데, 뭐.”
펠리시아가 물었으나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미 심사가 조금 뒤틀려 있었다.
“왜 이렇게 느립니까? 더 빨리 던져야 합니다. 그래서 피닉스가 화산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손이 보이잖아! 더! 더 빨리!”
수컷 월랑족은 이를 빠득 갈며 허리가 비명을 지를 만큼 빠른 속도로 유황 광석을 주워 알에게 던지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고, 준비한 유황 광석의 반이 사라지자 필립은 곧 피닉스의 알이 흔들리는 현상을 포착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와 펠리시아도 나설 차례였다.
두 월랑족과 두 인간은 숨 쉴 틈도 없이 남은 유황 광석을 쏟아부었고, 피닉스의 알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고작 몇 개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백금색의 알이 갈라지기 시작하자 그 틈새에서 마치 광선 같은 열기가 빠져나와 주변의 돌과 바위를 녹였다. 필립은 즉시 펠리시아의 머리를 누르며 자신도 몸을 숙였다.
저 열기들은 피닉스의 생명력 그 자체였다. 유황 연기를 감지한 피닉스가 생명력의 대부분을 희생하고서라도 이곳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었다.
수컷 월랑족은 알을 깨고 나온 피닉스를 보며 환희에 찬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곧바로 늑대의 형태로 변신했다.
“하! 이제야 해볼 만하겠군! 마치 병아리 같구나!”
피닉스의 모습은 필립이 본래 알던 것과는 좀 달랐다. 그야말로 ‘불새’라는 단어를 실제로 구현해 낸 것처럼 생겼을 피닉스는 ‘불병아리’라고 불러야 옳을 것처럼 볼품없었다.
전체적인 크기가 본래의 반 이하로 줄었고, 몸을 휘감은 불꽃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내가 속았는가!
피닉스 또한 지성이 존재하는 환수였기에, 그는 주변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날개를 퍼덕였으나 월랑족이 더 빨랐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
임산부인 아내가 끼어들지 않도록 한 수컷이 나는 듯이 뛰어올라 도망치려던 피닉스의 목을 물었다.
―이…이런! 어떻게 내가 이런 놈들에게…! 크아아악!
입천장이 열기에 녹아 목구멍에 눌어붙는 고통에도 수컷 월랑족은 피닉스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결코 턱의 힘을 풀지 않았다.
그의 아름다운 은빛 털과 갈기가 불탔고, 까맣게 탄 살가죽이 드러날 때가 되어서야 수컷은 씩씩대며 피닉스의 목줄기를 놓았다.
“아아, 당신!”
암컷 월랑족이 낑낑거리며 남편에게 다가가자 수컷은 뒤로 물러서며 거부했다.
“아직 뜨거우니 당신은 오지 마. 이깟 화상 정도야 며칠 쉬면 나아! 그보다 어서 저 빌어먹을 새의 배를 갈라 보라고! 우린 나갈 수 있는 건가?”
필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뽑고 피닉스의 사체를 향해 다가갔다.
피닉스는 본래 이런 식으로 죽을 만큼 하찮은 존재가 아니었으나, 생명력 대부분을 잃은 채였으니 저런 공격에도 죽고 마는 것이었다.
‘어우, 뜨거워.’
땀을 뻘뻘 흘리며 필립은 죽은 피닉스 앞에 섰다. 더 가까이 다가갔다간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기에 그는 검을 최대한 멀리 뻗어 피닉스의 가슴 부위를 검으로 가르려 했다.
그러나 환수의 가죽이 오러도 실리지 않은 검에 손상을 당할 리가 없었다.
“제가 할게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암컷 월랑족이 나섰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피닉스의 가슴을 가르자 필립도 익히 아는 아이템인 ‘불새의 심장’이 보였다.
일반 생명체의 심장과 달리 마치 루비 결정처럼 생긴 그것을 꺼내자 필립은 이내 ‘불새의 심장’에 새겨진 몇 가지의 술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