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5화
* * *
“흡!”
검기를 쓸 줄 아는 검사답게 비스트로는 필립의 발차기를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뒤로 몇 걸음 물러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필립의 상태를 살폈다.
‘만티코어의 꼬리에서 채취한 독인데 왜 멀쩡하지?’
필립은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고 싶었으나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왜 독이 안 통하냐는 듯한 표정인데, 저도 이유를 모르니 물어보지 마시고…그쪽이 용병 쪽에서 제법 유명해 보이길래 뭘 하나 좀 보려고 했더니,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진짜 싸움을 운운하는 겁니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작 저런 기술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어느 정도 완성된 진짜 검객에게는 이빨도 박히지 않을 법한 속임수들.
속임수 자체의 완성도는 제법 높다고 해도 상상력이 너무 빈곤했다. 디아나 파렌할도 저런 수엔 당하지 않을 터였다.
“고작? 지금 고작이라고?”
비스트로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싸움에서 독이나 속임수를 쓰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그러면서 잘난 체를 하는 건 참기 힘든데요. 사검이 별명이라길래 뱀처럼 유연한 검술을 구사하는 줄 알았는데, 독을 뿌려서 사검이었나?”
필립은 솔직히 실망했다. 뭔가 용병들 사이에서 전설로 전해지는 그런 숨은 강자 같은 품격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해가 될 사람 같은데.’
“잘 봐요. 저는 지금부터 당신의 오른쪽 다리를 공격할 겁니다. 막든 피하든 마음대로 해 보시죠.”
필립은 검을 들어 비스트로의 오른쪽 다리를 가리켰다.
“애송이 새끼가 운 좋게 몇 번 피했다고 기고만장하기는!”
검기를 사용한다곤 하지만 필립은 비스트로와 자신의 수준 차이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체감했다. 수준 이하의 전투에서만 압도적으로 이겨 온 하수의 냄새가 자세에서부터 흘러넘쳤다.
“하나.”
필립은 발을 크게 구르며 시선으로 페이크를 주며 비스트로의 다리를 베었다.
‘사실은 왼쪽 어깨를 노린다’라는 정보를 강제로 주입당한 비스트로는 필립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칼날이 무릎 뒤에 모인 신경 다발을 가르고 지나가는 감각은 끔찍이도 고통스러웠고, 또한 공허했다. 순식간에 힘이 빠져나가는 허탈함이 뒤를 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검기까지 다룰 줄 알면서 왜 독 같은 걸 씁니까? 가진 것도 제대로 쓸 줄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비슷한 수준에서야 잘 통하겠지만, 결국 제대로 된 강자에게는 안 통합니다. 오러 마스터에게 독 같은 게 통할 것 같습니까?”
‘아니, 오러 마스터하고 싸울 생각을 왜 해? 그게 미친놈이지.’
필립의 말을 듣던 버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필립이 보여준 모습이 너무나도 압도적이었기에 그 누구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씨발….”
패배가 확정되고, 자존심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 비스트로는 필립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욕설을 뱉었다.
“왜 저러고 사나 몰라.”
필립은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모래알처럼 많은 검사 중 검기를 다룰 수 있는 건 고작 한 줌.
그 정도 가능성을 지녔으면서 왜 저런 잡기술에 목을 매는지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독 구하러 다닐 시간에 검이나 한 번 더 휘두를 것이지. 이번에는 오른팔을 뺏을 겁니다.”
필립은 친절히 설명하며 이번에는 비스트로의 오른쪽 팔꿈치를 비스듬히 찔렀다. 팔꿈치 또한 신경 다발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흡!”
이번에는 딱히 별 기술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오른쪽 다리를 당했으니 제대로 받아치지 못할 건 뻔했다. 하지만 필립은 일부러 그가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를 고집했다.
소량의 혈액과 함께 비스트로는 오른손으로 검을 다룰 능력을 거의 상실했다.
본인이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는 경험은 적어도 검사에겐 매우 생소한 일이었다.
“씨발… 이게 무슨….”
필립은 절망에 빠진 비스트로의 표정을 감상하며 혀를 찼다.
“다음 생에는 치사하게 독 같은 건 쓰지 맙시다. 칼 차고 다니면서 그게 뭐 하는 짓입니까? 누가 저 사람 좀 묶어 주세요.”
용병들은 반사적으로 필립의 말에 따르기 위해 밧줄을 들었다. 그러나 사검의 명성이 워낙 널리 퍼진 탓인지 혹시라도 무슨 수작에 당할까 두려워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죽일까?’
잠깐 고민하던 필립이 버틈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저 사람에게 걸린 현상금 같은 게 있습니까?”
“예. 다 합하면 금화 삼백 개 정도는 될 겁니다.”
“살려서 데려가면 돈 더 주나요?”
“당연한 말입니다. 저 새끼 살점을 씹으려는 용병들이나 상인들이 성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테니까 말입니다.”
“호오.”
필립은 그 말을 듣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뭐 알아서 현상금으로 바꿔 드세요. 제가 따로 챙겨 드리기로 한 걸 저 사람 현상금으로 대신하죠. 대장인 당신에게 드릴 테니 알아서 하세요.”
버틈은 크게 몸을 움찔했다. 금화 삼백 개짜리 목을 흔쾌히 넘긴다는 건 보통 배포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존나 화끈하네. 시부럴 것.’
“와 씨발…… 아,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감히 그래도 되겠습니까?”
‘마샤 어깨를 고치고도 이백 개는 남겠군. 이 정도면 애들 다 은퇴시켜도 되겠는데? 목장 하나씩은 살 수 있는 돈이잖아.’
버틈의 머릿속에 장밋빛 미래가 그려졌다. 그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과 남은 삶을 여유롭게 살고 싶었다.
아직은 아름다운 부인도, 돈도 없었으나 이제 곧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좆같은 어린놈이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거냐? 이 개 씨발놈아, 나는 네가 네 어미 낯짝에 오줌을 갈기던 시절부터 검을 잡았다.”
비스트로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용병 출신이라 그런지 입이 제법 걸었다.
하지만 필립은 지금 몸에 빙의하기 전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창의적인 욕설을 일상적으로 겪은 몸이었다.
물론 게임에서.
“와, 대단하네요. 그런데 왜 졌지? 그러게 열심히 좀 수련하지 그러셨어요? 그 긴 시간 동안 뭘 했길래 이렇게 약한지 모르겠네. 아, 혹시 몸이 좀 안 좋으셨나?”
“이 씨발놈이 뭐라고?”
“화가 좀 많이 나신 모양인데. 좀 삭히면서 사는 게 어때요? 이러다가 교수대에 매달려 죽기 전에 홧병으로 먼저 돌아가시겠네요.”
비스트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문제는 그의 몸에 출혈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팔과 다리에서 흐르던 피가 그 속도를 더해 땅을 축축이 적셨다.
“이런… 개 씨발…….”
비스트로의 의식이 흐려졌고, 곧 땅에 쓰러졌다. 필립이 가까이 다가가 그의 머리통을 발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완전히 기절한 것 같은데, 빨리 챙기시죠. 저러다 숨 끊어지겠습니다.”
* * *
캐슬러 무르엘라는 깨달음에 접어든 지 사흘째 아침에 눈을 떴다.
‘내가 알던 세상과 다른데.’
나름대로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살던 그는, 이전까지 자신이 인식하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이 현저히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현상의 주체를 개인이 아니라 배경인 이 세상으로 두어 봅시다. 이 세상이 흙과 물, 공기로 이루어진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안에 수많은 생명을 품은 하나의 거대한 정신체라고 생각해 보자고요. 주어진 삶을 살다 가는 생명이 내는 목소리들은 이 세상의 입장에서 단순한 생활 소음에 불과하겠죠.’
‘인간이 사용하는 마법 또한 이와 같으니 명심하거라.’
필립과 프리비아가 나누던 대화가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건 지금껏 그 어떤 마법사도 생각하지 못한 관점이었다. 대부분 마법사는 룬 문자와 마법적인 현상, 주문이 가지는 법칙과 힘에 대해서 연구했으니.
그는 여러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이 맑아진 기분이었다.
“……쿠울.”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오래 서 있던 탓에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아래를 내려다보니 얇은 담요를 덮은 쟈니스가 풀밭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대충 봐도 깨달음의 순간에 선 그를 돌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캐슬러는 감동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여 쟈니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기특하기도 해라.”
자면서도 손길을 느꼈는지 쟈니스가 눈을 떴다.
“흐응… 어머, 오라버니? 일어나셨어요?”
반쯤 자는 듯한 눈으로 캐슬러를 바라보던 쟈니스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느끼며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오빠?”
“그래. 정신이 들었다. 네가 날 지켜 준 거니? 부인은?”
정신이 든 쟈니스는 곧 캐슬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신시아 언니는 잠깐 씻으러 갔으니 금방 올 거예요. 오라버니. 그보다 어떻게 됐어요? 무슨 깨달음을 얻었는데요?”
쟈니스 또한 마법사였기에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캐슬러는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며 쟈니스의 어깨를 쓸었다.
“마법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구나. 나중에 너에게도 알려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네 교관님께서 너뿐 아니라 나까지 깨우치셨구나.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마치 아주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구나. 지금 내가 이른 경지마저도 그분이 보기엔 높은 산의 초입에 불과하겠지.”
캐슬러는 필립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느꼈다. 쟈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보기에 필립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검술 실력이 뛰어난 것도 인정하지만 마탑의 쿼터마스터인 캐슬러가 존경을 표할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대단한 분인 것 같기도 하고.’
쟈니스는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잘 몰랐다.
“교관님께서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세요?”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질문에 캐슬러는 당연히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을 하는구나. 쟈니스. 그분께서 하고자 한다면 아마 이 세상을 뒤집을 수 있을 거다. 그분의 친구이신 프리비아라는 마법사님 또한 그렇고. 그런 분께서 널 예뻐하신다니 이 얼마나 잘된 일인지. 교관님께선 어디 계시니?”
“잠깐 마을 밖에 다녀오신다고 했어요.”
“정식으로 감사를 전해야겠구나. 그 가르침을 대체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저도 모르겠어요.”
쟈니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아는 필립은 보답 같은 걸 바랄 사람이 아니었다. 말로만 감사해도 충분할 사람이었으나, 이런 은혜를 입고서도 맨입으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네가 가서 혹시 필요한 게 있냐고 물어보렴. 마법적인 물품이나,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없는 것들 말이다. 가문에서 가진 게 있다면 내가 창고를 털어서라도 가져올 테니.”
“그렇게 할게요. 오라버니.”
“착하기도 해라. 일단 날 좀 부축해 주겠니? 신시아가 있는 곳으로 가자꾸나.”
“좋아요.”
쟈니스는 캐슬러에게 어깨를 빌려주었다. 이제는 거의 다 큰 막냇동생의 어깨에 몸을 기대며 캐슬러는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했다.
‘…이건 나 혼자 이득을 볼 게 아니다. 대륙의 미래가 될 인재들도 나와 같은 깨달음을 공유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이왕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