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화
* * *
해가 진 후의 엘페니아 숲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 흔한 횃불 하나 켜지지 않은 숲임에도 반딧불과 빛의 정령들이 엘프 마을을 돌아다녀 걷고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세상에는 가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치거나, 난데없이 하늘에서 물고기가 떨어져 내리는 등, 정상적인 인과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
드래곤이 인간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일도 이 땅의 사람들에겐 그와 비슷한 일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건 필립과 엘프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인간들은 드래곤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필립은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 필립을 바라보고 있는 프리비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
그녀는 필립과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두 분이 싸웠습니까?”
캐슬러 무르엘라가 질문했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싸운 건 아니고 제가 일방적으로 맞았죠.”
그의 대답에 캐슬러는 꽤 감동한 것 같았다.
“아니, 오우거를 혼자 이길 만큼 강하다면서 연약한 여인에게 맞았다고 하는 겁니까? 교관님은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었군요. 쟈니스가 강아지처럼 따르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캐슬러는 필립이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프리비아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르니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오해를 딱히 정정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필립은 아닙니다, 하고 어색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그냥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될걸, 누가 드래곤 아니랄까 봐 저러나?’
필립은 프리비아에게 다시 눈치를 한 번 준 뒤 마당에서 놀고 있는 루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루아는 엘프 소녀 한 명과 꽤 친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엘프 소녀와 뭐라고 속닥거리더니 필립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교관님. 루리엘이 샘에서 같이 목욕하자고 하는데 갔다 와도 돼요? 쟈니스 언니랑 신시아 언니도 같이 간대요.”
아무래도 외출 허락을 받으러 온 것 같았다. 일단 마을 밖으로 나가면 목욕만 하고 돌아올 리가 없었기에 사실상 놀다 와도 되냐는 질문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렴. 내일 아침에 돌아가야 하니 너무 늦게까지 놀지는 말고.”
필립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아는 좋아 죽겠다는 듯 까르륵 웃더니 필립에게 손을 내밀었다.
“교관님도 같이 가요!”
“…내가 거길 왜 가니? 가서 재밌게 놀다 와.”
그 자리에 필립이 꼈다간 캐슬러 무르엘라의 마법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직접 확인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신시아 부인을 언제부터 언니라고 부른 거지?’
여자들끼리 친해지는 속도는 언제나 상상을 초월했다. 루아가 자리를 떠나자 필립은 캐슬러에게 물었다.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만, 어떠십니까?”
“오랜만에 고독을 좀 곱씹을까 했습니다만, 교관님께서 부르신다면 어쩔 수 없죠.”
필립은 캐슬러 무르엘라라는 사내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는 적색 마탑의 쿼터마스터였고, 그 자리는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마법사 네 명을 제자로 둘 수 있는 직위였다.
아카데미의 교수직보다도 더 명예롭고 더 강한 권력을 가진 위치인 캐슬러는 필립을 하대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막냇동생의 교관이라는 이유만으로 필립을 대우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필립은 곧 근처를 지나는 엘프 한 명을 발견했다. 장로에게 특명을 받아 손님을 맞이한 집사처럼 대기 중인 센티넬 유르실이었다.
“저기, 리즈리엘 유세프는 어디 있습니까?”
“네? 아, 장로님과 뭔가를 의논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녀는 드래곤과 친해 보이는 인간이 자신을 부르자 유르실은 깜짝 놀라며 몸을 움찔 떨었다.
“감사합니다.”
필립은 캐슬러 무르엘라와 함께 리즈리엘이 있는 장로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장로와 뭔가 심각하게 의논하는 듯했다.
“대가로 지불하신 미스릴의 품질이 제가 가져온 상품들에 비해 너무 뛰어나요. 저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득을 보는 거래를 하기엔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조만간 상행을 다시 꾸려서 부족한 대가만큼의 상품을 전달할게요.”
“그… 정말 괜찮아요. 유세프 상회는 저희 종족과 수백 년 동안 거래했고, 지금껏 한 번도 약속을 어기거나 상품을 속인 일이 없었죠. 그 대가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필립은 그녀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실없이 웃었다. 엘프 장로의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프리비아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리즈리엘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모르니 일단 성의를 보인 셈이었는데, 리즈리엘은 그게 불편한 듯했다.
“준다니 일단 받지그래. 딱히 부정한 이득도 아니잖아.”
“어머, 오셨군요.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이 정도 품질이면 왕가에서도 군침을 흘릴 만한 물건이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미스릴은 귀한 금속이라 경매로 내놓아야 할 텐데, 이만큼 순도가 높으면 아마 가문들과 마탑들이 제대로 경쟁이 붙을 거예요.”
그 과정에서 큰 이득을 보는 건 유세프 상회일 것이었다. 리즈리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부차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유세프 상회는 성장이 필요한 상회가 아니에요. 큰 이득을 본다고 해서 더 올라갈 곳도 없거든요. 저희 상회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같이 이득을 보는 게 중요한 거라구요. 그러면 그 고객들의 아들들이, 딸들이 또 저희 상회를 이용할 테고….”
그야말로 참된 기업인의 자세였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 품질 좋은 미스릴을 받은 대신, 뭔가 부탁 같은 걸 들어주는 걸로. 마침 이곳에 뛰어난 마법사님이 두 분이나 계시니 마법이 필요한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네?”
리즈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행 중 마법사가 둘이나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녀가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전부 필립과의 인연으로 묶인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거 좋은 말입니다. 교관님. 마침 이곳에 함께 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캐슬러 무르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 괜찮은데….”
엘프 장로는 겁먹은 표정으로 사양하려 했다. 그러나 필립이 프리비아를 부르는 게 더 빨랐다.
“프리비아 님은 어떠십니까? 괜찮죠?”
그러자 장로의 방 구석진 곳에서 투명화 마법을 건 채 기척을 죽이고 있던 프리비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알았느냐?”
“뭔가 지켜보고 계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보다 싫으십니까?”
“네놈… 이 아니라, 네가 그러고자 한다면 그러도록 하마.”
곧 죽어도 좋다고는 말하지 않을 터였으나 필립은 자신이 내민 화해의 손길을 그녀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정말로 괜찮습니다만?”
장로는 이젠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자 프리비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몰아붙였다.
“잘 생각해 보면 아마 있을 텐데…?”
없으면 만들어 내기라도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장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고, 곧 요즘 엘프들을 괴롭히는 문제 하나를 떠올려 낼 수 있었다.
“아…아! 그, 그래요. 숲 외곽이 요즘 시끄러워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어요. 정령들이 말하기론 오래되고 강한 원혼이 근처를 서성인다던데, 상급 정령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강한 존재인 것 같았어요. 딱히 마을에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지만, 그 근처에서 정령 몇이 실종되었거든요. 혹시 조사를 좀 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캐슬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요. 악령 퇴치 같은 건 본래 사제가 하는 일이지만, 마탑에도 종종 관련 의뢰가 들어오곤 해서 몇 번 해본 적이 있습니다.”
원혼 정도야 필립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으나, 치트키를 쓸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다.
“그러면 좋습니다. 곧바로 이동하도록 하죠.”
리즈리엘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이 진행되자 당황하며 외쳤다.
“저도 같이 갈래요!”
필립은 그녀가 참가 의사를 밝히자 살짝 놀라며 물었다.
“리즈 네가? 왜?”
“저 때문에 움직이시는 건데 편안히 있을 수 있나요? 저도 따라가게 해 주세요. 짐이라도 들 테니까요.”
“뭐 정 그렇다면.”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 놀고 있는 사이에 얼른 끝내자고요.”
* * *
“확실히 공기가 좀 서늘하군요. 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캐슬러 무르엘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엘페니아 숲의 외곽은 반딧불도, 빛의 정령도 잘 들르지 않는 곳이었다. 특히 북쪽 외곽은 더욱 그랬다.
이곳은 한때 마족과의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었고, 수많은 엘프가 마족의 무자비한 공격에 목숨을 잃은 장소이기도 했다.
“분명히 뭐가 있긴 있습니다만, 이거 괜히 자극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원혼이 지금껏 가만히 있었다는 건 딱히 뭘 할 생각이 없다는 건데, 저희가 들쑤셨다가 엘프들이 더 피곤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캐슬러가 나름대로 논리적인 의견을 #내어 놓자(내놓자) 프리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뭘 안다고 나서는지 모르겠구나. 강한 원혼은 존재만으로도 땅과 하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느니라.”
“…음, 마법사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라도 있는 겁니까?”
캐슬러는 확실히 인격자였다. 그 정도 지위의 마법사임에도 다른 의견을 들을 줄 안다는 건 대단히 열린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필립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응하는 캐슬러에게 존경심마저 느꼈다.
“본래 삶과 죽음은 하나이며, 삶이 있음으로써 죽음 또한 존재한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삶에 미련을 지닌 필멸자뿐이니라. 그렇다면 이미 죽어 원혼이 된 이 또한 필멸자임이 분명할 터. 놈이 이곳에 버티고 있는 한 이 근처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죽음이 부정적인 의미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필립도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조금 들여야 할 만큼 고차원적인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지 프리비아에게 되물었다.
“본래는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갈 죽음들이 원혼의 힘으로 변한다는 말입니까?”
프리비아는 작게 감탄사를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바로 그거다. 죽음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강대한 정신체가 존재함으로써, 주변의 작은 죽음들 또한 그렇게 인식되는 것이지.”
“그렇군요.”
‘유심론적인 이야기군.’
필립은 완전히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캐슬러 무르엘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방금 대화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프리비아라는 저 여마법사는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기에, 캐슬러는 그녀의 말을 인정하기로 했다.
“제가 모르는 것을 알고 계시는 듯하니,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프리비아는 캐슬러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너는 제법 자세가 되어 있구나. 네가 알아듣기 쉽도록 조금 더 간단히 설명해 주마. 물론 저 녀석이 설명해 줄 것이다.”
갑자기 지목당한 필립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제가 말입니까?”
“나는 식견이 좁은 이가 내 말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에 능숙하지 못하다. 너는 그게 직업이잖느냐?”
필립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으나, 하라는 걸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캐슬러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강한 원혼은 목소리가 크다는 겁니다.”
캐슬러 무르엘라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목소리 말입니까?”
“예. 현상의 주체를 개인이 아니라 배경인 이 세상으로 두어 봅시다. 이 세상이 흙과 물, 공기로 이루어진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안에 수많은 생명을 품은 하나의 거대한 정신체라고 생각해 보자고요. 주어진 삶을 살다 가는 생명이 내는 목소리들은 이 세상의 입장에서 단순한 생활 소음에 불과하겠죠.”
“….”
“하지만 원통하게 죽어 본래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한 원혼이 내는 목소리는 어떻겠습니까? 세계의 입장에선 마차 바퀴가 불길하게 덜컥거리는 소리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무시하다가도, 날이 갈수록 그 소리가 커지면 분명히 불안해지고, 또한 신경이 쓰일 것 아닙니까?”
“아… 그렇군요.”
쉽게 설명하자 캐슬러 또한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또한 이미 천재라고 불리며 자신의 재능으로 높은 자리에 오른 마법사였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그렇듯, 세계 또한 그런 불길한 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강한 원혼이 존재만으로 해가 되는 이유기도 하죠.”
옆에서 가만히 듣던 프리비아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마디를 더 보탰다.
“인간이 사용하는 마법 또한 이와 같으니 명심하거라.”
그 순간 캐슬러의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그는 홀린 듯 멍한 눈을 한 채 동상처럼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마법사 중 선택된 이들만 겪는다는 대오각성이었다.
저 혼이 나간 듯한 상태가 끝난다면 캐슬러의 마법적인 경지는 지금과는 비교도 힘들 만큼 높아질 것이 분명했다.
“…어?”
필립은 당황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이러면 나보고 뭐 어쩌라고?’
원혼을 어떻게 할 게 아니라 그가 안전하도록 지켜야 할 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