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 * *
“경. 방금 한 보고가 사실인가?”
베론체 후작은 도시 소론도의 주인이었다. 소론도는 남부와 중부를 잇는 도개교 역할을 하는 도시로써, 중부의 다른 도시와 비교해 밀리지 않는 튼튼한 성과 훌륭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건 베론체 후작이 이 일대의 왕이나 다름없다는 걸 의미했다. 올해로 마흔넷이 된 그는 젊은 시절 전장을 휩쓴 탓에 꽤 불같은 성격이었으나, 나이가 어느 정도 든 지금은 그 성질이 많이 죽어 제법 좋은 영주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후작의 기수 발보어 세티안은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예. 각하. 불미스러운 보고를 드리게 되어 송구합니다.”
그의 보고를 들은 후작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적당히 살 만큼 살다 보니 별일도 다 보는군. 제아무리 대륙에서 이름 높은 상회라고 해도 그렇지, 고작 상인 무리 따위가 귀족을 속이려 드는 게 말이나 되는 건가?”
“그 자리에 필립 오스왈드가 있지 않았다면, 저는 꼼짝없이 그들을 체포해야 했을 겁니다.”
세티안은 그렇게 말했다. 정확히는 캐슬러 무르엘라가 필립을 보증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했을 테지만, 그것까지는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보다 의외군. 오스왈드 백작가의 망나니가 캐슬러 무르엘라 같은 인재와 알고 지내는 사이라니.”
“무르엘라 가문의 막내 영애가 아카데미 3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사고에서 그 아가씨의 목숨을 한 번 구한 적이 있던 것 같더군요.”
“무르엘라 가문은 사람을 가려 사귀기로 유명하지. 영애의 목숨을 구했다고 해서 직접 신분을 보증하고 나서는 건 그 가문의 방식이 아니야. 아마 그 망나니도 어린것들을 가르치며 뭔가 느낀 게 있었겠지. 그보다 그 캘버라는 놈은 자백했나?”
후작의 질문에 세티안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델루안 유세프의 사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정황도 그렇고, 증언도 그렇고, 델루안 유세프가 후계 경쟁에 저희를 끌어들인 게 확실합니다.”
베론체 후작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봐도 그렇다. 경, 나는 지금 매우 화가 난다. 자네도 알다시피 내 젊은 시절은 그리 평온하지만은 않았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더군. 화를 내고 검을 휘두르는 건 영지를 경영하는 데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다는 사실을.”
작게 한숨을 내쉰 후작은 세티안 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젊은 시절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내가 어떻게 했겠는가?”
세티안 경은 큰 고민 없이 대답했다.
“지금 당장 소론도의 유세프 상회 지부로 병사들을 끌고 직접 가셨을 겁니다. 그리고 귀족을 모욕한 죄로 델루안 유세프를 교수대에 직접 매다셨겠죠.”
후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겠지.”
후작의 기수는 깜짝 놀라 주군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렇게 하실 겁니까?”
“상인들이 멍청한 귀족들을 등쳐먹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게 그놈들 본성이거든. 만일 그 델루안 유세프라는 계집이 내게 금화 천 개를 뜯어냈다고 하면 나는 그녀에게 분노할지언정 목을 매달려고는 하지 않았을 걸세. 그냥 빌어먹을 년에게 당했다고 넘어갔을 테지. 그런데 그 계집은 금화가 아니라 내 체면과 권력을 이용하려고 들었어.”
그 말을 들은 세티안은 후작이 델루안 유세프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주군에게 최소한의 충고를 하는 건 봉신의 의무이기도 했다.
“유세프 상회는 대륙의 경제에 깊게 뿌리박은 거대 상회입니다. 이런 식으로 척을 졌다가는 향후 영지 운영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후작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 알 바 아닐세. 자네는 병사를 몇 이끌고 엘페니아 숲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필립 오스왈드와 리즈리엘 유세프가 나오거든 그들을 데리고 내게로 오도록. 감히 후계 싸움에 귀족을 끌어들인 대가는 치러야 하겠지.”
“…예. 그러겠습니다.”
기수인 발보어 세티안이 집무실을 나서자, 후작은 손에 잡히는 물건을 집었다.
“빌어먹을 상인 계집이 감히 날 엿먹이려 들어?”
하필 그 물건은 잉크 병이었다. 후작은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며 그것을 집어던졌다. 잉크 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책장에 부딪혔고, 병이 깨지며 내용물이 책을 더럽혔다.
* * *
엘페니아 숲을 떠날 채비를 마친 뒤, 필립은 캐슬러 무르엘라에게 붙들렸다.
그는 필립을 은인으로 여기기로 결심한 듯했다. 필립을 대하는 태도가 존중에서 존경으로 바뀐 그는 꽤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어 필립을 괴롭혔다.
“교관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안 갚으셔도 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얼마나 귀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신다면 교관님께서도 그렇게 말하지 못하실 겁니다. 교관님께서는 제 세상을 바꾸셨습니다.”
머리가 아파진 필립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변명했다.
“제가 딱히 대단한 뭔가를 전한 건 아닙니다. 단지 마법사들이 생각하는 현상에 대한 개념을 조금 벗어난 말을 했을 뿐인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건 오로지 캐슬러 님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필립의 말에 캐슬러 무르엘라는 감동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교관님께서는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귀찮아 죽겠네.’
그때 엘프 측과 다음 거래에 대한 의논하러 사라졌던 리즈리엘이 돌아왔다. 그녀는 커다란 보따리를 낑낑대며 끌고 왔는데, 그 내용물은 대부분 세계수의 열매로 담근 술과 품질 좋은 정령석이었다.
“이게 다 뭐야?”
“엘프 장로님께서 당신하고 그 마법사님께 드리라는데요. 악령 문제를 해결해 줘서 고맙다고요.”
근육을 쓴 탓에 어깨가 뻐근해진 리즈리엘이 울상을 지으며 보따리를 필립에게 내밀었다. 중하급에서 상급 정도 되는 정령석들이 한 보따리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거 나도 고맙다고 해야겠는데.”
“바쁜 일이 있어서 마중을 나가지 못하는 걸 이해해 달라던데요. 아무튼, 이제 저희도 슬슬 출발해야 해요. 소론도에 들러서 언니와 관련된 일을 처리해야 하거든요.”
필립은 리즈리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네 언니는 일찍 치워둘수록 이득이니까. 이번 일로 확인했는데, 피를 보는 걸 전혀 꺼려하지 않더군.”
“자기 이득을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사실 지금은 애초에 이겨 놓고 싸우는 거라 상관없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언니가 판 함정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걸요.”
엘프 사냥의 누명을 씌우려고 든 건 제법 창의적인 함정이었다. 결백이야 금방 밝혀질 테고, 아마도 총관이라는 사람이 버림패로 쓰여 처형당했겠으나 엘프와의 약속에 늦어진다는 것 자체가 큰 잘못이 될 것이었다.
책임은 리즈리엘이 져야 했을 테고, 엘페니아 숲의 엘프들과 거래할 권리는 아마 델루안에게 넘어갔을 터였다.
그건 리즈리엘의 몰락을 의미했다.
일행은 마차에 짐을 실었다. 거래 자체가 상단의 물품으로 엘프의 미스릴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짐마차 두 대가 더 비었다.
“여기에는 그 용병들을 태우면 되겠군.”
약속한 야영지에 포로로 잡아 둔 습격자 용병들을 이 마차에 태워 호송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델루안 유세프를 공격할 때 좋은 무기가 되어 줄 터였다.
“네가 정말 그리울 거야. 루아.”
“…나도, 나도야. 루리엘… 훌쩍.”
현지에서 친해진 엘프 소녀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던 루아가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던 필립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히이잉….”
“네가 하루만 더 있자고 조른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괜찮니?”
필립이 루아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일정상 하루 정도는 이곳에서 더 머무를 수 있었고, 딱히 엘페니아 숲이 싫은 건 아니었기에 삼림욕을 즐긴다 해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타니아랑 카밀라 공주님한테 빨리 돌아온다고 약속했는걸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잖아요.”
“착하기도 해라.”
약속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냥 인사에 불과한 몇 마디조차 지키려 드는 그녀를 보며 필립은 마음이 좀 무거워졌다. 조금 약삭빠르게, 편하게 살아도 좋으련만 저게 그녀의 타고난 본성이라는 건 필립이 더 잘 알았다.
“다들 출발합시다. 다음 목적지는 도시 소론도입니다. 따뜻한 목욕물과 시원한 맥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가는 게 예의겠지요.”
필립의 말에 일행들은 짐꾼들과 용병들이 대기하고 있는 야영지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아직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시체를 치우고, 핏자국을 파묻었으나 완전히 지우는 건 전문가가 투입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용병대장 버틈은 마치 필립을 오래 모신 병사처럼 굴었다. 그는 허리를 땅에 닿을 것처럼 숙이며 부상이 다 낫지 않았음에도 일행이 운반한 짐을 마차에 실으려 했다.
자신들이 할 일을 빼앗긴 짐꾼들이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다쳤으니 쉬고 계시죠. 마침 짐마차가 좀 비니까, 부상을 당한 분들은 마차에 타고 가면 되겠군요. 도시에 도착하는 대로 상처를 봐 줄 사람을 구해 보겠습니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버틈은 크게 감격해 눈물까지 글썽였다. 필립은 그가 살면서 본 귀족 중 가장 귀족다운 사람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리즈리엘이 필립의 귓가에 속삭였다.
“…용병들에게 그리 잘해 줄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 때문에 싸우다 다쳤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저들이 싸워서 시간을 끌어준 덕에 마차와 짐꾼들이 무사한 거 아니야? 저들이 아니었다면 우린 거래를 마치고도 마차를 수배할 때까지 발이 묶였을 거야.”
“그러라고 돈을 주고 고용한 건데….”
“스무 명을 상대로 저 정도 버텼으면 돈값 이상은 한 거지. 저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필립의 말에 리즈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제 생각이 짧았네요. 도시에 도착하는 대로 유능한 치료사를 구해야겠어요.”
짐을 싣고, 야영지를 습격했던 용병들을 묶어 마차에 태우는 작업은 금방 끝났다.
그렇게 야영지를 빠져나온 일행은 곧 근처에서 순찰하고 있던 발보어 세티안과 마주쳤다. 무장한 채 말에 탄 세티안은 후작의 깃발을 올리며 일행을 맞이했다.
“베론체 후작 각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각하의 성으로 초대합니다.”
그들은 마흔 명도 넘는 병사와 기사 셋을 이끌고 왔기에 리즈리엘은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상인인 그녀에겐 저 기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능력이 없었다.
“…각하께서요?”
필립이 그녀 대신 앞으로 나섰다. 세티안 경은 투구를 벗고 말에서 내려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필립은 그가 단순히 일행을 방문할 목적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이끌고 온 부대의 숫자는 일종의 성의였다.
기수인 세티안 경과 기사를 포함한 병사 거의 오십 명을 보내어 데려올 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