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 * *
“…오늘은 이렇게 물의 순환에 대해서 알아봤으니, 내일은 흙의 종류와 식물이 어떻게 흙에서 자랄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꾸나.”
하루에 두 시간에 불과한 공부 시간이 끝나자 루아와 카밀라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빗물이랑 바닷물이랑 같은 물이었다니…….”
필립은 훌륭한 이야기꾼이자 교사였다.
어쩌면 카밀라의 가정교사로 고용되었던 학자들보다도 더 박식할 수도 있었다. 검술 교관이라기보다도 인문학 교수에 더 어울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카밀라가 생각할 정도로.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와 타고난 말솜씨는 두 소녀의 눈과 귀를 두 시간 동안 열어 두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마치 동화를 읽어 주는 것처럼 재밌는 이야기를 섞어서, 카밀라나 루아가 이전까지 알고 있던 상식을 부수어놓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 온 카밀라는 처음엔 필립의 설명을 믿지 않았으나, 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가진 지식의 수준과 깊이에 놀랄 뿐이었다.
“우리 이제 뭐 해?”
루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카밀라는 잠깐 고민했다. 할 것도 많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게다가 시간도 많았기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왕궁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즐거웠다.
‘일주일 후에는 더 즐거울까?’
방학이 끝나고, 2학기부터 그녀는 아카데미의 학생이 될 예정이었다. 생에 처음으로 또래 소년 소녀들 사이에 끼어드는 게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아버님께선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최근 아버지인 국왕과 몇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카밀라는 국왕에게서 필립과 최대한 가까이 지내라는 말을 들었다.
‘그건 결국 결혼하라는 거잖아.’
혼인하지 않은 공주에게 사내와 가까이 지내라는 말은 그 사내를 사윗감으로 낙점했다고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카밀라의 언니 두 명 또한 그런 식으로 결혼했고, 지금은 다른 나라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 가문의 후계자와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본래라면 카밀라 또한 몇 년 안에 그렇게 될 터였으나,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니 졸업하는 순간까지는 자유의 몸이 된 셈이었다.
두 사춘기 소녀가 서재를 떠나자 필립은 곧바로 아카데미에서 전달된 서류들을 펼쳤다.
“아. 무슨 교육 과정 개편이야.”
머나먼 과거, 머나먼 어느 곳에서도 비슷한 것들로 고통받았던 기억이 있는 필립은 개편이라는 단어를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계획은 매우 실용적이며 효율적이었기에 있던 불만 또한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학년별로 담당 교수를 배정하는 게 아니라, 과목별로 배정한다고? 이건 좀 괜찮은데.”
양피지 한 뭉치나 되는 서류를 모두 읽은 필립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육체 단련과 검술 이론, 그리고 기초 검술과 고급 검술을 나누어서 가르친다… 나쁘지 않은데. 게다가 고학년부터는 더 다양한 과목을 들을 수도 있고. 마법 학부 또한 마찬가지군. 파괴마법과 환영마법, 그리고 마법 실험을 나누어 놨어. 교수와 교관을 추가로 모집할 예정이기도 하네.’
이렇게 되면 교직원들의 업무가 훨씬 줄어들었다. 이론상 수업을 일주일에 다섯 번만 들어가도 되었으니 남는 시간 동안 수업 준비에 더 힘쓸 수 있었으니 교육의 질 또한 저절로 상승할 것이 뻔했다.
문제는 이번 개편으로 인해 교관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필립이야 안전하겠지만, 마법 학부 교관들은 현재 비상사태일 터였다.
서류의 마지막 장에는 과목을 배정하기 위해 모든 교직원이 아카데미를 방문하라고 적혀 있었다.
날짜는 바로 내일 아침이었다.
* * *
검술 학부의 강의실은 학생들이 아닌 교직원들로 붐볐다. 휴가를 즐기거나 본가에 있던 교관, 그리고 교수들은 난데없는 개편 소식에 이곳으로 소환되었고, 각자 배정된 자리에 앉아 수석교수가 입을 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다들 아카데미의 교육 과정을 개편한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검술 학부의 교직원 재평가는 당연히 수석교수인 에밀 파노이가 담당했다. 그는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이곳에 모인 교관들과 교수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멋대로 과목을 배정하면 자네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테니, 최대한 공정한 방법으로 배정하기 위해 자네들을 재평가할 생각일세. 담당하길 원하는 과목을 쪽지에 써서 제출하면 적합한 능력이 있는지 판단한 뒤 결정하겠네.”
수석교수의 선언에 강의실에 모인 검술 교관들 사이에 잠시 소란이 일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교관님. 조용한 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디아나 파렌할 교관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필립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래서 교관님께선 무슨 과목을 담당하고 싶으십니까?”
오랜만에 만난 디아나 교관은 이전보다 더 차분해지고, 또한 눈빛이 깊어졌다. 필립은 그녀가 고작 몇 주 동안의 수련만으로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저는 하던 대로 하고 싶을 뿐입니다. 사실 1학년과 2학년 시절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기초를 다져 두지 않고 기교에 눈을 돌리면 나중에 큰 손해를 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면 다음 학기부터도 저희는 함께 일할 수 있겠군요.”
디아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의가 가득한 시선이었다.
“그러길 바랄 뿐입니다. 교관님. 교관님께 받은 것들을 조금이나마 갚으려면 그쪽이 편할 테니까요.”
곧 교직원들에게 깃털 펜과 쪽지가 지급되었다. 필립과 디아나는 아무 고민 없이 희망하는 과목을 적어 제출했고, 그것을 받아든 수석교수는 입맛을 다셨다.
“둘 다 기초 검술과 체력 단련을 적어 냈군. 자네들이라면 고급 검술을 담당해도 충분했을 텐데.”
필립은 두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뭐든 기초가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네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고급 검술이나 검술 이론을 담당하는 게 더 좋을 텐데?”
고위 귀족의 휘하로 들어가거나 기사단의 교관 혹은 고문 자리라도 노린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았으나 필립은 시원스레 고개를 저었다.
“별로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평생 잘 먹고 잘 살 겁니다.”
“재수 없는 자식 같으니….”
필립의 대답에 수석교수가 중얼거렸다. 그때 펠리시아가 앞으로 나왔다. 교수 중에는 가장 먼저 일어났기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로 향했다.
“전 기초 검술을 담당할래요. 교수님.”
“그러도록. 하지만 기존과 달리 더 전문적이고 세분화된 방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걸세. 교관들과 의논해 잘 준비하도록.”
“네. 교수님.”
펠리시아가 그렇게 말하자 수석교수는 단번에 허락했다. 어차피 그녀는 교수 중 가장 어렸기에 그녀가 기초 검술 과목을 담당하는 게 옳았다.
시간이 지나자 수석교수의 단상 위에 쪽지가 가득 쌓였다.
하슬란 교수와 컴벨 교수는 각각 고급 검술과 검술 이론을 담당하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하슬란 자네가 고급 검술을 담당하겠다고?”
“예. 교수님. 저는 몇 년 동안이나 고학년 학생들을 담당해 왔고, 유명한 졸업생 또한 많이 배출해내지 않았습니까? 저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수석교수는 하슬란 교수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바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놈들이 잘난 거지 자네가 한 게 뭐가 있나? 자네가 그렇게 잘 가르쳤으면 그 유명한 졸업생이라는 놈들이 뭐라도 싸 들고 찾아왔겠지. 자네, 정말로 자신이 있나? 아카데미가 갑자기 교육 과정을 개편한 이유를 알지 않나.”
“예. 압니다. 교수님. 왕명이 아닙니까? 지원금을 몇 배로 늘리는 대신 교육 수준을 지금보다 더 높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왕궁에서 분기마다 점검을 나온다고도 들었습니다.”
수석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라면 알 거라 생각했지. 자네가 여러 귀족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나 또한 아는 바일세.”
하슬란 교수는 에밀 파노이의 그 태도에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동시에 수석교수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이 염치 없는 사람아.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가진 능력이 없으면 알아서 물러날 줄도 알아야지? 하나만 알려주자면, 학장님은 자네를 해임하도록 지시하셨네.”
“예?”
당황한 하슬란 교수가 눈을 부릅떴다.
“뭘 되묻나? 자네가 신분 높은 학생들에게 이것저것 편의를 봐준 건 다 아는 사실이지 않나? 내가 그간 봐온 정이 있어 교수 직함은 남겨 주려고 했건만, 분수에 맞지 않은 욕심을 부리니 그 정도 무색해지는군.”
수석교수는 깊게 한숨을 내쉰 뒤 출구를 가리켰다.
“나가게. 자네는 해임일세.”
“아니… 교수님.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지금껏 아카데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교수님께서도 잘 알지 않으십니까?”
하슬란 교수는 펄쩍 뛸 듯이 놀라 억울함을 토로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교관이나 교수 중 그 누구도 당황하거나 경악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잘릴 만하지. 뭐.’
하슬란 교수에 대해서 잘 아는 필립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출세하기 위해 물밑으로 벌인 작업 중 몇 가지만 드러났다 해도 교수직을 유지하는 게 말이 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두 번 말하지 않겠네. 나가게.”
수석교수가 엄한 눈으로 노려보자 제풀에 꺾여 버린 하슬란 교수는 이를 바득 갈며 몸을 돌렸다.
‘쯧. 보아하니 무슨 일을 내겠군.’
필립은 그가 보인 원망 섞인 눈빛을 감지하곤 작게 혀를 찼다.
“앤지오 교관, 그리말도 교관, 센티아 교관. 자네들도 다음 학기부터는 아카데미에 있을 수 없으니 짐을 정리하고 떠나도록. 퇴직금은 넉넉히 챙겨 주겠네.”
수석교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교관 몇 명 또한 작별을 고하고 사라졌다.
강의실의 분위기는 침울해졌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 수석교수는 손뼉을 몇 번 쳐 이목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자네들이 해고당한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왜 이런가? 지금보다 더 노력해서 가진 걸 더 늘리면 될 것을. 그럴 자신이 없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당장 나가는 게 좋을 걸세. 이제 자네들에게 새 교수를 소개할 텐데. 그러고 있을 텐가?”
“새 교수님…?”
디아나 교관이 고개를 갸웃했다. 필립 또한 금시초문이라는 듯 펠리시아를 바라보았고, 펠리시아 또한 너는 혹시 뭘 아냐는 표정으로 필립과 눈을 마주쳤다.
“들어오시오. 교수.”
나이가 제법 되는 컴벨 교관에게도 말을 편히 하는 수석교수가 존대로 부르는 모습에 교직원들은 제법 놀라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
‘…어?’
그 인물의 정체를 확인한 필립과 펠리시아는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금발 여인. 그녀가 사실 곧 마흔 살이 된다는 사실은 이 자리에서 필립과 펠리시아밖에 알지 못했다.
바로 멸망한 얼로이 가문의 백작 부인이자, 과거 첫째 공주였던 알테어 얼로이였으니까.
그녀는 허리에 검을 찬 채 수석교수가 서 있는 단상 위로 올라와 살짝 웃어 보였다. 필립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과거 프리비아에게 개처럼 두드려 맞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