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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83화 (83/119)

083화

* * *

이네르 윌오슨은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귀를 막으면 아주 잠시 동안은 완전한 침묵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잊을 수 있었으나, 그 끝에 찾아오는 건 결국 미칠 것 같은 불안감과 조바심이었다.

‘나 어떻게 해?’

누군가 쥐어뜯는 것처럼 아랫배가 아팠고,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3학년 검술 학부 학생, 차냐 우제추가 측은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러게 평소에 좀 착하게 살았어야지. 이네르.”

그녀는 대륙 북부에 자리한 겔오네스 숲의 소수 민족 출신으로, 옅은 갈색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다. 덩치가 크고 타고난 육체의 힘이 또래 소년들보다도 훨씬 강해 이네르가 함부로 굴지 못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네르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 입 좀! 제발!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이네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으나 차냐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눈을 닫고 귀를 감고…… 아니, 이게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있어 봤자 바뀌는 건 없잖아.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야지. 이네르.”

“네가 뭘 아는데? 내가 어떤 상황인지, 어떤 마음인지 네가 뭘 아냐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잖아. 이네르? 난 애초에 인문학부인 네가 마법 학부인 셰릴을 왜 괴롭혔는지도 모르겠어. 그 아이의 인내심이 조금만 더 형편없었다면 네 허약한 몸뚱이에 화살 불꽃…? 아니, 불꽃 화살인가? 어쨌든 그런 걸 날렸을 것 같은데 말이야.”

차냐의 말에 이네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말로 하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마음 같아선 널 두들겨 패서 찍소리도 못 하게 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지금 네 상황이 너무 안됐잖아.”

이네르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만인 주제에.”

귀가 밝은 차냐는 그 말을 들었지만, 딱히 화내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이네르는 한 주먹이면 배에 든 모든 걸 토해내고 쓰러질 약자였고, 화를 내며 주먹을 든다면 그건 약자를 괴롭히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때 기숙사 방문을 누군가 노크했다.

“이네르 윌오슨. 안에 있니?”

예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차냐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아주 잘 알았다.

“네! 여기 있어요. 오스왈드 교수님.”

여자 기숙사 사감인 펠리시아 오스왈드였다. 차냐 우제추는 바로 작년까지 그녀의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반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어머, 차냐구나. 켐벨 교수님 수업은 잘 듣고 있니?”

오랜만에 마주한 제자를 만나자 펠리시아 또한 활짝 웃으며 그녀와 포옹했다. 차냐 우제추가 그녀보다 한 뼘 반은 더 키가 컸기에 마치 그녀가 안긴 듯한 그림이 그려졌다.

“네. 교수님. 다 덕분이에요. 교수님께서 절 관리… 관측… 아니, 단속… 배려? 맞아, 배려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3학년이 되지 못했을걸요!”

“그, 그래. 알겠으니 이것 좀 놓아주렴.”

차냐의 흉부에 머리를 파묻힌 펠리시아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밀어냈다.

‘분명히 1학년 때는 나보다 작았는데….’

차냐의 흉부와 자신의 흉부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던 펠리시아는 잠깐 서러운 표정을 지은 뒤 이네르 윌오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네가 이네르 윌오슨이니?”

“네… 그런데요?”

이네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펠리시아는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네 삼촌이라는 분께서 널 방문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찾아오셨거든. 친척 중에 도르본 윌오슨이라는 분이 계셔?”

“…도르본 삼촌이요?”

이네르는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놀랐다. 그녀가 아주 어릴 적 가문에서 쫓겨났던 삼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그만큼 놀라웠던 탓이었다.

* * *

“도르본 삼촌?”

“오랜만이구나. 내 작은 고양이!”

중앙 광장의 카페테라스에 들른 그들은 간단한 포옹을 나누었다.

도르본 윌오슨은 이네르의 기억 속의 그와 그리 바뀌지 않았다. 면도하지 않은 얼굴은 수염으로 덥수룩했으며, 포옹할 때 엉덩이를 받치는 것도 똑같았다.

까만 로브를 입은 그의 몸에서는 조금 불쾌한 흙냄새 같은 것이 났다. 그러나 이네르는 과거 도르본이 얼마나 자신을 예뻐했는지 잘 알았기에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사 달라고 하는 건 뭐든 사 주었고, 해달라고 하는 건 거의 다 해 주었다. 그녀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고작 그의 무릎에 앉아 애교를 부리는 것뿐이었다.

“…삼촌은 가문에서 쫓겨나셨잖아요?”

“그랬었지. 길이 좀 맞지 않아서였고, 딱히 가문에 원한 같은 건 없단다. 이제 팔 년 정도 되었나? 그땐 네가 내 키의 반도 되지 않았는데, 이젠 제법 숙녀라고 부를 만하구나.”

“감사해요, 삼촌. 그래서 어떻게 지내셨어요?”

도르본 윌오슨은 조카의 질문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꽤 긴 이야기가 될 거다. 가문을 떠난 뒤로 나는 마법을 익혔단다. 내가 사랑하는 조카에게 뭔가 어려움이 생겼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해 줄 만큼은 성공했다고 봐야겠지.”

깜짝 놀란 이네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떻게 아신 거죠? 벌써 소문이 그렇게까지 퍼졌나요?”

도르본 윌오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웃었다.

“네 안색을 보고 말한 건데, 정말로 뭔가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구나. 이 삼촌이 뭔가 도울 수도 있으니, 한번 털어놔 보려무나.”

“이걸 삼촌이 안다고 해서 뭔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이네르, 사랑스러운 조카야.”

잠깐 고민하던 이네르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팔 년 만에 만난 삼촌에게 카밀라와 셰릴, 그리고 센도르 뷔센과 얽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도르본 윌오슨은 조카의 머리에 손을 얹은 뒤 마치 주문을 외우듯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래? 제법 큰일이구나. 공주 같은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건지 모르겠군. 하지만, 그거라면 내가 도울 수 있겠구나.”

그의 눈동자에 흉험한 빛이 잠깐 번득였으나, 이네르는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 그 교관이라는 사람을 만나보자꾸나. 잘 이야기하면 해결될지도 모를 일이니까.”

* * *

훈련을 위해 뒷마당에 나온 필립은 네리아를 들고 검강을 시전했다. 검기와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강력한 흐름이 검신을 휘감자 필립은 묘한 고양감을 느꼈다.

―와주인님너무대단해요세상에그나이에오러마스터의경지에오르다니주인님의대단함에네리아는가슴이뛰고숨이거칠어지고머리가어질어질하고막그런거있죠비록완전하지는않지만조금만시간이지나면수석교수라는사람보다도훨씬강해지실게분명해요세상에서제일멋진주인님사랑해요쪽쪽!

“으악!”

필립은 급히 네리아를 놓고 귀를 틀어막았다. 오랜만에 들은 네리아의 무호흡 칭찬 탓에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꺅! 아, 주인니임!

“아, 미안하다.”

필립은 네리아를 다시 주워 손에 들었다.

―계속 검강을 뽑아내시길래 이렇게 칭찬해주길 바라시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아니면 아니라고 말을 하지 왜 사람을 던지고 그러세요?

네리아의 말을 듣고 있던 필립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넌 검이잖아? 검은 좀 던질 수도 있는 거 아니니?”

―듣고 보니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단 말이에요. 게다가 그냥 던진 것도 아니고 내동댕이치셨잖아요.

“내동댕이쳤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조금 놀라서 떨어트린 것뿐인데.”

―다음부터는 조심해 주세요. 전 섬세한 검이라고요.

실없는 대화를 마친 필립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오랜만에 개인 훈련 시간을 가지니 뭔가 검술 실력이 부쩍 는 기분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리 늘지 않았다고 해도.

―저기 꼬맹이가 와요. 주인님.

네리아가 루아의 등장을 알렸다. 필립은 물병을 들고 다가오는 루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이니?”

“손님이 오셨대요, 교관님!”

“손님?”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문이 예정된 손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가까운 사람이 방문했다면 루아가 단지 손님이라고 말할 리가 없었다.

‘음?’

문득 느껴진 불길한 기운에 필립은 응접실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애송아. 사령술사가 네 집에 들어왔구나. 어떻게 할 테냐?

프리비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 덕에 필립은 자신이 느낀 이 불길한 기운의 정체가 흑마법의 그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령술사라고? 흑마법사?’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손님의 정체가 사령술사라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죽여야지. 뭐.’

필립은 네리아를 허리에 찬 채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예식용 로브를 입은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사내가 필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내는 정중한 태도로 집주인인 필립에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의 옆에는 이전에 보았던 이네르 윌오슨이 달라붙어 쭈뼛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 필립 오스왈드 교관님 되십니까? 이렇게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제 이름은 도르본 윌오슨이고, 이네르 윌오슨의 삼촌 되는 사람입니다.”

사내에게 가까워지자 필립은 부패의 기운을 느꼈다. 짙고 끈적하고, 더러운 마나였다.

“아, 예. 반갑습니다. 어쩐 일로 방문하셨는지?”

“집안 어른 되는 사람으로서, 어린 조카의 어려움을 넘어갈 수 없겠더군요. 괜찮다면 조금 이야기를 나누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건을 정리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제가 하나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윌오슨 씨?”

“물론입니다. 교관님.”

도르본 윌오슨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사람 사는 도시에 온 겁니까? 당신 사령술사잖아요. 갑자기 사는 게 지겨워지기라도 한 겁니까?”

필립의 말이 끝나는 순간 도르본 윌오슨의 눈이 까맣게 물들었다. 흰자라곤 보이지 않는 시꺼먼 시선을 마주한 필립은 음울한 마나가 자신을 침범하려고 드는 것을 느꼈다.

강력한 저주 마법이었다.

그러나 그 마법이 필립의 살갗을 뚫기도 전에 필립의 검이 먼저 움직였다.

도르본 윌오슨의 목이 떨어진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

이네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상황을 깨달은 그녀는 입을 있는 대로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삼촌!”

필립은 한숨을 내쉬며 검 끝으로 목을 잃고 쓰러진 도르본 윌오슨을 가리켰다. 목이 잘렸음에도 그의 몸에선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았다.

“저건 네 삼촌이 아니다. 이네르 윌오슨. 시체를 이어붙여 만든 가짜 몸이지. 네 삼촌은 아마 이미 죽었을 거다.”

이네르는 필립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방금 제 삼촌을 죽이셨잖아요?”

“글쎄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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