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 * *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가서 신시아 부인을 좀 모셔와야겠는데.”
필립은 무아지경에 빠져든 캐슬러를 보며 중얼거렸다. 평생에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순간을 방해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하염없이 그를 지키고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분이 어디 계신데요?”
리즈리엘이 묻자 필립은 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한 이십 분만 걸으면 샘이 하나 나올 텐데, 거기서 애들하고 물놀이를 하고 있을걸. 네가 다녀오게? 무서울 텐데?”
필립의 걱정에 리즈리엘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무슨 어린앤 줄 알아요? 아무 문제 없다고요.”
“물론 네게는 문제가 없겠지만, 귀신 생각은 또 다를 텐데. 뭐 다녀오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어. 대신 조심해야 해.”
“부, 불길하게 그게 무슨 말이세요….”
리즈리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사라지자 필립은 프리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저씨, 얼마나 큰 깨달음을 얻었을까요?”
프리비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남이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저놈이 얻은 깨달음이 몽매한 인간들이 대현자라고 부르는 이들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이전부터 대현자라고 불린 놈들을 보면 하나같이 제대로 된 놈이 없었느니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인간 식으로 표현하자면, 맞지 않은 옷을 억지로 입은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응? 네놈, 표정이 왜 그러느냐?”
필립은 프리비아의 말에 안색을 굳혔다가, 이내 본래대로 되돌렸다. 프리비아의 그 말은 대현자라 불리는 이들의 비밀에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아닙니다. 예상 밖의 의견이라서요.”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구나.”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저 멀리서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흙먼지와 나뭇잎이 사정없이 솟는 것으로 봐선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 여보!”
“꺄아아악! 부인! 이거 놔 주세요!”
수건으로 몸을 감은 신시아 무르엘라가 리즈리엘을 옆구리에 끼고 날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리즈리엘은 기절할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매달려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한 편의 희극 같았다.
신시아 무르엘라는 근처에 도달하자마자 곧바로 캐슬러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고, 필립은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 평생 괴로워하실 생각이 없다면 캐슬러 님을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저분은 큰 깨달음을 얻기 직전입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저희와 대화하던 중 갑자기 뭔가 느껴지시는 게 있었던지 갑자기 저런 상태가 되셨습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시아 부인께서 옆을 지켜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남편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해서 급히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하길래….”
“리즈리엘은 이런 상황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딱히 틀린 말도 아니잖습니까? 제가 제대로 말을 전하지 못한 탓이죠.”
“제가 감히 어떻게 여러분을 탓할 수 있겠어요? 제 남편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들이신데요. 남편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신시아 무르엘라는 한쪽 무릎까지 꿇으며 필립에게 감사를 전하려 했다.
‘…어?’
필립은 뭔가 스르륵, 하고 매듭이 풀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고, 초인적인 반사신경으로 급히 몸을 뒤로 확 틀었다.
“어맛!”
급히 뛰어오느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신시아는 몸을 가린 수건이 풀리자 당황하며 재빨리 수습했다.
“저걸 반응하다니…!”
드래곤인 프리비아마저도 깜짝 놀랄 만큼 대단한 대처 능력이었다. 반사신경은 둘째치고 몸을 돌려야겠다는 판단이 놀라웠다.
“정말 죄송해요. 이 무슨 추태람….”
“괜찮습니다.”
곧 쟈니스와 루아, 그리고 루리엘이라는 이름의 엘프 소녀가 신시아의 옷가지를 챙겨 쫓아온 것이 보였다.
그녀들은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머리카락이 죄다 젖어 있었고, 입술이 파랗게 변했다.
“…교관님하고 오라버니가 여긴 왜 계신 거예요?”
쟈니스는 을씨년스러운 숲 외곽의 분위기가 거북한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엘프 장로께서 말씀하시길, 여기 아주 강력하고 오래된 원혼이 있다고 해서 퇴치하기 위해 온 거란다.”
쟈니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는 손가락 마디를 바르르 떨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굳은 미소를 입에 걸었다.
“에, 엘프 숲에 유령이라니, 이상한 일도 다 있네요.”
“마침 큰 전력이었던 마법사 한 명이 전력 외 판정이 되었는데, 네가 도와주면 좋겠구나.”
필립의 요청에 쟈니스의 몸이 크게 한 번 들썩였다.
“물…론이죠! 저만…믿으세요, 교관님! 다, 당연히 도와야죠.”
사실 이제 쟈니스에게 필립은 남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녀에겐 생명의 은인이었고, 가장 사랑하는 가족인 캐슬러 무르엘라에게 큰 은혜를 입히기까지 했으니 가문의 은인으로 깍듯이 모시는 게 마땅했다.
부모님을 제외한 누군가를 위에 두어 본 적이 거의 없는 쟈니스는 최대한의 호의를 표시하는 게 전부였다.
“또 꼬맹이들을 데려갈 셈이냐?”
프리비아가 묻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여기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겠죠. 사실 이게 다 경험 아니겠습니까? 살면서 언제 영체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데, 안전이 보장된 상황에서 한 번 만나보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 * *
“기본적으로 영혼은 물리적인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건 우리가 영혼을 상대로 펼칠 수 있는 공격 수단이 대단히 한정적이라는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필립은 본격적으로 원혼을 찾아다니기 전 루아와 쟈니스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만약 우리의 목표가 원혼의 소멸이 아닌 단순한 퇴치라면, 꼭 전투로 해결할 필요가 없다. 보통 원한을 가진 영혼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이들이기에, 그 억울함을 다소나마 해결해 주면 승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그러면 만약 그 영혼이 싸울 생각이라면요?”
쟈니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보통은 저주나 정신 공격이 주된 공격 수단이지만, 개체에 따라 강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개체도 존재한다. 원한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생전에 얼마나 업을 쌓았느냐에 따라 갈리는데, 이번에 우리가 마주할 원혼은 그 모두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필립의 부가 설명이 끝나자 이번에는 루아가 손을 들었다.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해요?”
“루아 너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나나 저 마법사 언니가 어떤 식으로 원혼을 상대하는지 잘 기억하면 된다. 쟈니스 너는 내가 신호하면 정신계 마법을 한번 시도해 봐라. 혼란이나 인식 저해 마법 같은 것이 잘 통할 테니.”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상대법에 쟈니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프리비아는 필립의 지식에 놀라고 있었다.
‘저걸 인간이 어떻게 아는 거지?’
필립이 말한 건 드래곤이 아주 강대한 원혼을 퇴치할 때나 쓰는 방법이었다.
“수색할 필요 없이 음기가 짙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만이니 모두 함께 움직이고, 쟈니스와 루아는 내 곁에 딱 붙어 있으렴.”
“…저는요?”
리즈리엘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필립은 말없이 프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이리 오너라. 겁이 난다면 얼마든지 내 품에 안겨도 좋으니.”
시작부터 막혀 버린 수작질에 리즈리엘은 울상을 지으며 프리비아의 옆에 섰다. 프리비아는 짓궂은 표정과 함께 리즈리엘의 허리를 팔로 감아 잡아당겼다.
“더 가까이 붙거라. 그렇게 떨어져 있으면 원혼이 네 몸에 빙의하는 걸 막아 줄 수 없느니라.”
“왜, 왜 이러세요…?”
순식간에 프리비아의 장난감이 된 리즈리엘에게 연민을 느낀 필립은 애써 그녀를 무시했다.
원혼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북쪽으로 조금만 나아가자, 마치 자신을 찾아달라고 말하는 듯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부정형의 물체가 나무 몇 그루를 휘감고 공중을 유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히익.”
그 흉측하고 불길한 모습에 어지간히 신경이 굵은 루아도 무서웠는지 필립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아…으아….”
쟈니스는 필립의 소매가 목숨줄이라도 되는 듯 붙들며 필립의 등 뒤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이…인간……인간?
원혼은 일행의 기척을 느낀 듯했다.
곧 부정형의 안개가 한 곳으로 뭉치며, 두 개의 텅 빈 눈과 커다란 입을 가진 동그란 형체로 변했다.
―…나는… 여기는… 내 고향… 그리운… 배신을… 인간이… 나는…… 누구?
원혼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린 뒤 일행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아직 자아가 되살아나기 전이구나. 그렇다면 쉬운 일이지. 마법사 아가야, 네 힘으로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는 놈이란다. 가진 힘은 강하지만 아직 이성을 지니기 전이니 제대로 힘을 쓸 수도 없을 게다.”
필립에게 조금 물든 프리비아가 친절히 설명했다.
“저…저… 정신계… 아니, 정신계 마법이 정말로 통할까요?”
그 말에 자신감을 얻은 쟈니스가 묻자 프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쟈니스는 지팡이를 들었다. 그 순간 필립의 머릿속에 뭔가가 떠오르려 했다.
‘엘페니아 숲, 원한, 영혼, 배신, 그리고 고향…?’
몇 년 전이었다면 순식간에 뭔가가 떠올랐겠으나, 원작 게임을 마지막으로 클리어한 지 오래된 필립은 아직 필요한 정보가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이게 좋겠어.’
쟈니스는 사용할 마법을 정한 뒤 지팡이를 흔들며 손으로 수인을 맺고, 주문까지 외웠다.
정신계 중위 마법 중 하나인 ‘마인드 쇼크’ 상대를 혼란시켜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 주문이었다.
쟈니스의 주문이 완성되는 순간, 필립의 머릿속 기억의 조각도 완성되었다. 필립은 급히 쟈니스의 입을 틀어막고, 앞으로 뻗은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마인드… 쇼크흡!”
그녀는 주문을 완성하려는 순간 필립이 입을 틀어막자 필립의 손가락을 깨물고 말았다. 필립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쟈니스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쟈니스. 잠깐만 기다려 보렴.”
“개한하여….”
당황한 쟈니스는 필립의 손가락을 입에서 빼지도 않고 대답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러느냐?”
프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필립이 쟈니스를 말릴 이유가 없었다. 필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프리비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아는 유령 같습니다.”
“뭐?”
“말 그대로입니다. 저 유령의 정체를 알 것 같습니다.”
필립은 원혼의 앞으로 몇 발자국 다가갔다. 그가 다가가자 원혼의 어두운 몸체에서 수십 가닥의 촉수가 뻗어 나왔다.
“…설마 아직 마족의 손에 들어가기 전일 줄이야.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렇지 않습니까, 엘세우스?”
엘세우스라는 이름을 언급하자 원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름… 익숙함….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를 잡는다는 말이 딱 이 꼴이군. 여기서 마계 공작 중 하나를 만나게 될 줄이야.’
엘세우스는 필립이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저 원혼은 정상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몇 년 뒤 마계의 공작이 될 존재였다.
천 년 전, 마스터 솔베인의 시대.
그의 동료로서 활동한 최초의 정령 검사 하이엘프 엘세우스가 바로 저 영혼의 정체일 터였다.
물론 필립이 틀리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