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 * *
“경치가 좋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필립은 프리비아와 함께 엘페니아 숲을 걸었다.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뺨을 간질이고, 바람 또한 기분 좋게 불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웬 정령석이냐? 네놈이 그걸 뭐에 써먹으려고?”
프리비아의 질문에 필립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누나 주려고요. 정령과 친해지는 데 정령석만 한 물건이 없잖습니까. 겸사겸사 이 숲에서 얻어야 할 것들도 좀 있어서요.”
프리비아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필립을 째려보았다.
“나는 네놈을 이해할 수가 없구나. 고작 스무 해를 조금 더 산 애송이 주제에 아는 게 뭐 그리 많으냐? 아까 그 신수 놈을 쫓아낸 것도 네놈이 신수라는 존재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그런 게 중요하지는 않잖습니까?”
“아니. 중요하다. 네놈은 인간치고 너무 많은 걸 알아. 네가 마력을 다루는 방식은 드래곤인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할 만한 구석이 있다. 그건 네가 천재라는 사실만으론 설명할 수 없고.”
“…그건 그렇죠.”
그녀 정도 되는 존재가 필립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파고들려 한다면 파고들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대충 모르는 척을 해 주는 것을 택했다.
“일단은 움직입시다. 찾아야 할 게 많거든요. 프리비아 님이 계시니 생각보다 금방 끝날 것 같습니다.”
필립은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프리비아는 일단 뭘 하려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그를 뒤따랐다.
필립은 곧 엘페니아 숲 외곽의 그리폰 자생지에 도착했다.
‘원래는 그리폰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어다녀야 하는 곳이지만, 드래곤이 있으니 덤벼들 일은 없겠지.’
“여긴 왜 온 것이냐?”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인 그리폰들은 일찌감치 프리비아의 기운을 알아보곤 순한 참새처럼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본래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통, 그리고 커다란 날개가 달린 강력한 생물이었으나 하늘 아래 가장 강력한 생명체인 드래곤 앞에선 날벌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끼이잉….”
개중 프리비아와 눈을 마주친 한 그리폰이 몸을 부르르 떨며 오줌을 흘렸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한데 뭐 하나만 찾고 나가자. 응?”
지능이 높은 그리폰은 사람을 습격하지 않았다. 게다가 엘페니아 숲에 사는 개체들은 잡식성이라 보통 나무 열매나 벌집 같은 걸 따서 먹는 순한 놈들이었다.
엘프들과는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이니 괜히 겁을 준 셈이 된 것이다.
필립은 그리폰의 둥지 몇 개를 지나쳐 언덕을 올랐다. 그의 목표는 이 그리폰 자생지의 우두머리인 로열 그리폰 ‘데플’의 둥지였다.
“이놈은 좀 귀엽게 생겼구나.”
보통 그리폰보다 몇 배는 빠르고 강력한 그리폰, ‘데플’은 자신의 둥지에 찾아온 손님을 열정적으로 접대했다.
사자보다도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놈은 프리비아가 다가오자 재빨리 땅에 뒹굴며 그녀에게 배를 보였다. 여느 동물이 그렇듯 복종의 표시였다.
“…귀엽게 생겼다고요?”
필립이 고개를 갸웃하며 녀석의 둥지를 뒤졌다.
“그래. 그보나 여기서 뭘 찾는 게냐? 그리폰에게 마음에 드는 물건을 물어오는 버릇이 있다지만, 네게 필요해 보이는 건 없을 텐데 말이다.”
데플이 골라낸 깃털이나 새끼를 까고 기념으로 모아뒀는지 모를 알의 껍질, 먹다 남은 사과 따위가 손에 걸렸고 그것들을 헤집자 곧 마치 체리처럼 생긴 새빨간 열매 몇 알이 나타났다.
필립이 뭘 가져가는지 눈이 빠져라 지켜보고 있던 그리폰 데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만 가져갈 건데, 괜찮지?”
지능이 뛰어난 그리폰은 사람의 말도 어느 정도 알아들었다. 로열 그리폰이 고개를 끄덕이자 필립은 프리비아를 돌아보았다.
“이제 다른 곳으로 가시죠.”
“어디로 갈 생각이고, 그건 또 무어냐?”
“요정의 샘으로 갈 겁니다. 이건……강장제라고 할 수 있죠. 아마 저 친구도 이걸 잘못 먹었다가 며칠 밤을 꼬박 새웠을 겁니다.”
프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강장제? 요놈, 그 상인 계집애를 자빠뜨리려는 게로구나.”
“예? 아닙니다!”
억울해진 필립이 소리쳤다. 그러나 프리비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 애가 아니면 누구냐? 네놈이 외모에 홀릴 종자는 아니니 오늘 처음 만난 엘프는 아닐 테고, 유부녀를 노릴 성격은 더더욱 아닐 테니 그 검사 계집도 아닐 테고….”
“아, 그런 곳에 쓸 것 아닙니다.”
필립이 억울하다는 듯 두 손을 들자 어디선가 킥, 하고 비웃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리폰 데플이었다.
“웃어?”
필립이 노려보자 그리폰은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그리폰에게 화풀이를 할 생각은 없었기에 필립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요정의 샘까지는 그리폰 데플이 데려다주었다. 황소보다도 덩치가 큰 놈의 등은 필립과 프리비아가 충분히 타고도 남을 만큼의 자리가 있었다.
“저기 봐. 그리폰이야!”
“누가 내렸어. 그런데 엘프가 아니야.”
‘요정의 샘’은 엘페니아 숲을 날아다니는 요정 수백 명의 보금자리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대부분 손바닥 크기의 작은 요정들이었고, 큰 요정은 오직 한 명만 있을 뿐이었다.
필립과 프리비아가 샘에 다가가자 샘의 주인인 요정이 급히 육체를 구성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드래곤과 인간이 여긴 무슨 일이죠? 이곳은 어린 요정들이 사는 곳이에요. 우연히 들른 거라면 어서 돌아가세요.”
경계심 가득한 요정의 태도에 필립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잠시 뭘 찾으러 왔을 뿐입니다.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요정은 의심 섞인 눈으로 필립을 바라보다가, 이내 프리비아를 곁눈질했다. 드래곤과 인간이 함께 왔는데 인간이 나서서 말하는 것이 이상했다.
“뭘 찾으러 오셨는데요?”
“요정이 사는 샘 근처에서 자라고, 하늘색에다, 꽃잎이 여섯 장인 꽃의 꿀을 채취하고 싶어서요.”
필립이 말한 정보를 들은 요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페투라 꽃의 꿀을요? 그것만 찾으면 돌아가실 건가요?”
그녀가 말하는 사이 작은 요정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필립과 프리비아에게로 날아들어 옷 사이를 파고들거나 머리카락을 붙들었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요정들이 하고 싶은 대로 두었고, 프리비아는 인상을 좀 찌푸렸으나 작은 요정들을 쳐내거나 쫓아내지는 않았다.
“요 조그만 것들이 드래곤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프리비아가 중얼거리자 요정들이 꺄르륵 웃으며 그녀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누나는 드래곤이에요? 그런데 드래곤이 뭐에요?”
“이 언니 드래곤이래요!”
큰 요정의 낯빛이 도자기처럼 하얘졌다.
“얘, 얘들아, 그러면 안 돼!”
프리비아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는 듯 눈을 질끈 감고 한숨과 함께 지시했다.
“말리지 못할 거면 빨리 그 페투라 꽃의 꿀인지 뭔지를 내어 오거라.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는구나.”
“아, 알겠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큰 요정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더니, 고작 물 한 잔 정도 마실 시간이 흐르자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돌아왔다.
“헥, 헥. 여기, 여기 있어요.”
부드러운 천 조각에 열 송이가 넘는 페투라 꽃이 담겨 있었다. 필립은 그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가시죠. 프리비아 님.”
“그러자꾸나… 하아, 어린 계집아이들을 피해서 따라왔거늘.”
그녀는 사실 자꾸 귀찮게 굴던 루아와 쟈니스를 피해 필립을 따라왔던 것이었다.
페투라 꽃을 품에 갈무리한 필립은 요정의 샘을 빠져나왔다.
“그것들을 대체 뭐에 쓸 생각인 게냐?”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는지 프리비아가 필립에게 직접 물었다. 필립이 수집한 것들은 드래곤조차 제대로 모르는 식물이었다.
“프리비아 님도 이것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나 봅니다?”
프리비아는 자존심에 조금 스크래치가 났는지 눈매를 일그러뜨리며 투덜거렸다.
“나라고 해서 세상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세상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다면 지금쯤 여기서 인간의 몸으로 노닥거리고 있을 리가 없었다.
“프리비아 님께선 가장 뛰어난 치료제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필립이 되묻자 프리비아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엘릭서를 말하는 게냐?”
“보통은 그렇게 알고 있죠. 그러면 혹시 엘릭서의 제조법을 알고 계십니까?”
“…모른다.”
엘릭서는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조차 벌떡 일으킨다는 전설 속의 치료제였다.
필립이 알기로 그 물약을 보유한 국가는 세상에 한 곳뿐이며, 왕의 생명이 위독하더라도 쓰이지 않았다.
‘엘라하 교국이 하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보통 사람들은 드래곤이 엘릭서를 만든다고 알고 있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엘릭서의 제조법은 먼 고대에 이미 유실되었기에 드래곤이라고 해도 그것을 알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엘릭서는 보통 고대 유적 속에 깊숙이 봉인되어 있기에 마음먹고 찾지 않는 한 드래곤이 그걸 발견하는 건 지난한 일이었다.
필립이 묘한 미소를 짓자 프리비아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필립을 쳐다보았다.
“…설마 이게 엘릭서의 재료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날 놀리려는 셈이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왜 아니겠습니까? 이건 엘릭서의 재료가 맞습니다. 오직 이곳 엘페니아 숲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죠. 제가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도 이것들 때문입니다. 솔직히 세계수의 잎 정도는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습니다.”
“뭐 그래. 엘릭서의 재료라고 치자. 그런데 네놈에게 엘릭서가 왜 필요한 게냐?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냐? 젊고 건강한 네놈에게 필요한 물건은 아닐 텐데.”
필립은 프리비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서 묘한 힘이 느껴진 탓에 프리비아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엘릭서 정도 되는 치료제가 아니라면 드래곤에게 효과가 없기 때문이죠.”
필립의 말이 끝나자 프리비아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수천 년에 달하는 삶 동안 한 번도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경악, 충격, 그리고 분노.
그 모든 것들이 섞인 감정에 휩싸인 프리비아는 손을 들어 올렸다.
필립은 자신의 몸을 휘감는 마력을 느꼈으나 저항하지 않았다. 곧 프리비아의 마력이 만든 고리가 필립의 목을 둘러싸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네놈. 똑바로 말해라. 대체 뭘 알고 있는 것이냐.”
프리비아의 눈동자에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필립은 수틀리면 정말로 그녀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으윽… 뭐, 별…건 아닙니다. 일단 좀 진정하십시오. 말은 편하게 하도록 해 주셔야지 제가….”
프리비아는 무서운 표정으로 필립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뺀질거리는 걸 참아줄 상황이 아니다. 네놈이 뭘 아는지 알아야겠다.”
“뭐… 별 건 아닙니다. 프리비아 님이 지금 본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
프리비아는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필립의 몸이 위로 높이 떠올랐다가 바닥에 강하게 처박혔다.
“허윽!”
필립은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네놈이 그걸 어찌 아느냐?”
본체에 관한 정보는 프리비아에겐 같은 드래곤에게도 숨겨야 할 비밀이었다. 그걸 고작 인간인 필립이 알고 있는 건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필립은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용언! 용언 듣고 알았습니다. 원래 그건 제가 들을 수가 없는 언어인데, 제게 왜 들렸겠습니까? 프리비아 님께서 본체가 아니라 용언을 완전히 구사할 수 없으시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그 몸, 원래 용아병으로 만들어진 몸이잖습니까. 옆에 그렇게 붙어 있었는데 안 들키실 것 같았습니까?”
“…뭐라고?”
그 말에 프리비아는 깜짝 놀라 필립에게 건 마법을 풀었다. 몸의 자유를 되찾은 필립은 죽은 피를 토해내며 기침했다.
“…이제, 켈록, 궁금증이 풀리셨습니까?”
딱히 필립이 뭘 알고 저러는 게 아니었다.
필립은 그냥 눈치가 상상 이상으로 빠를 뿐이었다.
자신이 한참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프리비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