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 * *
필립은 디아나, 그리고 길모어 교관과 함께 검술 교장으로 올라갔다. 길모어 교관은 교장에 도착해서 목검을 드는 순간마저도 불만 섞인 표정을 풀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이상한데, 교관님은 대체 왜 여자 뒤에 숨는 겁니까?”
“저 말입니까?”
필립이 자신을 가리키며 되묻자 길모어 교관은 그러면 누구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교관님 말입니다.”
어이가 없어진 필립이 뭐라고 쏘아붙이려다 이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뭐 그게 나쁜 건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아리따운 교관님께서 절 대신해서 싸워 주신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죠?”
필립은 그렇게 옆에서 걷고 있던 디아나에게 달라붙었다. 디아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쿡, 하고 웃고 말았다.
한참이나 나이 많은 사람처럼 굴다가도 이럴 땐 아직 어린 청년처럼 보였으니 필립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렇게 헷갈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겁쟁이처럼 뒤에 빠져 계실 거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길모어 교관이 입술을 깨문 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길모어 교관에게 마지막 기회를 베풀었다.
“꼭 저와 대련해야겠습니까? 이건 저를 위해서도, 교관님을 위해서도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냥 모르는 체 상황을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길모어 교관은 필립의 저 말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첫째. 필립은 그를 자기 상대로 여기지 않는다.
둘째. 필립은 자신의 실력에 대단한 자신감을 지녔다.
셋째.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봤을 때, 저 필립 오스왈드라는 교관은 꽤 뛰어난 실력자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고작 이 아카데미 교관들 사이에서나 해당하는 일. 지옥과도 같은 전투에서 몇 번이나 생환한 그와는 결이 좀 달랐다.
세상에는 대단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첫 전투에서 어이없이 죽음을 맞는 전사들이 많았다. 실전에 익숙하지 않아 가진 실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서였다.
길모어가 보기에, 필립 또한 그런 부류였다.
눈빛과 자세에 기백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길모어 교관이 필립을 말없이 노려보자, 필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교관님. 여기까지 올라오셨는데 죄송하지만 결국 제가 나서야겠는데요.”
“…그래요.”
디아나가 허락하자 필립은 거치대에 놓인 목검을 하나 집어 길모어 교관에게 던지곤, 자신도 하나를 손에 들었다.
“이렇게 합시다. 템스 교관님. 우리 딱 세 수만 겨루는 걸로요. 곧 수업 시작이고, 세 수 정도면 서로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잖습니까?”
필립의 제안에 길모어 템스는 피식 웃었다.
‘얕은수를 쓰는군. 하지만 뭐 나쁘지 않지.’
“그럽시다.”
세 번의 경합 정도면 충분했다. 길모어 교관은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디아나는 조금 물러나 흥미 가득한 눈으로 필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필립은 몸에 힘을 거의 푼 채였다. 손에 든 목검은 툭 치면 빠져나갈 것처럼 느슨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팔 또한 마치 갈대처럼 하늘거렸다.
길모어 템스는 천천히 기회를 살폈다.
‘…뭐지? 뭘 하자는 거야?’
분명히 빈틈투성이에 근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자세였는데, 먼저 검을 내밀 엄두가 안 났다.
그는 당황하거나 흥분하는 대신 정신을 집중해 살의殺意를 일으켰다. 죽고 죽이는 사선을 수없이 넘나들었던 이만 가질 수 있는 능력.
압도적 강자인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살기를 다룰 줄 알아야만 했다.
길모어 교관은 필립에게 빈틈이 생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필립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길모어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에게 저 정도의 살기는 간식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길모어 교관은 깨달았다.
눈앞의 쓸데없을 정도로 잘난 청년은 결코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워진 검사가 아니라는 것을.
그걸 깨닫고 나자 길모어 교관의 이마에 땀이 한 방울 흘렀다. 본래 필립의 저 자세는 수 싸움이 가능한 자세가 아니었는데, 마치 모든 수를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뭐지? 대체 뭐지?’
이 감각은 익숙했다.
그가 복무하던 기사단에서, 그보다 한참이나 앞선 선배나 대장급 기사들을 상대할 때 느꼈던 것.
‘…아니, 말도 안 돼.’
그 감각을 인정하기 싫었던 길모어 교관은, 마치 발악하는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가 검을 휘둘렀다. 전투 경험과 재능이 녹아든 그 공격은 분명 교수라고 해도 무시할 수만은 없는 수준이었다.
필립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 공격을 걷어냈다. 힘의 중심을 완전히 제압당한 길모어 교관은 그 한 수로 자신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필립은 방금 그의 목검을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제가 졌습니다.”
이 이상은 무의미했다. 쓰디쓴 패배감과 무력감 탓에 길모어 교관은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추해지기 싫었던 길모어 교관은 깔끔히 패배를 인정했고,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하셨습니다.”
* * *
필립의 강력한 주장 아래, 아직 어린 1학년 2학년 학생들은 근력보다는 몸의 탄력과 유연성, 그리고 기초 체력을 단련하는 것을 중점으로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성장이 덜 끝난 소년 소녀들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근력 운동은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읏… 아으으윽! 루아, 나 아파!”
올리비아 누에스는 루아와 함께 유연성 훈련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발을 맞댄 채 손을 잡고 잡아당기는, 매우 기초적인 훈련이었다.
타고나길 유연하게 타고난 아이들은 다리를 180도로 찢는 것은 물론이고, 앉은 채로 가슴팍을 땅에 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마치 각목 같은 유연성을 타고난 소녀였다. 허리가 앞으로 60도만 기울어도 온몸의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수준.
“앗, 미, 미안해. 올리비아.”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당기던 루아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자 깜짝 놀라며 손을 놓았다.
“아! …아아… 허리가… 내 허리가….”
허리를 짚으며 신음하는 올리비아를 보며 루아는 죄책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설마 이 정도로 저렇게 아파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탓이었다.
“…무슨 일이니?”
다른 학생들의 자세를 보고 있던 필립이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
“교관님… 저 허리가 아파요… 히잉….”
금세 상황을 파악한 필립은 이내 연민이 담긴 시선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현재 몸으로 빙의하기 전에는 뻣뻣한 신체의 소유자였기에 저 고통을 잘 알았다.
“좀 쉬면 나을 거다. 아프지 않을 때까지 쉬고 있으렴.”
그는 올리비아가 편히 엎드릴 수 있도록 도운 뒤 혀를 찼다. 저 각목 같은 몸을 쓸 만하게 만들려면 제법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아악! 교관님! 아파요! 아프다고요!”
어디선가 또 누군가 죽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1학년 검술 학부생 페이단 글롬이었다. 그는 길모어 교관의 지도 아래 유연성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필립이 보기에 저건 고문이었다.
‘저러다 애 하나 접겠군.’
“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다. 페이단 글롬. 고작 이 정도 고통마저 견뎌낼 수 없다면 너는 기사가 될 수 없다.”
“저는 딱히 기사가 될 생각이 없는…… 아아악!”
또래 소년 소녀들과 추억과 친분을 쌓기 위해 아카데미에 입학한 페이단 글롬은 학기 시작 이후 처음으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있는 대로 비명을 질렀다.
“…교관님. 그 학생은 제가 지도하겠습니다. 다른 학생들을 좀 봐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필립이 때마침 말리지 않았더라면 글롬 자작 가문의 후사 문제가 조금 복잡해졌을 터였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길모어 교관은 잠깐 필립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한 시간 전 이뤄졌던 서열 정리가 꽤 효과적이었던 탓이었다.
“아, 예. 그러십시오.”
필립은 급히 페이단 글롬의 상태를 살폈다. 유약한 인상의 그 소년은 눈물을 글썽이며 필립에게 감사를 표했다.
“가, 감사해요 교관님. 저 새 교관님께서 저를 죽이려고 하시는 줄만 알았는데….”
“너도 좀 쉬고 있으렴.”
“예. 감사합니다. 흑흑.”
글롬 가문의 명맥을 훌륭히 지켜낸 필립은 이내 다른 학생의 비명을 들었다.
“아얏! 아으으…이거 너무 아픈데 괜찮은 거 맞아…… 아으으요?”
“너는 여자라 몸이 유연하기에 이것보다 더 찢어져도 괜찮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또 길모어 교관이었다. 필립은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아니, 훈련을 시키랬더니 고문을 하고 있네.”
“제가 말리겠습니다. 교관님.”
근처에 있던 디아나 파렌할 또한 깜짝 놀라 길모어 교관에게 다가갔다.
“교관님. 잠깐만 급한 일이 생겨서…….”
길모어 교관은 디아나의 부름에 곧바로 반응했다.
“예? 무슨 일입니까?”
“일단 이리로 좀 오십시오.”
필립은 마침 수업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해 교장을 방문한 프레이저 컴벨 교수를 발견했다. 그는 급히 컴벨 교수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그래. 오스왈드 교관. 반갑네.”
“갑자기 죄송한데 잠시 학생들을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5분이면 됩니다.”
“…뭐?”
컴벨 교수는 잠깐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실이 급하기라도 한 모양인 듯했다.
“그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필립은 컴벨 교수에게 잠시 현장을 위임한 뒤 디아나와 길모어 교관의 뒤를 쫓았다.
디아나는 교장 옆 으슥한 풀숲까지 길모어 교관을 이끌었다. 인적이 드물고 자신들의 목소리가 학생들에게 들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디아나는 무서운 눈으로 길모어 교관을 노려보았다.
“…교관님. 제정신입니까?”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직 뼈마디도 아물지 않은 아이들을 그렇게 다루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아니, 그렇게 세게 다루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검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 정도는 견뎌야….”
짜증이 치민 디아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그만두십시오! 저 애들이 기사 지망생으로 보입니까? 저들 중 반 이상은 가문으로 돌아가 자식을 낳고 대를 이어야 할 아이들입니다. 여기가 훈련소입니까?”
길모어 교관 또한 할 말은 있었다. 그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박했다.
“그렇게 무슨 작은 새를 다루듯이 가르치면, 왕가에서 요구하는 만큼의 성과를 이뤄낼 수 있겠습니까?”
“그걸 왜 교관님이 걱정합니까? 그건 교수님들께서 알아서 할 일이고, 교수님들께서 정한 방침대로 해야 합니다.”
“…하, 그러면 왜 저 같은 현역 출신 교관을 채용했겠습니까? 제게 이런 걸 바랐기 때문 아닙니까?”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필립이 앞으로 나섰다.
“대화하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이건 제 잘못입니다.”
난데없이 필립이 잘못을 인정하자 디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길모어 교관 또한 조금 당황하며 필립을 바라보았다.
“…아까 그냥 찍소리도 못하게 패 놓지 않은 제 잘못이요. 디아나 교관님. 죄송한데 잠깐 망 좀 봐 주시겠습니까?”
필립의 부탁에 디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그녀답지 않게 발랄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녀는 감각을 곤두세우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없는지 감시하기 시작했다.
필립은 손가락 관절을 꺾으며 천천히 길모어 교관에게 다가갔다.
“원래 이런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이것도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교관님을 말로 설득할 자신이 없어서 그러니 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자는 말입니까?”
길모어 교관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일방적으로 구타하겠다는 이야깁니다. 교관님 같은 분은 자존심을 완전히 꺾어 놓지 않으면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길모어 교관은 이를 갈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잡는 자세를 보니 제법 격투에 익숙한 듯했다.
“진흙탕 싸움이라면 절 이길 수 없을 겁니다. 검이 부러진 상황에서 마물과 맨몸으로 맞서 싸워본 적이 있습니까?”
필립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의 턱을 향해 빠르고 가벼운 잽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