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화
* * *
“머저리 같기는. 상대를 보고 덤벼야 할 것 아닌가.”
수석교수 에밀 파노이는 집무실로 찾아온 길모어 교관을 보며 혀를 찼다. 그의 몰골은 기사치곤 꽤 처참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고, 교관 정복이 찢어져 멍든 팔이 드러났다.
수석교수는 필립의 자제력에 감탄했다. 저렇게 주먹다짐을 할 정도까지 갔음에도 얼굴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았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길모어 교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맨손 격투를 그렇게 잘하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습니다. 아예 싸움이라는 게 성립하지 않더군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땅에 누워 있었습니다.”
“뭐 그렇겠지. 그냥 그러려니 하게. 본래 세상을 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놈들이 종종 등장하지. 그런 놈들을 하나하나 의식하다 보면 끝도 없다네.”
수석교수는 그답지 않게 충고했다. 그러나 길모어 교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게 과연 옳습니까?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저는 열여덟 살이 된 이후 10년 동안 목숨을 걸고 마족과 싸웠습니다. 하지만 필립 오스왈드 교관은 제대로 된 전쟁도 겪지 않은 것으로 합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수석교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따지면 전쟁터에서 한 20년 굴러먹은 야전 지휘관 놈들은 지금쯤 오러 마스터도 아니고 그랜드 마스터 같은 게 되어 있어야겠지. 필립 오스왈드, 그놈은 그냥 잘난 놈이야. 뭐 잘난 이유를 굳이 찾자면 운 좋게 잘난 머리와 잘난 육체를 타고난 탓이겠지만, 그런 걸 질투해 봤자 뭐 하나?”
“….”
“지금 자네가 여기서 열등감을 곱씹고 있을 때, 농부들은 말라비틀어진 풀뿌리를 씹으며 괭이질을 하고 있을 걸세. 그들이 보기에 자네는 복에 겨워 배때지가 터질 것 같은 놈이겠지. 물론 자네는 어릴 적부터 가혹한 훈련을 받았겠지만, 그들이 알 바는 아니잖나.”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길모어 템스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수석교수가 무슨 이유로 저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을 뿐이었다.
* * *
“…정말 이렇게 시간이 많이 남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수업 과정이 바뀐 뒤 최대 수혜자는 바로 교직원이었다. 이전까지는 일주일 중 사흘, 많으면 사흘 동안 하루에 대여섯 시간 수업해야 했지만, 이제는 주에 5일, 두 시간 정도만 수업을 진행하면 되었다.
남는 시간은 다음 수업을 준비하거나, 딱히 할 게 없다면 교직원 휴게실에서 쉴 수도 있었다.
검술 학부의 다른 교관들은 교수와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필립과 디아나는 펠리시아의 연구실을 휴게실 대신 쓸 수 있었기에 남는 시간에는 그곳에서 다과를 즐기는 편이었다.
“개편 전이 너무 가혹했던 거지. 이게 정상이야.”
필립의 말에 펠리시아는 이를 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필립. 내가 가장 어린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혹사당했는지, 넌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거든? 1학년 2학년을 동시에 관리하면서, 거기다 여자 기숙사 부사감까지! 이건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구.”
그동안 쌓인 게 꽤 많은 모양이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디아나 또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펠리시아 너는 제대로 된 수련도 하지 못했지. 오스왈드 교관이 전수한 그 기술을 배우고도 말이야. 나라면 억울해서 교수직을 그만두고 말았을 것 같은데.”
펠리시아는 흠칫했다. 사실 그녀는 회전검을 이제 꽤 능숙하게 쓸 수 있었다. 그녀의 재능은 본래라면 한 세대를 대표할 만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딱히 말하지 않았다. 디아나를 위해서였다.
“저기, 펠리시아 교수님. 계십니까?”
그때 연구실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목소리였다.
“네. 들어오세요.”
깜짝 놀란 펠리시아가 대답했다.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로브 차림의 한 마법 학부 교관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만 정말 급한 일입니다! 바네사 비톨로 교수님께서 진행하는 소환 마법 수업 중 교수님과 학생들이 실종되었습니다! 파노이 수석교수님과 이벨린 교수님께서 현재 가용한 모든 인원을 수색 작업에 동원하라고….”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식을 전했다.
“실종된 위치가 어딥니까?”
문득 뭔가를 떠올린 필립이 묻자, 교관은 서쪽을 가리켰다.
“아카데미 서문 옆의 숲입니다. 지금 거의 모든 교직원이 그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거군.’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점에서 일어날 단체 실종이라면 그것뿐이었다.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예! 부탁드립니다!”
교관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다른 교직원을 찾기 위해 연구실을 나섰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래…?”
펠리시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바네사 비톨로 교수라면 이번에 새로 영입된 소환 마법의 스페셜리스트였다.
녹색 마탑에서 한때 기대주로 불렸던 천재였지만, 필립은 그것까진 알지 못했다.
“일단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니 서두르는 게 좋겠는데.”
필립의 말에 펠리시아와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교수까지 함께 실종되었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곧 아카데미 서쪽 숲에 도착한 필립과 디아나, 펠리시아는 에밀 파노이와 마주쳤다.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자네들 세 명이 조를 짜서 수색하게. 뭔가 이상한 게 보이면 바로 보고하도록. 여덟 명이 사라졌으니 단서가 나와도 진작 나왔어야 정상이거늘,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완숙한 오러 마스터인 에밀 파노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생하십시오.”
필립은 별말 없이 고생하라는 의미에서 고개를 한 번 숙여 인사한 뒤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다른 정보가 없었기에, 펠리시아와 디아나 또한 그의 뒤를 말없이 뒤따랐다. 그런데 필립이 걷는 속도가 수상하게 빨랐다.
마치 목적지를 알고 걷는 듯한 그의 걸음걸이에 펠리시아가 필립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살짝 찔렀다.
“동생아, 어디로 가는 건지 알고 가는 게 맞니?”
“이쪽에서 기묘한 뭔가가 느껴지거든.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필립이 그렇게 대답하자 펠리시아는 할 말을 잃었다. 뭔가 느껴진다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거침없이 나아간 필립은 곧 그 뭔가를 발견해 냈다.
그건 부자연스럽게 뚫려 있는 토끼굴이었다. 몇 발자국 다가가자 그 토끼굴의 입구로부터 강한 인력이 느껴졌다. 마치 근처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것만 같았다.
바네사 비톨로 교수와 소환 마법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이 토끼굴로 빨려 들어간 것일 터였다.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맵이 초기화되진 않았겠지. 지금 들어가면 같은 필드에 입장할 수 있을 거야.’
저 토끼굴 너머는 말하자면 이벤트 맵 같은 곳이었다.
까다롭고 이상한 효과를 지닌 필드로 통하는 곳이었고, 어디로 가게 될지는 필립 또한 몰랐다. 다만 높은 난이도의 필드로 소환되었다면 교수와 학생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터였다.
필립은 펠리시아와 디아나가 과연 도움이 될 것인가에 대해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그녀들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 잠깐 이리로 좀….”
“응? 뭐야? 뭔가 알아낸 거라도 있어?”
필립은 펠리시아가 크고 맑은 눈을 깜빡거리며 다가오자 죄책감을 조금 느꼈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서 이상한 힘이 느껴져. 아마 저 나무 근처인 것 같은데. 파렌할 교관님도 잠시 와 보십시오.”
“예. 교관님.”
디아나 또한 아무 의심 없이 펠리시아와 함께 필립이 가리킨 방향으로 걸었다. 몇 미터쯤 다가가자 그녀들은 자신의 몸을 잡아당기는 강한 힘을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어…?”
마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그녀들은 서로 껴안으며 함께 저항했지만, 곧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넓어진 토끼굴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꺄아아아악! 필립!”
“으아아악!”
필립은 말없이 그녀들의 뒤를 따라 스스로 토끼굴 속으로 들어갔다. 위를 바라보며 낙하하자 열려 있던 입구가 막히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가 막차를 탄 듯했다.
‘…혼자 개처럼 구를 수는 없지. 같이 고생하자고. 누나, 디아나 교관.’
* * *
필립은 바뀐 풍경에 적응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그가 이동된 곳은 넓은 해변이었다. 사각거리는 모래가 밟혔고, 난파선 몇 대가 보였다.
먼저 들어온 두 여인이 필립을 반겼다. 펠리시아는 필립이 바로 뒤따라 들어오자 꽤 감동한 표정이었다.
“…너까지 끌려올 필요는 없었잖아. 필립.”
“누나가 갑자기 사라졌는데 내가 어떻게 따라오지 않을 수 있겠어?”
필립은 양심이 내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천연덕스럽게 연기했다. 그는 이곳에 진입하자마자 이 필드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무인도 필드군. 속성은 마력 봉인이고. 차라리 잘 됐어. 탈출 포인트만 찾으면 곧바로 나갈 수 있으니까.’
특별한 조건이 있는 필드보다는 훨씬 나았다. 보스를 퇴치해야 한다거나, 혹은 끝도 없는 언데드 떼의 습격을 버티며 생존해야 하는 필드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마법이나 오러, 주술을 비롯한 마나를 이용한 모든 기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오러 마스터조차 단순히 체력과 기술이 좀 뛰어난 검사나 다름없이 변하는 장소였다.
마법사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곳에서 그들은 단지 허약한 학자에 불과했다.
“…오러가 반응하지 않는데. 왜 이러는 걸까요.”
디아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래도 이 장소가 문제인 것 같으니, 어서 사라진 사람들부터 찾은 다음 탈출할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죠.”
필립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하자 펠리시아와 디아나는 그나마 좀 안심할 수 있었다.
“해변이 둥근 형태인 걸 보니, 이곳은 아무래도 무인도 같은데. 사나운 짐승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 같아.”
펠리시아는 필립의 경고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쑥 든 생각에 불안해졌다.
“마…만약 여기서 마법도 봉인된다면, 비톨로 교수님과 학생들은 어떻게 해?”
“비톨로 교수님의 판단력이 정상이라면, 아마 몸을 숨길 동굴 같은 걸 찾으려 하시겠지. 섬 안쪽으로 들어가 봐야겠어.”
어차피 이곳에 몸을 숨길만 한 곳은 별로 없었다. 몇 군데만 뒤지면 될 일이었기에 필립은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무인도의 숲은 울창했다. 숲이라기보다 밀림 같았다. 일행이 가진 검은 나뭇가지를 자르거나 이파리를 쳐내는 일에는 영 쓸모가 크지 않았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 일행은 번갈아 가며 길을 내었다.
“여기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어. 필립.”
펠리시아가 나뭇가지에 걸린 천 조각을 발견했다. 학생용 로브의 조각인 듯했다. 발자국 또한 여러 개가 찍혀 있었기에 이것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실종된 이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야수의 흔적도 보이는군.”
필립은 다른 것을 찾아냈다. 늑대의 털과 배설물, 그리고 발자국이었다.
“그러면 서둘러야지!”
다급해진 펠리시아가 울창한 밀림을 헤치며 달려나갔다. 그리고 십 분 정도 더 앞으로 나아가자 절벽 아래에 뚫려 있는 동굴이 보였다.
그곳엔 마법 학부 학생들과 비톨로 교수가 있었다.
동굴을 등진 그들은 나뭇가지를 대충 꺾어 만든 조악한 창으로 늑대 여섯 마리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늑대들은 조직적이었고, 함부로 공격하지 않은 채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교수까지 아홉 명. 다행히 한 명도 죽지 않았군.’
필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앞으로 화살처럼 뛰쳐나갔다. 그러자 늑대들이 다급히 필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필립이 허리에 찬 검으로 맨 왼쪽에 자리한 늑대의 뱃가죽을 갈랐다.
늑대의 더운 내장과 비린 피가 그 사이로 쏟아졌고, 곧 옆에 있던 늑대가 필립의 목을 물기 위해 달려들었다.
애초에 그것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필립이 몸을 반 바퀴 회전시키며 늑대의 목덜미를 갈랐다. 순식간에 늑대 두 마리가 죽자, 뒤이어 날아든 펠리시아와 디아나가 각자 늑대 한 마리씩을 공격했다.
오러를 사용할 수 없던 탓에 그녀들은 필립처럼 단숨에 늑대를 죽이지는 못했으나, 꽤 큰 상처를 입힐 수는 있었다.
“깨갱! 끼이잉!”
늑대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물러났고, 다른 두 마리의 늑대들은 불리해진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났다.
전투가 끝난 뒤 필립은 바네사 비톨로 교수와 여덟 명의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검술 학부 교관들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필립은 그 무리 사이에서 익숙한 소녀 두 명을 발견해 냈다.
“셰릴? 쟈니스?”
“오스왈드 교관님?”
“교관님!”
이상하리만큼 운이 없는 오렌지색 머리의 귀족 소녀와, 괜히 친구랍시고 수업을 맞췄다가 봉변을 당한 도서관 근로 장학생 소녀가 나무창을 든 채 서 있었다.
옷이 다 찢어져 어깨와 옆구리의 맨살이 드러난 그녀들은 거지꼴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불쌍한 모습이었다.
‘…나와 엮여서 저렇게 운이 없는 건가?’
아무래도 필립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