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화
* * *
“…뭘 하려고 하는지는 알 것 같은데, 엘프들의 정기를 흡수해서 뭘 하려던 거지?”
널브러진 엘프들을 대충 챙긴 필립은 몽마에게 질문했다. 드러난 정황이 너무 뚜렷했기에 델루안이 이런 곳을 만든 이유만 알면 될 것 같았다.
“저야 잘 모르겠지만,그 나이의 여자가 할 걱정이라곤 뻔하죠. 늙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겠어요? 몽마가 모은 정기는 피부에 바르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더해 주니까요.”
필립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늙는 게 싫다 하더라도 목을 내걸고 이런 짓을 벌일 만큼 멍청한 사람이 과연 유세프 상회의 지부장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저, 전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얼굴이 하얗게 변한 조럼이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이단심문관에게 말할 일이지. 난 이 일을 그리 깊게 파고들고 싶진 않은데.”
이건 필립의 진심이었다. 델루안이 뭘 꾸미고 있었던, 필립은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델루안이 당할 형벌이 교수형이 아니라 화형으로 변하는 것만 알면 되었다.
“일단 너희 둘은 날 따라와라.”
필립은 몽마와 조럼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들과 함께 응접실로 가서 델루안 유세프를 직접 마주할 생각이었다.
‘후작이 알아서 하겠지. 뭐.’
* * *
“변하는 건 없어요. 소론도의 귀족분들은 여전히 제 편이고, 재판이 열린다고 해도 저는 무혐의로 풀려날 거예요. 아시다시피, 저야말로 현재 유세프 상회의 후계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아니겠어요? 상회가 가진 영향력이 워낙 크다 보니 이런 일도 종종 생기곤 하죠.”
한편 델루안 유세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캐슬러 무르엘라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델루안 유세프는 자신을 귀족들과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듯 보였다. 명예와 가문에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게 바로 귀족들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술, 혹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해서 같은 사람은 아니라는 게 캐슬러의 생각이었다.
그건 그가 딱히 신분을 중요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그가 귀족으로서 살아온 경험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델루안이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면 캐슬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맞았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건가?’
이 상황을 벗어날 방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면 저렇게 나올 수가 없었다.
“당신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관계 또한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델루안 양. 무르엘라 가문은 당신을 먼저 배신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캐슬러는 일단 델루안을 안심시켰다.
“그래 주신다면 저는 무르엘라 후작 가문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겠어요.”
델루안은 조금 안도한 기색을 내비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응접실의 문이 제멋대로 열렸다. 분명히 문을 잠그라고 지시했던 델루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들어온 사람을 본 델루안이 표정을 관리했다. 캐슬러 무르엘라의 제자라고 소개받았던 청년이었다. 물론 그 정체는 필립이었다.
필립은 그녀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던 캐슬러와 신시아에게 말했다.
“캐슬러 님. 신시아 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 끝났으니 돌아갑시다.”
필립이 뭔가 소득을 올렸다는 걸 알아차린 캐슬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이 의미 없는 시간이 끝났다는 걸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곧 필립의 뒤를 따라 들어온 두 인물을 보곤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머리 사내 한 명과 머리에 뿔이 나고 날개가 달린 여자가 하나였다.
“이 상회 건물 지하실에서 몽마를 한 마리 발견했습니다. 게다가 납치된 엘프 열 명 정도도 같이 있더군요. 이걸로 끝났으니 돌아갑시다.”
캐슬러는 곧 몽마의 고혹적인 시선을 느꼈다. 악마의 모습을 조금 닮은 그 마족은 캐슬러의 정신력을 시험하겠다는 듯 붉게 빛나는 눈으로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려 시도했고, 그 행동은 옆에 앉아 있던 신시아 무르엘라의 심기를 아주 크게 건드렸다.
“이 빌어먹을 악마 계집이 감히 누굴 쳐다봐?”
“어…어…? 꺄아아악!”
신시아 무르엘라는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곧바로 몽마의 왼쪽 뿔을 붙들었다.
곧 그녀의 몸 전체가 푸른 오러로 뒤덮였고, 필립은 한때 유명했다던 여검사의 실력을 아주 약간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아아악! 잠깐만요!! 아아아아악!”
몽마의 뿔은 마치 오래된 티눈이 뽑혀 나오듯 뿌리까지 뜯겨 버렸다. 그 끔찍한 광경을 마주한 필립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여보? 잠깐 진정해 봐요!”
캐슬러 또한 필립처럼 멍하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 듯 신시아의 허리를 붙들었다.
“어? 어머….”
제정신이 돌아온 신시아는 멍한 표정으로 자신이 일으킨 참상을 확인했다.
“어머, 죄송해서 어쩌죠? 갑자기 화가 치밀어서 그만….”
‘화를 두 번 냈다간 이 건물이 날아갔겠군.’
필립은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정색했다간 관계가 좀 틀어질지도 몰랐다.
“괜찮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보다 이제 몸을 움직일 시간입니다.”
그는 열린 응접실 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도망친 델루안 유세프를 잡아야 하니까요.”
방금 일어난 소란을 틈타 델루안 유세프가 응접실 문을 박차고 도망친 것이었다.
물론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델루안 유세프가 오러 마스터거나 대현자 수준의 마법사가 아닌 한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는 없을 터였다.
델루안은 딱히 검술이나 마법 같은 걸 익히지 않았다. 작정하고 붙는다면 리즈리엘과의 싸움에서도 질 터였다.
* * *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이거 놓으세요.”
델루안 유세프는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신시아 무르엘라의 손에 붙잡혔다. 그녀는 태어나 처음으로 단단한 밧줄에 묶인 채 영주성으로 호송되어야 했다.
그녀는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려 했으나, 은근히 드러난 공포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필립은 그녀를 무시한 채 캐슬러에게 말했다.
“베론체 후작님께 연락해 주세요. 이건 후작님 선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교회 측에도 협조를 구해야 합니다.”
“예. 그러죠. 저 또한 이런 귀찮은 일에 엮일 생각은 없으니 어서 각하께 떠넘기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분이라면 알아서 잘 해결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캐슬러와 필립의 의견이 일치했다.
“…날 이렇게 대하면, 여러분은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예요. 제 신병이 후작님께 인도된다고 하더라도 제가 끝날 것 같나요?”
델루안이 입술을 깨물며 협박 섞인 말을 했음에도 그녀를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제 말이 들리지 않나요? 지금 저는 당신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를 견디지 못한 필립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며칠 뒤에 죽을 사람과 이야기하는 취미는 없으니까 입 좀 다물지 그래요? 우리를 설득할 시간에 지난 삶을 반성하거나 사후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그 말이 델루안의 어떤 트리거를 건드렸는지, 델루안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내가 뭘 알고 있는지 안다면, 당신은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거에요! 누구도 이 도시에서 날 죽일 수 없어요. 그게 설령 후작 각하라도! 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사히 성을 빠져나갈 테고, 당신들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아, 그러시든지.”
필립은 델루안을 묶은 밧줄을 잡아당겼다.
영주성에 들어선 필립은 베론체 후작과 곧바로 만날 수 있었다. 후작은 증거를 가져오라고 보냈던 필립이 당사자를 직접 끌고 오자 눈을 비비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내 말을 좀 잘못 이해한 게 아닌가? 재판을 열 테니 증거를 찾아오라고 했을 텐데.”
“증거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이 여자의 목을 치셔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필립은 베론체 후작에게 자신이 상회 지부에서 찾아낸 것들을 보고했다. 모든 사실을 들은 베론체 후작은 어떤 의미로 크게 감탄했다.
“상회 후계자 경쟁에 후작가를 끌어들이길래, 제정신이 아닐 것 같다곤 생각했지. 그런데 상회 건물에 엘프 노예를 납치해 가두고, 게다가 몽마까지? 미쳐도 보통 미친 게 아니군.”
후작은 델루안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비틀어 잡고 당겼다. 두피가 당겨지는 고통에 델루안은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조소 섞인 눈빛으로 후작을 노려보았다.
“후작 각하. 요즘 부인께서 좀 아름다워지시지 않았나요? 조금… 젊어진 느낌이 든다거나 말이에요. 제가 몽마를 이용해서 모은 정기가 어디에 쓰였을 것 같나요?”
후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몽마를 사로잡아 정기를 모으는 건 이십 년 전에는 자주 있던 일이었지. 그래 봤자 엉덩이 무거운 귀부인들 낯짝에나 바를 화장품으로 쓰지 않았겠나? 거기 내 마누라도 끼어 있고? 물론 그 사실이 퍼져나간다면 꽤 곤란해지겠지만, 과연 소문이 퍼지기나 할지는 모르겠군. 그대는 마지막 순간에 내뱉을 그럴싸한 유언이나 생각해 놓고 있게.”
필립은 후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에게 있어 여론 통제만큼이나 쉬운 일은 없었다. 오래전부터 곪아 있던 문제가 아니라 이런 단발성의 사건 같은 건 얼마든지 묻어버릴 수 있는 게 귀족의 힘이었다.
물론 델루안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미 그녀는 붙잡힌 상황이었다.
“모레 정도에 매달면 되겠군. 다들 고생했네. 원하는 보상이 있다면 말하게.”
후작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탁자에 올려진 술잔을 집어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보상 같은 건 괜찮습니다.”
필립의 대답에 후작은 껄껄 웃었다.
“내 억지에 어울려 준 대가라고 생각해도 되고,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네. 이렇게 빠르게 내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었으니 대귀족 체면에 뭐라도 하나 줘야 하지 않겠나?”
잠깐 고민하던 필립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편한 마차를 몇 대 받고 싶습니다만. 일행 중에 환자가 좀 있어서 안정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마차?”
마차도 제법 비싼 물건임엔 분명했지만, 가문의 명예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받을 보상으로는 조금 많이 모자랐다. 베론체 후작은 이 젊고 겸손한 귀족을 위해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망나니처럼 살다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것이 그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좋겠군.’
후작은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불렀다.
“이 젊은이에게 그걸 내어주게.”
후작이 그것이라고 부를 만한 물건은 하나밖에 없었기에 늙은 집사는 깜짝 놀라며 불경하게도 주인의 지시를 되묻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걸 말입니까?”
“이 사람도 참 놀라기는. 보아하니 아직 젊지만, 주변에 여인이 많은 것을 보니 그것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일세.”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