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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89화 (89/119)

089화

* * *

“이건 딱히 강요도 아니고, 공식적인 권유도 아닐세. 단지 자네의 의향을 물어볼 뿐. 만일 자네에게 그럴 의향이 있다면 자네의 가문과도 이야기를 나누어 볼 일이고.”

국왕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신사적인 사람이었다. 필립은 그의 태도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표정을 고치고 입을 열었다.

“그, 외람되지만 혹시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음. 자네도 꽤 신중한 성격이군.”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납득이 필요하다면 조금 설명을 덧붙이도록 하지. 스문타나 대공이 카밀라를 원하더군. 후계자의 반려로 왕의 핏줄을 들이고 싶었던 모양일세.”

스문타나 대공이라면 칼라리아 왕국 서부에 위치한 공국의 주인이었다.

계기만 주어진다면 스스로 왕이라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였고, 오러 마스터의 충성 맹세를 받은 주군이기도 했다.

그런 가문의 후계자라면 나름대로 매력적인 결혼 상대일 수도 있겠지만, 필립은 그 가문의 본모습을 알고 있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놈들이지. 미래에 일어날 전쟁에서 가장 먼저 배신해도 이상할 게 없는 놈들이기도 하고.’

원작에선 몇 번이나 마족에게 붙은 집단이었다. 만약 카밀라가 그 가문의 후계자와 결혼하게 되면 아무 잘못도 없는 그녀 또한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될 수도 있었다.

“스문타나 공작 가문에 대해 조금 아나 보군.”

국왕의 날카로운 시선이 필립을 향했다. 그는 대단히 강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총명하지도 않았으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는 것만 같았다.

“잘은 모릅니다만….”

“나는 그들을 잘 알지. 그들은 칼라리아와 결혼으로 이어져 있다고 해서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될 종자가 아닐세. 하지만 자네는 다르지. 칼라리아 태생이고, 오랜 세월 왕가에 충성을 바쳐 온 오스왈드 백작가의 사람이니.”

필립은 그제야 국왕이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얼로이 백작 가문이 멸망한 탓이군.’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얼로이 백작가가 멸망이나 다름없는 꼴을 맞이하자 국왕의 발이 풀린 것이었다.

아직 노인이라 하기엔 젊은 국왕은 10년 후의 미래를 보고 있을 터, 왕실 기사단장이 보증한 재능인 필립을 혈연으로 묶을 작정인 듯했다.

생각을 정리한 필립은 국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왕가에 충성하길 바라십니까?”

국왕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백작은 조금 늙었지.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건 나 같은 사람의 일이고.”

“카밀라 공주는 저와 고작 열흘 남짓을 알고 지냈을 뿐입니다. 제 눈에는 아직 작고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하고 말입니다. 결혼 같은 건 인생에 한 번뿐인 어린 시절을 즐겁게 보내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필립은 그렇게 말하고 국왕의 반응을 살폈다. 그는 필립이 일부러 드러내지 않은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한 듯했다. 그는 헛웃음을 뱉은 뒤 눈을 가늘게 떴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건가?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으나, 자네는 꽤 건방진 면이 있군.”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판단은 조금 뒤로 미뤄 주시기 바랍니다. 폐하. 제가 덴브러 백작님과 검을 섞는 모습을 보신 후에 생각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필립은 이쯤에서 교통정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할 일이 많은 마당에, 정치판에서까지 활동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국왕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을 바라보는 시선이 방금 전보다 조금 엄해졌다.

“그러도록 하지. 내가 실망하도록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 * *

명성 높은 오러 마스터와 아카데미의 교관은 검을 든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덴브러 백작은 대련을 앞둔 필립의 표정이 굉장히 여유롭다는 것을 확인하고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강심장을 타고났군.’

그는 자신의 손자 조프리 덴브러를 떠올렸다. 필립보다는 한 세대 위인 30대 초반으로, 현재 오럼 나이트에서 복무하고 있는 청년.

자신의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찬탄이 나올 수준의 재능이었고, 인성 또한 좋은 편이었다. 만일 마족과의 대대적인 전투가 일어난다면 그의 손자는 역사에 길이 남을 활약을 할 거라고, 늙은 오러 마스터는 생각했다.

그리고 눈앞에 선 저 청년에게도 그의 손자와 비슷한 기세가 흘렀다.

타고난 천재. 하늘이 내린 재능을 보유한 이들만이 보일 수 있는 여유와 집중력이 저 잘난 신체에도 분명히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멀었지.’

“선수를 양보할 테니 뭐든 해 보게.”

백작이 목검을 까딱이며 말하자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그래도 됩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기에 백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기분 나도 잘 알지.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아는 시절이니까. 운이 좋으면 오러 마스터도 어떻게 한번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지.’

덴브러 백작 또한 과거의 천재아로서 저런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는 저 젊은 천재의 심장에 인생의 교훈이라는 놈을 확실히 새길 생각이었다.

‘자, 와 봐라. 녀석아.’

백작이 보이는 여유에 필립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벌써 이걸 시험해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필립은 최근 ‘뇌주’라는 천고의 보물을 직접 다루며 하나의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오러의 통제력이 극한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면 인간의 몸에 번개가 깃들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물론 공기는 전도체가 아니었기에 정말로 번개가 치지는 않겠지만, 오러의 입자라고 할 수 있는 마나를 빛의 속도에 최대한 근접한 빠르기로 움직인다면 비슷한 효과를 낼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시면 잠시만 좀 기다려 주십시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필립은 두 손으로 철검을 잡았다. 정신력을 꽤 소모해 할 수 있는 최대 속도로 오러를 움직이자, 곧 파지직, 소리와 함께 철검 표면에 스파크가 일었다.

그 시점에서 백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 새끼 뭘 하는 거지?’

적어도 마흔 해 동안 검을 수련해 온 덴브러 백작은 필립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당당히 대답할 수 있었다. 대체 오러로 뭘 어떻게 해야 저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선수를 양보한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었으나 그는 오러 마스터이자 왕실 기사단장으로서, 그 이전에 인생의 선배로서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밌는 걸 할 줄 아는군. 이제 들어오겠나?”

단지 여유를 가장하며 억지로 웃는 수밖에 없었다. 필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자세로 검을 들고 있는 덴브러 백작의 약점을 살폈다.

호흡의 간격을 재는 그 행위만으로도 백작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필립의 순수한 검술의 경지 또한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백작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면 저 공격을 사전에 차단할 방법이 수십 가지는 넘었겠으나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잘못하면 국왕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공을 양보한다고 했으니 저걸 피할 수도 없었다. 백작은 필립의 모든 신체 반응을 눈과 귀, 그리고 피부로 읽으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검강이 아닌 검기가 그의 철검을 뒤덮고 있었다.

“흡!”

필립은 백작의 어깨를 노리며 사선으로 검을 베었다. 오러 대신 시퍼런 스파크가 일어나는 철검을 백작은 최대한 완벽히 받아넘기려 했다.

검과 검이 충돌하는 그 순간, 백작은 눈을 부릅떴다.

‘아니, 몸이?’

오러가 흐르는 길이 순식간에 차단되었고, 근육 또한 아주 찰나 간 굳었다. 백작은 하마터면 욕설을 뱉을 뻔했다.

필립이 다음 공격을 이어간다면 그가 질 수도 있었다.

육체의 통제권을 되찾는 그 순간 백작은 필생의 집중력을 발휘해 필립의 추가 공격에 대응하려 했다. 그 수준은 오러 마스터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명백히 필립보다 몇 수는 앞선 경지였다.

그러나 이미 승부는 끝난 뒤였다.

“제가 졌습니다. 백작님. 감사합니다.”

필립은 백작에게서 몇 발자국 멀어져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철검이 들려 있었는데, 시뻘겋게 달아올라 엿가락처럼 늘어져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검으로 싸울 수는 없으니 자연히 덴브러 백작의 승리였다.

“…말한 것치고는 그리 실속 없는 활약상이로군.”

검을 익히긴 했으나 그리 수준이 높지 않은 국왕이 그렇게 평하자 덴브러 백작의 시선이 저절로 국왕을 향해 돌아갔다.

아무리 모시는 주군이라지만, 저런 말을 흘려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무슨 개…죄송합니다. 폐하. 어쨌든, 저 청년이 뭘 한 건지 폐하께선 혹시 아시겠습니까?”

“잘 모르겠소.”

국왕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덴브러 백작은 헛웃음을 뱉은 뒤 고개를 내저었다.

“저 또한 모른다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폐하.”

국왕은 덴브러 백작의 눈에서 경악과 감탄, 그리고 질투를 읽어내곤 눈을 부릅떴다. 저 자존심 높은 오러 마스터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 국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 * *

국왕과 기사단장은 카밀라와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 별장을 나섰다. 잠행을 위해 공수한 마차 속에서, 왕실 기사단장은 국왕에게 말했다.

“폐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패배를 떠올렸습니다. 마흔이 넘은 이후로 단 한 번도 실감하지 못했던 것을, 저 젊은이에게서 말입니다.”

국왕은 문득 의문을 느끼고 물었다.

“백작이 선수를 양보했잖소?”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백작이 대답했다.

“보통 저 나이의 젊은이들에겐 선수를 수백 수천 번 양보한다고 해도 일어나지 않을 일입니다. 폐하.”

“그렇다면 반드시 왕당파로 끌어들여야겠소. 오스왈드 백작을 압박해서라도, 혼인을 반드시 성사시켜야겠지.”

백작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폐하. 이 늙은 몸이 살아 숨 쉬는 동안만큼은 필립 오스왈드를 그대로 두십시오. 소신은 차마 저런 재능을 가진 청년이 역겹고 더러운 오물 구덩이와 같은 정치판에서 썩어가는 꼴을 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사실 국왕이 카밀라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필립을 몰래 따로 만났다.

오러 마스터로서의, 그리고 연장자로서의 자존심을 살짝 꺾은 그는 필립에게 대련 때 뭘 어떻게 한 건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필립은 그를 비웃지 않고 진지한 태도로 천천히 설명했다.

“그 기술에 대해서 알기 위해선 먼저 ‘플라즈마’라는 개념을 아셔야 합니다. 플라즈마라는 건 보통 기체에 섭씨 10만도 이상의 열을 가하면 발생하는데, 당연히 평범한 오러로 그만한 열을 낼 수는 없으니 오러를 가장 작고 사소한 단위로 인식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말하자면 자연 현상을 오러로 흉내를 냈을 뿐이죠. 번개가 치는 원리와, 오로라 같은 자연 현상 말입니다. 원하신다면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백작은 필립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몇 마디 듣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오러 마스터의 의지력조차 뛰어넘은, 거부할 수 없는 잠의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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