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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88화 (88/119)

088화

* * *

나흘 동안 잠들지 못한 필립은 드디어 엘릭서 제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모래시계를 닮은 시험관에 모든 과정을 거쳐 배합된 재료들이 쌓여 있었고, 그걸 거꾸로 뒤집으면 재료의 정수가 한데 모여 한 방울씩 크리스탈 병으로 떨어졌다.

이 정수가 모인 액체가 바로 엘릭서인데, 문제는 불순물이 섞인 액체 방울이 병에 들어가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울 색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즉시 준비된 필터를 이용해 손으로 걸러 줘야만 했다.

“앞으로 48시간 남았습니다. 이틀 동안 눈 깜빡이는 것도 조심하면서 이 빌어먹을 플라스크만 지켜보고 있으면 됩니다. 투명한 색의 방울과, 파란색 방울, 그리고 연두색 방울까지는 괜찮습니다만, 황색이나 적색이 조금이라도 섞인 방울은 안 됩니다.”

“…세상에.”

드래곤마저 기가 질릴 정도의 난이도였다. 말이 그냥 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지, 물방울이 떨어지는 걸 이틀 내내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지켜봐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이 정도는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지 않느냐?”

프리비아의 질문에 필립은 플라스크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안 됩니다. 여기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 남에게 맡겼다가 실수라도 한다면 얼마나 원망스럽겠습니까? 저는 제 일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싶지 않습니다.”

“졸리거나 집중력이 흐려지면 말하거라, 마법이라도 걸어줄 테니.”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순간부터 필립은 플라스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어우.”

필립은 이 세상에 빙의한 이후 처음으로 극도의 피로를 느꼈다.

엘릭서 제조는 체력이나 검술 실력, 재능과는 그리 큰 관련이 없었다. 타고난 의지력과 정신력 또한 재능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으나, 자신의 몸과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필립은 엘릭서가 담긴 병을 든 채 프리비아의 본체가 잠들어 있는 지하 공간으로 향했다.

몸을 말고 잠든 실버 드래곤은 가까이에선 그 크기와 위용에 압도되었으나, 멀리서 보면 뭔가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이거 어디로 먹이면 됩니까…?”

필립은 옆에 선 프리비아를 향해 물었다.

“나는 엘릭서를 해츨링 시절에 한 번 보았다. 드래곤 로드께서 아직 젊은 드래곤이시던 시절, 그분의 보고에 있던 걸 기억할 뿐이지. 엘릭서에 대해서는 네놈이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네놈이 알아서 하거라.”

프리비아의 대답에 필립은 잠깐 고민했다.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좀 거부감이 드실 수 있어서.”

프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필립을 안심시켰다.

“내가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잖느냐? 네 호의에 기대어 몸을 회복하는 처지이거늘.”

“그렇다면 먼저 하나만 묻겠습니다. 드래곤에게도 항문이 있습니까?”

프리비아는 필립의 지식에 대한 감탄과 수치심, 그리고 짜증을 동시에 느꼈다. 체내의 점막을 통해 흡수하는 편이 가장 좋다는 건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인간 사회에선 알려지지 않은 지식이었다.

물론 그건 그거였고, 필립이 조금만 덜 피곤했거나 그의 손에 엘릭서 병이 들려 있지 않았더라면 프리비아의 주먹맛을 봐야 했을 터였다.

“…내…내 꼬리 근처에라도 접근하면 단단히 혼쭐이 날 줄 알아라. 알겠느냐?”

얼굴이 달아오른 그녀의 엄포에 필립은 어쩔 수 없이 본체의 주둥이 쪽으로 향했다. 앞발을 타고 올라가자 곧 색색 숨소리를 내뱉는 콧구멍과 얌전히 다물린 입이 보였다.

“입 벌리십시오. 엘릭서 들어갑니다.”

“잠깐 기다리거라.”

프리비아는 백여 년 만에 본체에 의식을 연결했다. 그녀의 이빨로 만든 현재 몸이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거대한 은룡이 눈을 떴다.

그녀가 입을 쩍 벌리자 필립은 안심했다.

‘입냄새는 안 나는군.’

그는 손에 든 엘릭서 병을 아무 생각 없이 드래곤의 넓은 목구멍 속으로 던졌다. 손바닥만 한 엘릭서 병은 프리비아의 목젖을 때리고 식도 안에 들어갔다.

크리스탈 재질의 병은 드래곤의 소화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부식되었다. 프리비아는 뱃속에 엘릭서가 퍼지는 걸 느끼며 눈을 살짝 감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은룡의 비늘에 천천히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효과 죽이는군.’

―힘이 돌아오는구나. 전성기에 비하면 아직 멀었으나, 한동안 내버려 두면 완전히 돌아올 것 같다.

머릿속에 프리비아의 염화가 울렸다. 곧 은룡의 몸 전체에서 찬란한 은빛이 퍼져 나가더니, 서서히 크기가 줄어들었다.

빛이 사라진 곳엔 십 대 후반쯤 되는 은발 소녀가 실오라기 하나 거치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

“본체로 폴리모프를 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구나.”

그녀는 필립마저 깜짝 놀랄 만큼 대단히 아름다웠다. 고압적인 눈빛과 짜증 넘치는 표정은 그대로였으나, 그걸 제외하고서도 차마 바라보기 힘들 정도였다.

“원래 그런 모습입니까?”

“뭐, 그렇지. 애송아. 나는 지금부터 열흘 정도 몸을 회복해야 하니 네놈도 가서 좀 쉬어라.”

프리비아는 그렇게 말한 뒤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필립에게 기대어 있던 용아병 육체가 꿈틀거리더니 벌떡 일어났다.

눈빛이 조금 흐리멍텅했으나 프리비아의 의식이 들어 있을 때와 비교하면 매우 온건한 표정이었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주인님.”

필립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프리비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본래 용아병의 자아를 깨운 것이다. 내가 저 몸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잠들어 있던 녀석이지. 대단히 복잡한 명령만 아니라면 거의 들을 것이다.”

필립은 그 설명을 듣자마자 용아병에게 지시했다.

“날 업고 내 침실로 좀 가라.”

“예. 지시하신 대로.”

이젠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프리비아가 포탈을 열어주었고, 필립은 용아병에게 업혀 침대에 눕자마자 마치 죽은 것처럼 잠들었다.

* * *

사흘 밤낮 동안 필립은 먹고 자고를 반복했다. 수척해진 얼굴에 생기가 돌아올 때쯤, 별장에 곧 국왕이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호위만 데리고 비밀스럽게 방문하신다고 하니, 오라버니께선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카밀라의 설명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어차피 준비는 하인과 하녀들이 할 터였다. 딱히 국왕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었기에 준비 같은 건 이미 최소한으로 해 둔 상태였다.

“전 집에 갈게요. 교관님!”

“저도요!”

“그래. 너무 늦게 자지 마라.”

집에 놀러 왔던 쟈니스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 걸 느끼고 셰릴과 함께 자기 집으로 도망쳤다.

응접실과 식당의 청소 상태를 확인한 필립은 국왕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고, 서재에 올라가 다음 학기에 쓸 수업 자료를 정리했다.

해 질 무렵, 별장의 정문에 두 사내가 도착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사내와 기골이 장대한 노인 한 명이었다.

필립은 그들의 정체가 국왕 벨로페르 엘세우스 칼라리아 주니어, 그리고 왕실 기사단장이자 오러 마스터인 덴브러 백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극진히 대우할 것을 지시했다.

가진 것 중 가장 품질이 좋고 귀한 포도주와, 크루셀 베이커리에 미리 주문해 놓은 고급 디저트가 응접실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국왕과 백작은 애초에 만찬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은 듯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칼라리아의 수호자이신 국왕 폐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내 자식의 의형제라고 하니 내가 자네를 편히 대하는 걸 이해하게.”

“물론입니다. 폐하.”

응접실에 도달한 중년 사내, 국왕 벨로페르는 예법에 따라 인사하는 필립을 찬찬히 살폈다. 소문과는 달리 침착하고 점잖은 태도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그리 특별한 점이 없었다.

“폐하!”

친아버지를 만난 카밀라가 눈물을 글썽이며 빠른 걸음으로 국왕에게 다가왔다. 국왕은 그녀와 부드럽게 포옹했다.

“보아하니 잘 지내고 있던 모양이구나. 저 청년이 제법 잘 대해 주는 모양이지. 지금은 네 보호자와 대화를 나누어야 하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거라.”

“네, 폐하.”

이때 필립의 시선은 국왕의 호위인 덴브러 백작에게 향해 있었다. 그는 왕의 사돈이었으며, 왕실 기사단장이자 오러 마스터였다.

그는 사나운 눈빛으로 필립을 노려보다가, 헛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하! 폐하. 저 청년에게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하시오.”

왕의 허락을 받은 백작이 필립에게 물었다.

“자네 나이가 몇이라고?”

“스물둘입니다만.”

“내 손자 같은 천재가 여기 또 있었군. 오스왈드 백작이 자네를 꽤 자랑스러워하겠어. 폐하, 이 젊은이는 충분히 저와 한 합을 겨룰 만합니다. 쭉정이 같은 제 부하 놈들보다 훨씬 낫군요.”

“그 정도요?”

국왕은 눈에 이채를 띄운 채 필립을 바라보았다. 왕실 기사단장이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엄격한지 잘 알고 있던 그였기에 저런 평가가 나올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백작님. 그저 제 몸 하나 건사할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필립이 겸양의 말을 뱉자 덴브러 백작은 피식 웃었다.

“대륙이 마족의 손에 떨어지는 날이 온다면 자네 말이 맞게 될 수도 있겠지. 너무 겸손해도 보기 싫으니 적당히 건방지게 구는 편이 좋을 걸세. 그렇지 않으면 온갖 벌레 같은 것들이 달라붙거든. 욕심에 눈이 먼 놈들은 겁이라는 게 없어. 자네가 오러 마스터라고 해도 살점을 뜯어먹기 위해 주변을 날아다니며 웽웽거릴 거라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 또한 아주 잘 알고 있고 경계하고 있는 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왕궁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네와 검을 한번 섞고 싶으니, 준비해 놓도록 하게.”

‘아니, 뭐라고?’

필립은 백작의 선언에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아직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별로 내키지 않았다.

“가…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분위기에서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필립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오랜만에 내 눈에 차는 젊은이를 만나 몸이 달아오르는군.”

다음은 국왕의 차례였다.

“백작이 저렇게 평가하니 내 딸의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이제 첫 번째 용건은 해결되었고, 두 번째 용건을 해결해 보지. 주변을 좀 물려 주게.”

“괜찮으시겠습니까, 폐하?”

필립의 실력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본 백작이 걱정을 담아 물었으나, 국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덴브러 백작은 카밀라를 데리고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주변이 완전히 조용해진 걸 확인한 국왕은 아주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혹시 카밀라와 결혼할 생각이 있나? 가능하다면 올해 안으로 말일세.”

“예? 그게 무슨 ㄱ…말씀이십니까, 폐하?”

하마터면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되물을 뻔했던 필립은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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