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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91화 (91/119)

091화

* * *

여름방학이 끝난 아카데미는 다시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상점가 또한 활기를 띠었고, 학생들과 교관들은 바뀐 교육 과정에 적응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았다.

“새 교관님들 봤어?”

“응. 그런데 무서워서 말은 못 걸었어.”

새로 채용된 교관들은 이전에 있던 교관들과는 좀 달랐다. 학장과 교수들이 꽤 정성을 들여 수소문한 인물들이었고, 최근까지 기사단이나 마탑 무력 부대, 혹은 핵심 연구 집단에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필립과 디아나는 펠리시아의 연구실에 불려가, 새 얼굴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교관님들. 길모어 템스라고 합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북부의 변경백이신 바로운 백작님께 봉신하였으며, 던버른 평원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필립 또한 새로운 교관과 함께 일해야 할 운명이었다. 그가 담당할 기초 검술과 육체 단련은 교수가 내내 붙어 있을 필요가 없는 과목이었고, 통제력이 좋은 교관 여러 명이 붙는 편이 오히려 효율적이었다.

“반갑습니다. 템스 교관님.”

“처음 뵙겠습니다. 템스 교관님.”

필립과 디아나는 새로 호흡을 맞추게 될 교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같은 수업을 담당하는 교관들끼리는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하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길모어 템스 교관은 짧은 머리의 20대 후반 청년이었다. 기사가 된 지 9년에 능숙한 오러 유저였으니 어느 전투 집단에서든 핵심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던버른 전투라면, 남작급 마족이 나타났던 그 전투를 말하는 겁니까?”

디아나가 길모어 교관의 소개에 흥미를 느꼈는지 질문했다. 길모어 교관은 예쁜 여자 교관이 관심을 보이자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입을 열었다.

“예. 영광스럽게도 변경백님과 함께 그 간악한 마족을 쳐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디아나의 시선이 필립의 얼굴로 향했다.

‘필립 교관은 학생 둘을 보호하며 남작급 마족과 맞섰었지. 비록 그 뱀파이어가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라고 해도….’

분명히 길모어 교관 또한 상당히 잘난 인물이었는데, 필립의 경우는 특별하다 못해 예외적이었다. 필립을 알기 전이었다면 길모어 템스의 경력만으로도 디아나는 깜짝 놀랐을 것이었다.

“이렇게 함께 일하게 된 것도 충분히 인연인데, 앞으로 잘 지내보죠. 템스 교관님.”

필립은 별생각 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길모어 교관의 반응이 마뜩잖았다.

“아, 예. 그럽시다.”

은근한 적대감마저 느껴지는 말투였다.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날 아나?’

딱히 그를 알고 저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 길모어 교관은 필립의 잘난 얼굴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에누리 없이 잘생겼군. 제발 물건이라도 작기를. 아니면 일찍 죽던가.’

그때 펠리시아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들 좋은 아침.”

펠리시아 오스왈드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마주한 길모어 템스는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남매가 하나같이 엘프 배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건가?’

필립과 디아나는 가벼운 인사말로 펠리시아를 반겼다. 오늘따라 펠리시아가 필립을 바라보는 눈에 호의가 가득했는데, 필립이 그녀의 교수 업무를 어느 정도 분담해서 처리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수업 계획서를 일찍 제출한 펠리시아는 아주 푹 자고 출근할 수 있었기에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 이번에 채용된 교관님이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아…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펠리시아가 환영 인사를 건네자 길모어 교관은 자신도 모르게 맥빠진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표정 관리를 했다.

“아, 이걸 전달하는 걸 깜빡했네. 오늘 수업은 왕실 기사단에서 파견된 인물이 참관할 예정이니 참고해 주세요. 알겠죠? 오스왈드 교관이나 파렌할 교관은 알아서 잘할 테고, 템스 교관은 두 교관을 잘 돕기만 해도 될 거예요. 그건 그렇고, 다들 아침 식사는 했어요? 수업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회의도 할 겸 카페테라스에서 뭐라도 좀 먹을까요? 물론 제가 사는 거예요.”

텐션이 한껏 높아진 펠리시아는 디아나와 필립의 팔을 잡아당겼다.

“자, 자, 사양하지 말고 빨리, 어서요.”

* * *

카페테라스로 끌려온 필립과 디아나, 그리고 길모어 교관은 신선한 과일 주스와 비싼 간식거리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다.

“누나한테 뭐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펠리시아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필립이 디아나의 귓가에 질문을 속삭였다.

디아나 파렌할은 잠시 길모어 교관의 눈치를 본 뒤 그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필립에게 되물었다.

“…꼭 알고 싶습니까?”

“예. 가족끼리 기쁨을 서로 나눠야죠.”

잠깐 망설이던 디아나는 곧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별 건 없습니다. 펠리시아는 간만에 푹 잤고, 간만에 쾌변했을 뿐이죠. 요 며칠 제대로 일을 해결하지 못해 얼굴이 노랗게….”

필립은 하마터면 디아나의 입을 막을 뻔했다. 다행히 길모어 교관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는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펠리시아의 얼굴을 멍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첫눈에 반한 모양인데.’

필립은 내심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길모어 교관은 펠리시아에게 반한 것처럼 보였다. 저 멍한 표정만 봐도 너무 뻔했다.

자리에 돌아온 펠리시아가 막 생각났다는 듯 필립에게 물었다.

“필립……이 아니라 오스왈드 교관. 그나저나 왜 육체 단련 시간을 이틀에 한 번으로 편성해 달라고 요청한 거야? 단련은 원래 매일 하는 거잖아.”

그 질문을 들은 길모어 교관이 정신을 차렸다.

‘육체 단련 시간이 왜 이렇게 적은가 했더니, 저 자식 때문이었군. 이래서 가문 믿고 까부는 놈은 안 된단 말이지. 단련을 빼먹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나마 교수님이라도 제정신이라 다행이군.’

필립은 손을 휘적거리며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근육의 성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뤄내기 위해서입니다. 근육이 성장하는 원리를 혹시 아십니까?”

펠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

“우리 몸의 근육은 여러 가닥의 줄기로 이뤄져 있습니다. 능력 이상의 행동을 하게 되면, 이 줄기들에 미세한 상처가 생기게 되고 회복하는 데 이틀에서 사흘 정도가 필요합니다. 이 회복 과정에서 우리 몸은 이전에 했던 능력 이상의 행동을 기억해내고, 그 행동에 알맞은 근력을 내기 위해…….”

필립은 스포츠 과학의 기초가 되는 이론을 늘어놓았고, 펠리시아는 필립의 설명에 집중했다.

“…따라서 근력과 근지구력, 민첩성은 따로 구분해서 훈련해야 하며, 체력 또한 따로 구분해서 단련해야 합니다.”

설명이 끝나자 펠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교관. 그런 걸 알고 있었으면 나한테 먼저 알려줬어야지! 그러면 나도 그렇게 훈련했을 텐데?”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디아나 또한 펠리시아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한편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길모어 교관이 무슨 소리냐는 듯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루라도 단련을 쉬면 나태함이 깃들기 마련이고, 나태함이 깃든 몸으로는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없는 법입니다. 검술을 처음 배울 때 다들 들은 말이지 않습니까?”

길모어 교관은 바로운 가문의 기사단에서 수준 높은 검술을 익히고 잔혹하기까지 한 훈련을 받은 기사였기에 필립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저나 교수님, 그리고 교관님들처럼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면 그런 식으로 강해질 수 있겠지만, 검의 길을 걷는 대부분은 하루라도 단련을 쉬어선 안 됩니다. 재능이 부족할수록 더 노력해야 한단 말입니다. 왕실 기사단에서 파견된 사람에게도 그런 식으로 설명하실 겁니까?”

펠리시아는 필립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 또한 길모어와 비슷한 생각이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필립의 이론엔 빈틈이 없었기에 설득된 것이었다.

게다가 직접 수련을 해 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공감되기까지 할 만한 설명이었다.

필립은 한숨을 푹 내쉰 뒤 입을 열었다.

“그 반대입니다. 템스 교관님. 매일매일 무식하게 단련한다고 강해질 수 있는 게 재능이 뛰어난 겁니다. 그러면 템스 교관님께선 근육이 늘어나는 원리를 알고 계십니까?”

“그건 아니지만, 단련을 쉬어선 안 된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길모어 교관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물러서지 않았다.

‘젊은 꼰대가 무섭다더니.’

필립은 딱히 그와 다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펠리시아만 동의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러면 수석교수님을 찾아가서 다시 편성을 바꿔 달라고 요청해 보십시오. 저는 직접 수석교수님께 요청드렸고, 그분께선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길모어 교관은 필립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당연한 일이죠.”

* * *

그 길로 카페테라스를 박차고 나간 길모어 교관은 수석교수의 연구실로 직행했다. 마침 수석교수는 연구실에서 파이프를 입에 문 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육체 단련 교과 편성을 더 늘려주시길 요청합니다. 수석교수님. 단련을 하루 걸러서 한다니, 이건 그 어떤 기사단에서도 하지 않을 일입니다.”

길모어 교관의 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수석교수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오스왈드 교관 말이 맞을 테니 헛소리 말고 가서 시키는 대로 하게.”

“예?”

당황한 길모어 교관이 되묻자, 수석교수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정 싫으면 오스왈드 교관에게 대련을 신청하게. 만약 자네가 이기고 오면 자네가 하자는 대로 뭐든 다 바꿔 주지.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일세.”

자존심을 긁힌 길모어 교관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 던버른 평원 전투에도 참여했습니다. 실전이라곤 겪지도 못한 교관에게 제가 질 것 같습니까?”

“오….”

에밀 파노이는 이 신입 교관의 패기에 감탄했다. 자존심을 건드렸으니 저렇게 반응하는 것도 딱히 무례는 아니었기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비록 바로운 가문의 기사단이 제법 강력하다지만, 실베르 나이트와 비교하면 적어도 한 단계는 처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실베르 나이트의 정예라 할 수 있는 기사도 필립에게 초살을 당했는데, 저 교관이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건 모를 일이지. 그러니 뭐 알아서 잘 해보게. 이기고 오면 자네 말을 들어 주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길모어 교관은 숨을 거칠게 쉬며 수석교수의 집무실을 나섰다.

* * *

“예? 대련이요?”

필립은 난데없이 대련을 요청하는 길모어 교관을 보며 적잖이 당황했다.

“예. 교관님. 어차피 한동안 같이 일하게 될 텐데, 서로의 실력 정도는 간단히 알아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대련을 제안하는 길모어 교관의 모습에서 필립은 그가 수석교수에게 정말로 다녀왔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아, 그 빌어먹을 노인네가 진짜.’

수석교수가 길모어 교관을 도발한 것이 분명했다. 필립은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으음, 지금은 딱히 내키지 않습니다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검을 섞어 보도록 하죠. 오늘은 참관인이 오는 수업이니 집중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아나 교관이 문득 손을 들었다.

“그러면 잠시 저와 검을 나누시겠습니까? 저기 오스왈드 교관께선 저보다 훨씬 강하시니 저를 통해 어느 정도는 수준을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마침 잘 되었다는 듯 필립이 말을 덧붙였다.

“제가 디아나 교관님보다 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분을 이기시면 저도 잠시 어울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판단했을 때 길모어 교관은 죽었다 깨어나도 디아나를 이길 수 없었다. 그녀는 방학 동안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뭐. 좋습니다. 그 말 꼭 지키셔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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