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화
* * *
카밀라는 공주였다.
그런 귀한 신분의 여인은 보통 밖에 잘 나다니지 못한다. 어쩌다 왕궁 밖으로 나가더라도, 숨이 막힐 정도로 삼엄한 호위 속에서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게 전부였다.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하다못해 변소에서 볼일을 볼 때마저도 누군가의 호위를 받아야만 했다. 적어도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왕궁을 떠날 때까지는.
이야기책에 나오는 것처럼 실력 좋은 검사가 평생을 바쳐 공주를 호위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그녀의 호위 또한 몇 번은 바뀌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번 호위는 그녀가 만난 호위 중 가장 귀여운 존재였다.
“먀아아옹.”
작고, 까맣고, 사랑스러운 고양이.
까만색이라 처음에는 조금 무서웠으나, 새끼고양이 특유의 귀여운 울음소리 덕에 경계심은 금방 풀렸다.
‘내가 없는 동안 이 아이가 네 곁에 머물며 널 지켜 줄 거다.’
이 조그만 생명을 공주의 호위랍시고 붙여 둔 필립이 외적인 용무로 자리를 비운 이때, 카밀라의 일상은 무척이나 단조로웠으나 꽤 행복한 것이었다.
“귀여워.”
침대에 누운 그녀의 몸 위로 고양이 타니아가 올라와 몸을 말고 누웠다.
사실 이 조그만 게 호위 같은 걸 할 수 있지는 않을 것이었으나,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예 쓸모가 없지는 않았다.
성격은 또 얼마나 좋은지 어딜 어떻게 만져도 딱히 싫어하진 않았고, 정말로 자기가 호위무사라도 되는 줄 아는지 어딜 가든 따라왔다.
뒷발로 자기 턱을 긁던 타니아가 갑자기 카밀라의 흉부를 딛고 일어서더니, 그녀의 잠옷 바지에 코를 대고 킁킁대기 시작했다.
“…얘가?”
부끄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기에 카밀라는 타니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먀옹.”
까끌까끌한 분홍색 혀가 작은 주둥이 사이로 삐져나와 카밀라의 코와 입술을 핥았다.
카밀라는 타니아가 마음대로 하도록 잠깐 내버려 두다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타니아의 얼굴에 뽀뽀 세례를 가하기 시작했다.
“에잇! 쪽! 쪽!”
“먀아아옹!”
타니아는 질색하며 앞발을 휘둘렀으나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공주님. 안에 계세요?”
그렇게 한동안 타니아와 장난을 치던 카밀라는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하자 깜짝 놀라 타니아를 내려놓았다.
“셰릴… 셰릴 선배님인가요?”
“네. 공주님.”
“어, 어서 들어오세요.”
“네에.”
셰릴은 필립의 부탁을 받아 별장에 들리곤 했다. 사흘에 한 번은 근로 장학생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도서관을 관리해야 했으나 그날을 제외하곤 거의 매일 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같은 학년의 친구들은 죄다 본가로 돌아가 버렸고, 쟈니스도 오빠인 캐슬러를 따라 여행을 떠나 버렸다.
다행히 카밀라는 소심한 성격인 셰릴을 포용할 만큼 성숙했기에 두 소녀는 일주일 동안 꽤 친해질 수 있었다.
“공주님. 교관님께서 오늘 안에 돌아오신다고 연락하셨어요.”
셰릴이 전한 기쁜 소식에 카밀라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는 것 없이 고양이와 노닥거리는 일상도 마음에 들기는 했으나, 그녀의 본래 목적은 필립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야옹?”
침대에 앉아 있던 타니아 또한 귀를 쫑긋 세우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어머, 교관님이 오신다니까 너도 좋니?”
“먀옹.”
타니아는 셰릴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무릎을 앞발로 눌렀다. 그게 안아 달라는 신호라는 걸 셰릴은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타니아를 품에 안았다.
“저녁 식사는 함께하자고 하시는 걸 보니, 오후 늦게나 되어야 돌아오실 모양이에요.”
“시간이 좀 남네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카밀라는 은근한 목소리로 셰릴에게 제안했다.
“그러면 잠깐 산책 삼아 상점가에 나가 보는 건 어때요?”
외출이 자유로운 환경을 처음 겪었기에, 별장 밖으로 나가는 건 마치 금기를 어기는 듯한 스릴과 쾌감을 카밀라에게 선사했다.
“그럴까요? 저도 좋아요. 공주님.”
셰릴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그녀가 나가길 원한다면 함께 나가도 좋다고 이미 언질을 주었기에 딱히 부담감도 없었다.
‘…설마 이 근처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겠어?’
* * *
어린 소녀들에게 간식을 오물거리며 수다를 떠는 것만큼 시간이 빨리 가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 독서라는 취미를 공유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그녀들이 향한 곳은 크루셀 베이커리였다. 용돈을 두둑이 받았으니 셰릴이 평소 침을 흘리며 지나가기만 했던 이곳에 자주 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엘루엠이 귀족들 앞에서 나는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는 장면 기억하세요?”
“네. 기억해요. 처음 그 대목을 읽을 때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몰라요.”
창가 테라스에 앉아 최근 젊은 여성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여기사 엘루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곧 초대한 적 없는 이의 방문을 받았다.
“너 셰릴이지? 도둑질이라도 한 거야? 무슨 돈이 생겨서 여기 온 거니?”
셰릴과 같은 학년인 이네르 윌오슨이었다. 그녀는 칼라리아 서부 시골의 남작 가문 딸이었는데, 셰릴과는 그리 접점이 없었다.
같은 마법 학부임에도 그리 친하지도, 반갑지도 않은 학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셰릴은 종종 저 여자아이와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마다 보였던 비웃음 섞인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못한 처지인 사람을 보며 만족을 느끼는 부류.
이네르 윌오슨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농담을 건넬 만큼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셰릴은 본능적으로 눈을 깔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이죽거리는 이네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어머, 기분이 나빴니? 미안해. 당연히 농담이었지. 물론 네 친구인 쟈니스 무르엘라가 용돈을 준 거겠지? 용돈을 주고받는 게 과연 친구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마주치니까 괜히 반갑고 그렇다. 너도 그렇지?”
가만히 옆에서 듣고 있던 카밀라가 저건 뭐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저 소녀는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데 특출난 재주를 지닌 것만 같았다.
괜히 끼어드는 건 셰릴에게 실례가 될 수 있었기에, 카밀라는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 욕구를 눌러 참았다.
셰릴 또한 화가 치밀었으나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내가 싫니? 이네르? 그래서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들고 싶은 거야?”
이네르 윌오슨은 셰릴의 질문을 비웃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너를? 싫어해? 그럴 리가 있니? 네가 뭐라고 내가 싫어하기까지 해야 하는 거야? 그냥 주제도 모르는 평민 계집애가 귀족들과 어울린답시고 까부는 게 그냥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야. 그냥 좀 눈에 거슬리는 정도?”
마음이 여린 셰릴은 그녀의 폭언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카밀라는 이젠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고 느꼈다. 비록 알게 된 기간은 짧았지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이가 거의 없는 카밀라에게 셰릴은 친구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열등감을 표출하시는 일이 끝나셨다면, 이만 돌아가 주시겠어요? 개인적인 시간을 방해받아서 그런지 제 기분까지 좀 나빠지려고 하네요.”
셰릴과 함께 있던 한참 앳된 소녀가 나서자 이네르 윌오슨은 고개를 갸웃했다. 카밀라는 화려한 외출복 대신 사이즈가 비슷한 루아의 옷을 입었기에 특별한 신분의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외모가 평범하지 않아 귀한 집 자식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넌 뭐니?”
“셰릴 선배님의 동아리 후배요. 죄송하지만 더는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당신처럼 저열한 사람과는 말을 섞지 말라고 아버님께서 당부하셨거든요.”
“…동아리 후배?”
이네르 윌오슨은 셰릴이 속한 여행 동아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곧 그 동아리에 평민 출신의 1학년이 있다는 걸 기억해 낸 그녀는 이를 바득 갈며 눈을 치떴다.
“네가 그 루아인가 뭔가 하는 비천한 계집애구나? 너도 오스왈드 가문의 후원을 받으니 눈에 뵈는 게 없니? 착각하지 마. 필립 오스왈드 교관이 정말 순수한 선의로 널 거뒀을 것 같니? 아직은 어리니까 잘 모르겠지만, 몇 년만 지나면…….”
곧 이네르의 입에서 정숙한 귀족 아가씨라면 결코 입에 올려선 안 되는 외설스러운 행위들이 마치 방언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들을 듣고 있던 카밀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딱히 수치스러워서가 아니라 저 선배 소녀의 말에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험담을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카밀라가 분노를 누르며 묻자 이네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소식에 밝은 귀족이라면 필립 오스왈드에 대해서 모르진 않을걸? 너야 부정하고 싶겠지. 그 교관이 왜 요즘 조용한지 알아? 어린 소녀들은 조금만 잘 대해 주면 금방 경계가 풀리거든. 그걸 노리고 그러는 거야. 실제로 봐. 그 교관과 친하게 지내는 쟈니스 같은 애들을 보라구.”
생명의 은인인 필립까지 언급되자 셰릴의 이마에 혈관이 솟았다.
“교관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이네르… 그것만은 용서할 수 없어.”
“어머, 너도 그 교관에게 반했니? 으음… 하긴 네가 못난 얼굴은 아니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 하찮은 평민의 몸이라도 귀족과 그리 다르지는 않으니까.”
셰릴은 화가 너무 난 나머지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경험을 해야 했다. 태어나 이렇게 화가 난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쟈니스와 친해지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쟈니스가 상대도 해주지 않으니까 나한테 화풀이하는 거잖아? 아무리 윌오슨 가문에서 최근에 광산 투자에 실패해서 망하기 직전이라지만 너무 속 보이는 접근 아니었어? 그 애뿐만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부유하고 권세 높은 가문 출신의 아이들 거의 모두에게 접근했지?”
“…뭐?”
“도서관에 있다 보면 많은 소문을 들을 수 있거든? 지금 네가 사귀는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도. 5학년 센도르 뷔건 선배님. 저번에 도서관에 함께 와서 몰래 키스했잖아. 그것보다 더한 것도 했고. 내가 못 들었을 것 같아?”
“내…내가 언제?”
당황한 이네르가 소리쳤다. 크루셀 베이커리는 텅 빈 상태가 아니었기에, 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적어도 졸업할 때까지는 소문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또 누군가가 소란이 일어난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빵만 사고 금방 돌아온다더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그 누군가의 얼굴을 본 이네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센도르 오라버니… 쟤…쟤들이 갑자기 절 붙잡더니 오라버니랑 사귀는 걸 들키기 싫으면 자기들 말을 들으라고 해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빛보다 빠른 태세 전환에 카밀라는 감탄했다. 이네르의 남자친구인 센도르 뷔센은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며 카밀라와 셰릴을 노려보았다.
“니들 뭐야? 응? 겁도 없이 상점가 한복판에서 착한 애를 괴롭혀? 선배로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겠는데? 당장 따라 나와.”
그는 평민인 게 확실한 셰릴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붙들었다.
“꺅!”
그 순간 카밀라가 벌떡 일어서 센도르의 뺨을 후렸다. 짝, 하는 살갗끼리 부딪는 소리와 함께 센도르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선배 몸에 손까지 대고. 너희는 단단히 혼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