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 * *
“자, 이제 손을 놓겠습니다.”
필립이 하녀의 입을 가린 손을 치우자 하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렇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으나 아직 어려서 그런지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누구세요…?”
“델루안 유세프를 조사하기 위해 베론체 후작 각하께서 파견한 조사관이란다.”
필립은 하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편하게 말했다. 그의 대답에 하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어요. 주인마님께서 무슨 짓을 저지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러고도 남을 분이거든요.”
하녀의 말에 필립은 어이가 없어졌다.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니, 대체 평소에 어떤 행동을 하길래 한참 아랫사람인 하녀에게마저 저런 평가를 받는 것일까.
“평소에 너를 좀 괴롭히니?”
“…네.”
하녀는 말없이 자신의 치마를 들추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돌렸던 필립은 하녀의 다리와 허벅지가 매질한 자국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인상을 찌푸렸다.
최근에도 회초리 따위로 매질을 당했는지 피멍으로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를 이렇게 때린다고? 자기 나이의 반도 살지 않았을 텐데.’
“마님께선 보통 직접 매를 드세요. 사소한 잘못도 놓치는 법이 없으시죠. 아무리 울어도 용서해 주시지 않아요….”
하녀는 그녀의 부친이 유세프 상회에 빚을 많이 진 탓에 도망칠 수도 없다고 증언했다.
―아니, 저 조그만 애가 잘못하면 뭐 얼마나 잘못했다고 저렇게까지 때렸대요? 그 델루안이라는 여자 정신이 나간 거 아녜요?
네리아마저 울분을 토할 정도였다.
“주인마님이 망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도울게요.”
하녀는 필립의 작업에 협조하기로 했고, 필립은 그녀와 함께 델루안의 사무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몇 분 정도 수색했으나 특별한 뭔가가 나오지는 않았다.
“아마 찾으시는 건 지하실에 있을 것 같아요. 주인마님께선 종종 혼자 지하실에 내려가곤 하시거든요. 이 지부에서 지하실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주인마님과 경호원인 조럼뿐이에요.”
“지하실이라고?”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원작을 플레이할 때 물론 델루안 유세프가 상회의 주인이 되는 루트 또한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잔혹하고 이기적이었으나, 딱히 뭔가 거대한 비밀이 있는 여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너는 이 길로 이곳을 나서서, 영주성으로 가렴. 그곳에서 필립 오스왈드가 보냈다고 말하면 널 돌봐줄 거다. 네 아버지의 빚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난데없이 내려온 구원의 손길에 하녀는 감격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필립은 그녀를 안심시킨 뒤 그녀와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조럼이라는 경호원은 어디에 있는지 아니?”
“이 시간이면 주방 근처에서 하녀 언니들을 희롱하고 있을 거예요. 그 언니들도 저처럼 가족의 빚 때문에 억지로 일하고 있어서….”
그렇다면 딱히 신사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없었다. 필립은 하녀를 다독여 내보낸 뒤 더는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뚜벅뚜벅 걸었다.
사람의 심리란 참 이상한 것이었다.
분명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거리낄 것 없이 자연스럽게 걷자 아무도 그가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는지 묻는 법이 없었다.
지부 소속의 상인들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필립을 한 번 보더니, 그의 평온한 눈과 마주치자 시선을 피했다.
―이럴 거면 벽을 타고 오를 필요가 없었던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필립은 괜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하녀가 말한 주방 쪽으로 향했다. 점심 전이라 그런지 주방은 한창 분주했는데, 그곳과 어울리지 않는 대머리 사내 하나가 식사 준비를 하는 하녀들을 거리낄 것 없이 추행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날 무시할 수 있나 보자고. 응? 어허, 수프를 더 열심히 저어야 하지 않겠어? 싱겁기라도 하면 단단히 혼쭐이 날 텐데.”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하녀는 수프가 끓고 있는 냄비를 젓고 있었다. 대머리 사내는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어 그녀의 둔부를 어루만졌는데, 하녀는 치욕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제발, 조럼. 그만 하세요. 전 곧 결혼할 몸이에요. 당신도 알잖아요?”
“그 사내구실도 하지 못하는 쭉정이보다야 내가 훨씬 낫지 않겠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꿔 먹는 게 어때? 솔직히, 결혼한다고 해서 내가 널 가만히 둘 것 같지는 않은데.”
그 행패를 지켜보던 필립은 자신이 조럼이라는 이름의 경호원을 기억하고 있는지 잠깐 회상하다가, 이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보통 유세프 상회 에피소드로 접어드는 시기가 3년 차였으니 그 전에 죽는다는 이야기였다.
필립은 천천히 다가가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당신이 조럼인가?”
경호원 조럼은 몸을 돌려 필립을 바라보았다.
“엥? 댁은 뉘신데 날 부르시오?”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당신 직장을 없애려고 온 사람이지. 그쪽 하기에 따라서 그쪽 인생을 끝낼 수도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뭐라는 거야?”
조럼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주먹을 들어 올렸다. 필립은 그가 뭘 하려고 하기도 전에 즉시 그의 왼쪽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커억!”
조럼은 숨이 멈추는 충격과 고통을 느끼며 몸을 숙였고. 필립은 그의 허벅지를 몇 대 걷어찬 뒤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주방은 정적에 휩싸였고 수프가 끓는 소리만이 들렸다. 필립은 주변을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식사 준비는 멈추셔도 됩니다. 오늘 점심식사는 취소되었으니까요.”
“헉… 허윽… 뭐야… 누군데? 당신 누군데?”
조럼이 고통을 호소하는 듯한 표정으로 필립의 정체를 물었다. 필립은 대답하지 않고 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인적이 드문 구석으로 간 필립은 조럼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인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조럼의 커다란 몸이 무너졌다.
“아아악! 씨발! 대체 뭐냐니까? 뭘 원하는지 말은 하고 패야 할 것 아냐?”
악에 받친 목소리로 조럼이 소리를 지르자 필립은 몸을 숙여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지하실을 좀 구경하고 싶은데.”
“지하실? 거긴 왜?”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대답은?”
딱히 죽을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았기에 필립은 그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몇 달 정도 운신을 하지 못할 만큼 팰 의향은 있었다.
“거기 외부인을 데려갔다간 델루안 유세프가 날 죽일 거다. 물론 너도 마찬가지고. 유세프 상회에 대해 모르지는 않겠지?”
조럼은 일단 필립을 협박했다. 그러나 필립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래서 싫다는 건가? 그러면 일단 널 죽이고 들어갈 방법을 찾아야겠군.”
필립은 검을 뽑았다. 조럼 또한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고, 그 또한 유세프 직계의 호위를 맡을 만큼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실력자였으나 그는 필립에게서 거대한 벽을 느꼈다. 용병 출신인 그는 강자를 알아보는 눈만큼은 뛰어났다.
‘대체 뭐 하는 새끼인지는 몰라도 함부로 까불었다간 죽겠는데.’
“자, 잠깐. 싫다는 게 아니고. 거기서 뭘 찾든 저와는 관계가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거야 보면 알겠지. 안내하도록.”
* * *
필립은 조럼의 안내에 따라 지하실로 향했다. 몇 개의 잠금장치가 단단한 철문을 지키고 있었으나, 조럼의 허리춤에 매달린 열쇠 꾸러미로 해결되었다.
“저, 정말로 이곳에 있은 그 어떤 것도 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믿어 주시겠습니까?”
조럼은 식은땀을 흘리며 필립의 눈치를 살폈다.
“입 다물고 횃불이나 들도록.”
“예에….”
단순한 지하 창고가 아닌 듯 계단으로 몇 미터를 내려가자 마치 지하 던전처럼 꾸며진 공간이 나타났다. 그렇게 넓지는 않은 탓에 복도를 따라서 걷자 곧 막다른 골목과 문이 나타났다.
“열어.”
조럼이 필립의 말에 따라 그 문을 열자, 지독한 악취가 필립의 코를 찔렀다.
내부를 확인한 필립은 곧 경악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이건… 대체?”
―꺄아악! 주인님, 저게 다 뭐에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 열 명 정도가 혼이 나간 표정으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고, 그들 가운데 사슬로 묶인 여인 한 명이 붉게 빛나는 눈으로 필립을 응시했다.
나체로 쓰러져 있는 남녀는 귀가 길쭉했고, 인간보다 훨씬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으나 뼈가 살가죽 너머로 드러날 만큼 비쩍 말랐다. 볼도 움푹 들어가 마치 며칠 동안 굶고 제대로 쉬지 못한 이들처럼 보였다.
―…엘프잖아요. 주인님? 맞죠?
네리아의 말대로 그들은 엘프였다. 그러나 사슬에 묶인 여인만은 달랐다.
머리에 양의 그것과 같은 뿔이 달렸고, 어깨에는 박쥐의 그것과 비슷한 날개가 달렸다. 피부는 회색에 가까웠고, 필립은 그 특징들을 모두 지닌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저건 몽마로군.”
필립은 조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사슬에 묶인 몽마를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기에 필립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봐, 조럼. 유세프 상회의 건물 아래에 왜 몽마가 있는지 당장 설명하지 않으면 네가 곤란해질 것 같은데. 세상에 존재하는 고문 중 대부분을 직접 경험한 뒤 결국 불타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
조럼은 필립의 목소리가 평온하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다, 당신은 어째서 멀쩡하지?”
“체질상 독이나 정신 공격 같은 게 좀 효과가 없더라고. 그것보다 설명하기 싫나?”
“4년 전에 지부장이 어디서 데려왔는데, 저걸로 뭘 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전 그냥 엘프 노예를 잡아다 여기 집어넣는 일만 담당할 뿐이란 말입니다.”
그 말은 사실인 듯 보였다. 필립은 천천히 사슬에 묶인 몽마에게로 다가갔다.
“흐응… 그 앙칼진 계집애가 아니라 잘생긴 오빠가 왔네? 오라버니. 나랑 재밌게 놀까? 이 사슬을 좀 풀어주면, 오빠가 꿈꾸는 모든 걸 해줄 수도 있어.”
몽마는 필립을 유혹하려 들었다. 필립은 건성으로 되물었다.
“어제 사슬에 묶인 몽마 한 마리가 마족으로 태어난 자신을 저주하며 혀를 깨물고 죽는 꿈을 꿨는데, 그것도 혹시 이뤄줄 수 있을까?”
몽마는 필립의 반응에 자존심이 상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필립을 노려보았다.
“…오빠한테는 내 마안이 효과가 없구나?”
“잘 아네. 개수작 부리지 말고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털어놔 봐.”
몽마에게는 딱히 전투에 관련된 능력이 없었기에 그녀의 목숨은 필립의 손에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지하게 성인 남성과 격투를 벌여도 평범한 몽마는 개처럼 두드려 맞을 것이었다.
단지 날개가 달려 있으니 그렇게 되기 전 도망칠 뿐.
“밝히고 나면 날 어떻게 하려구?”
“협조만 잘해주면 죽이지는 않을 테니, 얌전히 털어놓는 게 좋을걸.”
‘프리비아에게 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
지루한 용생을 살아가는 프리비아에게 아주 좋은 장난감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필립은 오랜만에 월광검을 시전했다. 창백한 달빛을 닮은 오러가 네리아의 검신을 타고 피어나자, 몽마, 서큐버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서, 설마 그 끔찍한 걸로 내 아름다운 몸을 건드릴 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 줘. 아니… 제발, 뭐든 할게요. 제발요! 멍! 멍!”
시키기도 전에 개처럼 짖는 몽마를 보며 필립은 인상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