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7화
* * *
필립과 일행은 곧바로 반나절 거리인 소론도 도시의 영주성으로 안내되었다. 꽤 큰 도시의 주인답게 소론도는 부유했고, 도시의 주인인 베론체 후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행 중 후작을 공적으로 만날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필립과 캐슬러, 그리고 그의 부인인 신시아 정도였다. 쟈니스는 너무 어렸고, 귀족이 아닌 리즈리엘과 루아는 애초에 논외였다.
하지만 베론체 후작은 용병과 짐꾼을 제외한 일행 모두를 응접실로 초대했다.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연장자인 캐슬러 무르엘라가 대표로 나서서 인사했다.
“오랜만일세. 부친께선 잘 지내시는가?”
후작의 질문에 캐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에 들어가신 지 이 년 정도 되셨으니, 아마 잘 지내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후작은 캐슬러의 부친이자 대현자라 불리는 헬시언 무르엘라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분께선 여전하신가 보군.”
“언젠가 죽어야 한다면 마법 실험을 하다가 죽고 말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분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분이셨지. 그래. 필립 오스왈드. 자네 부친께선 요즘 어떠신가?”
필립은 본가에 대한 소식을 전혀 알지 못했기에 솔직히 대답했다.
“못 뵌 지 좀 되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게 오히려 희소식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잘 아는 속담을 조금 인용해 본 필립은 후작이 눈에 이채를 띄우며 그를 바라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래?’
한편 필립의 대답에서 어느 정도 관록과 여유를 느낀 후작은 그의 예상대로 망나니로 소문난 필립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 또한 젊은 시절엔 쾌남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기 때문에 사나이에겐 어느 정도 방황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필립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거기 아리따운 아가씨들도 내게 소개해 줄 수 있겠나?”
필립과 캐슬러에게 쟈니스와 루아를 비롯한 일행을 소개받은 후작은 곧 본론을 꺼냈다.
“사실, 자네들 덕에 내 명예가 지켜질 수 있었지. 고작 상인에게 놀아난 후작이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그 자리에 마침 필립 자네가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죽고 난 뒤에도 손가락질을 당했을 걸세.”
그 말을 듣던 리즈리엘의 표정이 굳었다. 후작이 말하는 ‘고작 상인’이 아무래도 그녀의 친언니인 만큼, 후작이 그녀에게 앙심을 품는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 상인 계집은 합당한 벌을 받아야만 해. 그러기 위해선 자네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초대한 것이지.”
“저희가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별 건 아닐세. 델루안 유세프 그 계집이 교수대에 매달릴 수 있도록 증거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만 하면 그만일세. 자네들은 유세프 상회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으니 내 기사들보다는 더 잘할 수 있겠지. 물론 제대로 된 보상도 있을 것이고, 그쪽 유세프 아가씨는 염치가 있다면 날 도와야 하지 않겠나?”
“옳으신 말이세요. 후작님. 마땅히 도와드려야죠.”
리즈리엘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델루안 유세프는 단순히 상회 소속의 상인이 아닌 상회주의 직계 혈족이자 계승권을 지닌 여자였기에, 그녀의 행동은 상회 측에서 책임을 져야만 했다.
“교수대 같은 살벌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혹시 아이들은 좀 다른 곳으로 보내도 되겠습니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필립이 후작에게 질문했다. 후작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필립을 바라보았고, 필립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화를 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후작은 곧 필립의 직업이 교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무례한 부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는 게 좋겠군. 내 아들과 딸이 아이들의 말상대를 해줄 걸세. 마침 나이도 열다섯에 열둘이니 어쩌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겠지.”
후작은 집사장을 호출해 루아와 쟈니스를 자신의 아들딸에게로 보낸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사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유세프 상회의 소론도 지부를 불태우고 싶은 마음일세. 십 년만 더 젊었더라도 분명 그리했겠지. 하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뒷감당을 하는 게 꽤 귀찮아졌다는 말일세. 하지만 만약 그 계집을 교수대에 매달지 못한다면 정말로 불을 지를지도 모를 일이고.”
이건 숫제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리즈리엘은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자, 보다 못한 캐슬러가 나섰다.
“아무도 다치거나 죽지 않았잖습니까? 굳이 교수대까지 보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자네 또한 무르엘라의 자식이니 알지 않는가? 이건 가문의 명예가 달린 일일세. 내가 무력을 동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많이 참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하네.”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필립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그냥 넘겼다간 베론체 후작 가문이 유세프 상회의 돈 앞에 굴복했다는 소문이 돌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빌어먹을 언니….’
리즈리엘은 이를 갈았다. 델루안 유세프는 꽤 똑똑한 여자였고, 그녀는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리라는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적당히 뛰어난 사람의 전형적인 실수라 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돕도록 하죠.”
필립은 어쩔 수 없이 후작의 제안을 수락했다. 아무래도 소론도 지부가 불탄다면 리즈리엘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몇 움큼 정도는 빠질 것만 같았다.
친구를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내버려 두긴 양심에 찔렸다.
* * *
“일단 계획을 짜 봅시다. 후작이 원하는 건 델루안을 교수대로 보낼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직인이 찍힌 편지라던지, 물질적인 증거 말입니다.”
팔자에도 없는 탐정 일을 하게 된 필립이 신시아와 리즈리엘, 그리고 캐슬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게 과연 존재하는지 확인하려면 델루안 유세프에게 먼저 가까이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립의 머릿속에는 이미 어느 정도 계획이 짜여 있었다.
‘사실 코너에 몰려 있는 건 델루안이니, 우리 쪽에선 일단 찌르고 반응을 보면 그만이긴 해.’
잠깐 고민하던 필립은 캐슬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캐슬러 님과 신시아 님이 조금 고생해 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이 길로 바로 델루안을 찾아가서 그녀를 불러내십시오. 그동안 제가 그녀의 사무실을 뒤져보겠습니다.”
프리비아의 도움을 받으면 쉽겠지만, 그녀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제가 뭐라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보통 궁지에 몰린 사람은 자신에게 남은 걸 필사적으로 지키려 듭니다. 만약 캐슬러 님이 아직 그녀를 등지지 않았다고 판단한다면 캐슬러 님께 매달리겠죠. 무르엘라 가문의 지지를 얻으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으니까요.”
캐슬러는 필립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설득되는 척을 하면 되겠군요. 알겠습니다.”
“저도 옆에서 도울게요. 교관님.”
신시아 무르엘라 또한 얼마든지 돕겠다는 듯 소매를 걷어붙였다.
“저는 뭘 하면 되나요?”
리즈리엘이 묻자 필립은 손가락에 낀 황금 반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수도에 연락해야지. 황금 인장을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고. 그리고 델루안 유세프가 황금 인장의 주인을 함정에 빠트려 죽이려 했다고 말이야.”
“…딸꾹.”
화들짝 놀란 리즈리엘이 딸꾹질을 시작했다.
“지…지금 시점에서요…?”
“지금이 제일 알맞지 않나? 상회에서 만약 이 소식을 접하게 되면 델루안 유세프에게 신경이나 쓸까?”
“…딸꾹…아마…아니겠죠? 괜찮은 계획이네요. 원래는 이 일을 해결한 이후에 밝힐 생각이었지만….”
리즈리엘은 필립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들 움직입시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으니 말입니다.”
필립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만큼은 모두가 같았다.
* * *
델루안 유세프는 캐슬러의 호출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다급히 지부로 달려왔다. 캐슬러의 제자 중 한 명으로 변장한 필립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정갈하게 묶은 은발머리에, 차갑고 매서운 눈매.
필립이 기억하기로 그녀는 안하무인에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는 이기적인 성격이었으나, 캐슬러 무르엘라를 앞에 둔 그녀는 애교 많은 고양이처럼 굴었다.
“델루안. 우리는 방금 베론체 후작님께 다녀오는 길입니다.”
“각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캐슬러는 그답지 않게 차가운 눈으로 델루안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델루안 유세프에게는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녀는 당황을 숨기지도 못하고 캐슬러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당신이 각하와 각하의 명령으로 조직된 토벌대를 후계 경쟁에 이용하려 했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그, 그건 오해예요. 각하께서 단단히 오해하고 계신 겁니다. 저 같은 상인이 어찌 감히 그런 일을 벌이겠어요?”
“각하의 기수이신 세티안 경이 말하기를, 토벌대의 일원 중 한 명이 이미 자백했다고 하던데.”
캐슬러의 말을 신시아가 거들었다.
“저도 들었어요. 델루안. 나는 당신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당신은 우리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건가요?”
델루안 유세프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사실은,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전말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답니다. 이건 누군가가 절 모함하기 위해 파 놓은 함정이에요. 두 분께서 본 저는 그럴 사람이던가요?”
캐슬러는 꽤 훌륭한 연기자였다. 그는 필립마저 감탄할 만큼 수준 높은 연기력을 선보였다.
그는 당장 뭘 할 생각은 없지만 의심을 거두지는 않겠다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마법 같은 건 없으니, 당신이 웃는 낯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는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급해진 델루안이 맹세의 말과 함께 캐슬러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 모든 걸 걸고, 저는 결코 그런 일을 꾸미지 않았어요. 두 분께선 절 믿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껏 무르엘라 가문에 바친 노력과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저를 외면하지 말아 주세요.”
델루안 또한 배우를 해도 될 만큼 연기가 뛰어났다. 올해 스물아홉인 그녀는 나이보다 좀 어려 보였고, 조금 차갑지만 가녀린 외모의 소유자였다.
“크흠….”
그녀가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하자 캐슬러는 어느 정도 마음이 풀린 척 침음을 내었다. 신시아는 뭔가를 참는 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 뭔가가 웃음이라는 건 뻔한 일이었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지켜보던 필립이 캐슬러에게 물었다.
“스승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까?”
“그럴 것 같구나. 올리버. 너는 미리 돌아가 있거라. 저녁 식사 전에는 돌아가겠다.”
“예. 그러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한 필립은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이쯤이면 델루안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캐슬러를 설득하는 데 열중할 것이었다.
그는 소론도 지부를 나오자마자 벽을 타고 옥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델루안의 사무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그녀의 발소리로 대충 알아낸 뒤였다.
―…별일을 다 하시네요. 주인님.
벽에 매달린 필립은 네리아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조용히 해.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들키면 주인님이 들키지 네리아가 들키지는 않을 것 같아요.
“…….”
필립은 마치 한 마리의 거미처럼 은밀히 벽을 타고 올랐다. 위를 보며 걷는 사람은 드물었기에, 아직 낮이었음에도 그를 본 사람은 없는 듯했다.
델루안의 사무실로 추측되는 방의 창문은 잠겨 있었다. 필립은 손가락에 오러의 칼날을 만들어 내어 잠금장치를 잘라내고 들어섰다.
“…누, 누구세요?”
마침 청소 중이던 하녀 한 명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필립은 다급히 그녀에게 접근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잠깐만 조용히 하세요. 볼일만 보고 금방 나가겠습니다.”
하녀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공포에 질린 나머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루아 또래로 보이는 어린 하녀였다.
필립은 자유로운 손으로 로브의 모자를 걷어 얼굴을 보였다. 필립의 얼굴을 보자마자 하녀의 경계심이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절대 당신을 해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조용히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끄덕끄덕끄덕.
하녀는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