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 * *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필립은 나자빠진 도르본 윌오슨의 뒤통수에서 뭔가 빠져나오려 하는 것을 목격했다. 시꺼먼 연기가 뭉친 것처럼 생긴 것이었다.
‘저거 사령이잖아.’
사령은 말 그대로 사령술의 근간이 되는 힘이자 일종의 정령이었다. 거의 모든 사령술사들은 마족과의 계약, 혹은 유적이나 오래된 비밀을 통해 사령과 계약하고, 그 사령을 바탕으로 시체를 일으키거나 저주 따위를 사용할 수 있었다.
말인즉슨 저 사령을 따라가면 이 일을 꾸민 장본인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수준이 아주 높은 사령술사는 아닌 것 같고. 따라간다고 해서 크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지, 차라리 저 사령을 소멸시키는 게 낫나?’
만약 사령을 소멸시킨다면 저 사령의 계약자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사령술을 사용할 수 없을 터였다.
판단의 순간은 아주 짧았다.
필립은 월광검의 묘리를 이용해 검강을 형성하려다 지금 수준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검기를 뽑아냈다. 창백한 색의 오러가 막 시체를 떠나려는 사령을 반으로 정확히 갈랐다.
사령은 차마 소리로 만들어지지 못할 만큼 끔찍하고 역겨운 비명을 있는 대로 지르며 그대로 소멸했고, 정신력이 약한 이네르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히익!”
그녀가 주저앉은 자리에는 고급스러운 카펫이 깔려있었고, 곧 그녀의 엉덩이 아래로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경험한 사령의 공포 앞에서 그녀는 마치 자신이 정말로 숨이 끊어져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고작 열여섯밖에 되지 않은 소녀에겐 너무 무거운 두려움이었다.
필립은 안쓰러움과 짜증, 그리고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이제 네가 뭘 데리고 내 집에 온 건지 알겠니?”
이네르는 대답할 여유가 없는 것처럼 불렀다. 필립은 한숨을 내쉰 뒤 루아를 불렀다.
“루아! 잠깐 이리 내려와 보렴.”
아무것도 모른 채 타니아와 놀고 있던 루아가 필립의 목소리를 듣고 타니아를 품에 안은 채 응접실로 내려왔다. 그녀는 응접실에 벌어진 상황을 살피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있긴 했는데, 이미 끝났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루아의 품에 안긴 타니아가 사령술의 흔적을 느끼곤 털을 바짝 세우며 이빨을 드러냈다. 필립은 사령이 소멸한 자리에 남은 검은색 가루를 챙겼다.
‘이 귀찮은 걸 내가 왜 해?’
아카데미에 상주하는 교수가 몇인데 그가 굳이 사령술사를 쫓을 필요가 없었다. 이 정수만 챙겨서 넘기면 마법사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었다.
“상점가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기사단 본부가 있는 건 알고 있지? 거기 가서, 내가 사령술사의 흔적을 찾아냈다고 알리렴. 그리고 체포할 사람이 한 명 있으니 밧줄을 준비하라고도 전해 주겠니?”
“네! 그런데 저 언니는 괜찮아요? 쉬를… 한 거 같은데… 아니에요?”
“저 애는 큰 잘못을 저질러서 벌을 받아야 하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네! 다녀올게요!”
한 치의 의심조차 없이 달려 나가는 루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필립은 이네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 이네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조금이나마 파악했다.
응접실 바닥에 실례를 했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릴 만큼 그녀는 큰 공포를 느꼈다.
“저…저는…저는 정말로 몰랐어요 교관님!”
필립은 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넌 이미 큰 거짓말을 했다. 네가 몰랐다는 걸 너는 설명할 필요도, 변명할 필요도 없어. 증명해야지. 내가 아니라 기사단과 마탑에 말이야.”
이전 사건에서 만났던 필립과는 전혀 다른 표정과 목소리였다. 다급해진 이네르가 급히 소리쳤다.
“제가 이럴 이유가 없잖아요! 저는 정말 억울하다구요!”
“그래서 내게 뭘 바라는 거냐? 이 일을 알아서 은폐해 달라는 거냐? 만일 정말로 네가 결백하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는 없어. 이곳은 아카데미 근처고, 수많은 학생의 안전이 위협당할 수도 있으니까. 네가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기사단과 마탑 소속 교수님들이 이 사건을 공정하게 수사할 거다. 만약 네가 결백하다면 무사히 끝날 일이지.”
필립은 이네르가 정말로 이 일에 관련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윌오슨 가문은 그에게도 생소했기에, 그 가문 내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한편 이네르는 몸이 달았다. 그녀가 기댈 곳이라곤 오직 이 자리에 있었던 필립뿐이었다.
“결국… 결국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요… 교관님… 네?”
“그건 마침 내게 사령술을 알아볼 안목이 있었기 때문이고, 사령을 제압할 만한 무력이 있기 때문이었지. 그리고 저 사령을 다루는 사령술사가 검술 교관인 나를 너무 얕봤기 때문이기도 해. 그 과정에서 네가 뭘 했지? 이네르 윌오슨?”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판금 흉갑을 입은 기사 한 명이 루아와 함께 도착한 것이었다.
오러 유저답게 재빠른 행동이었다.
기사는 응접실 구석에 널브러진 도르본 윌오슨의 시체와 오줌을 싼 채 주저앉아 있는 이네르, 그리고 필립을 차례대로 살피더니 잠시 숨을 골랐다.
“…안녕하십니까. 교관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그는 신경이 꽤 날카로워진 듯했다. 아무리 대귀족의 아들이라지만 작위도 없는 일개 교관이 기사를 오라가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수고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기사님. 잠깐 이걸 좀 봐주시겠습니까?”
하지만 필립의 태도가 정중했기에 그는 짜증을 숨기곤 필립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는 검은 가루를 확인했다.
“사령술에 대해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사령의 정수’라는 이름의 가루입니다. 형체를 지닌 사령이 소멸할 때 그 자리에 남는 흔적이죠.”
먼저 사령의 정수에 대해 설명한 필립은 응접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기사에게 전달했고, 기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저는 아니에요. 정말 몰랐어요. 정말, 정말이에요. 제발 믿어 주세요!”
이네르는 필사적으로 애걸했지만, 그게 통하기엔 드러난 정황이 너무 명확했다.
사령술사는 시체와 죽음, 그리고 저주를 다루기에 귀족들에겐 끔찍이도 두려운 존재였다.
제아무리 강한 군대와 뛰어난 무력을 보유했다고 하더라도, 출처를 알 수 없는 저주로 인해 병을 얻어 사망한 귀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하러 온 하녀와 하인을 불러 증언을 수집한 기사는 이내 필립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을 체포하는 건 처음이겠군요. 정황이 뚜렷하고, 증언 또한 일치하니 말입니다. 일단 저 소녀의 신병은 기사단으로 인계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는 이네르의 어깨를 세게 붙들고 거칠게 일으켰다. 불쾌한 냄새가 났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단한 밧줄로 손목을 묶으려 하자 이네르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자 기사가 그녀의 옆구리를 무릎으로 찍었다.
“허윽!”
기사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으르렁거리듯 이네르를 위협했다.
“원래 사령술과 관계된 인간은 즉결 처분이 가능하다는 것만 알아 둬라.”
“커흑… 쿨럭… 교관님… 절 정말 이대로 내버려 두실 건가요? 이대로 끌려가면 저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제발…제발요.”
이네르의 애원을 듣던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네르 윌오슨. 내게 뭔가를 바라기 전에 네가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나?”
당황한 이네르가 급히 되물었다.
“…그게 뭔데요?”
그 대답 같지도 않은 말에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조사 잘 받고 가능하다면 무사히 살아서 만나길 바란다.”
* * *
기사가 돌아간 뒤 잠옷 차림의 프리비아가 응접실로 내려왔다.
“무슨 소란이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구나.”
그녀는 바닥에 깔린 고급 카펫에서 올라오는 묘한 냄새 탓에 코를 손가락으로 막을 수밖에 없었다.
“…이곤 또 무슨 냄새냥.”
프리비아의 시선이 마침 옆에 서 있던 루아에게로 향했다. 깜짝 놀란 루아가 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전 아니에요!”
“네가 아니면 저놈이겠느냐?”
프리비아가 그렇게 말하며 필립을 가리키자 루아는 울상을 지으며 프리비아의 팔을 잡고 매달리듯 몸을 기댔다.
“이잉. 정말 아니란 말이에요!”
순간 필립은 기겁했다. 프리비아가 불같이 화를 낼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리비아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팔을 빼내며 루아의 볼을 세게 잡아당길 뿐이었다.
“아니면 아닌 것이지 지금 내게 짜증을 내는 게냐?”
“아…아파요. 마법사 언니.”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는 네 언니가 아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프리비아가 중얼거리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나 보네. 언니는 무슨,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최소로 잡아도 천 살은 넘을 나이 차이였다. 루아의 증조할머니가 세상에 막 태어났을 시절에도 저 드래곤의 나이 앞자리는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루아와 많이 친해지신 모양입니다.”
속마음을 숨기며 필립이 말하자 프리비아는 헛웃음을 뱉은 뒤 고개를 내저었다.
“가만히 쉬고 있는데 저 꼬맹이가 자기만 한 털뭉치를 데리고 내 방을 찾아오더구나. 호통을 쳐서 쫓아낼까 하다가 그럴 기운도 없어 내버려 두었더니 아주 그냥 제 세상인 줄 아는 꼴이 얼마나 얄밉던지.”
‘심심할 때 마침 찾아와 줘서 고맙다는 말이겠군.’
그녀의 말을 대충 해석한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집 센 노인처럼 구는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언니는 제가 싫은 거예요? 제가 뭘 잘못한 거예요?”
루아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묻자 프리비아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 * *
일련의 사건 며칠 후, 필립은 아카데미의 호출을 받았다. 부지 내에 있는 모든 교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호출이었다.
검술 학부 수석교수인 에밀 파노이와, 마법 학부 수석교수를 대리해서 나온 이벨린 교수는 반쯤 되는 교직원들을 회의실에 모은 뒤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밝혔다.
“병신 같은 기사단과 호구 같은 마법사들의 노력과 정성에 힘입어, 부지 내에 나타난 사령술사 수색 작전은 성공적으로 실패했다. 이 개병신들은 염치라는 게 없는 건지 아카데미 측에 전면적인 협조를 요청했고, 학장님께선 그러겠다고 하셨다.”
에밀 파노이의 기분은 매우 저기압이었다. 술, 그리고 담배와 함께 알찬 휴가를 보내고 있던 그는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옆에 서 있는 이벨린 교수는 에밀 파노이에게서 은근히 퍼져 나오는 기세 탓에 숨도 잘 쉬지 못했다.
“따라서 너희는 지금부터 마법 학부 교관 한 명과 검술 학부 교관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아카데미 부지 내부를 샅샅이, 개미 한 마리도 놓치지 않도록 뒤져야 한다. 불만이 있으면 내가 아니라 학장님께 직접 가서 말하고, 아니, 나도 움직여야 하니 그냥 불만 자체를 가지지 마라.”
그렇게 말한 에밀 파노이는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였다.
“뒈지기 싫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