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화
* * *
엘페니아 숲에 도달하는 여정 동안 별다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시아 무르엘라의 말이 성인 남녀를 태우느라 조금 지쳤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랬다.
“저기 보이죠? 숲이 끝도 없이 펼쳐진 모습이요. 저곳이 엘페니아 숲이에요. 엘프가 사는 숲이라고 붙은 이름인데, 엘프들은 보통 큰숲이라고 불러요.”
리즈리엘이 가이드처럼 숲에 대해 설명했다.
필립은 사실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저기서 몇 시간을 박았는데.’
그는 저 숲에 사는 엘프조차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장소, 기연, 그리고 숨겨진 보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슬슬 엘프 정찰대들이 마중을 나올 때가 됐는데….”
숲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오솔길 앞에 선 뒤 리즈리엘은 짐꾼들과 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동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야영지가 있어요. 그곳에서 캠프를 설치하고 저희가 나오길 기다리면 돼요. 하루나 이틀 정도면 용무가 모두 끝날 테니 편히 쉬고들 계세요.”
“예에. 아가씨. 자, 들었지? 다들 준비해라!”
짐꾼 대표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짐꾼들을 다그쳤다. 그는 리즈리엘이 말한 야영지가 꽤 편하고 안락한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 버틈 씨. 잠시만 이리로.”
용병들 또한 짐꾼들을 따라 이동하려는 찰나, 필립은 용병대장 버틈을 불러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이, 이게 뭡니까?”
“별 건 아닙니다. 그냥 가지고 계시죠.”
“아니, 이게 뭔 줄 알고….”
버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얌전히 그것을 받아 챙겼다. 필립의 말에 반항할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용병과 짐꾼들이 멀어지자 숲 깊은 곳에서부터 몇 명의 사람 형상이 나무 사이를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곧 녹색 옷을 입은 엘프들이 일행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활을 손에 쥔 걸 보니 전투원들인 것 같았는데, 딱히 다른 무장은 없었다.
“유세프 상단은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군요. 방문을 환영합니다. 리즈리엘 유세프.”
대표로 보이는 금발의 엘프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 엘프 여인의 옷에는 머리카락으로 놓은 듯한 자수가 보였는데, 그것이 그녀의 계급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센티넬 유르실.”
리즈리엘이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숙였다.
‘…진짜 예쁘다.’
쟈니스는 나타난 엘프들을 보며 입을 헤, 하고 벌렸다. 그녀는 자신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엘프들에 비해선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비정상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그들의 외모를 보자 뭔가 기가 죽는 것도 같았다.
“약속한 물건들은 마차에 전부 실려 있어요. 전부 상등품으로 준비했답니다.”
“당신이 준비했으니 당연하겠죠. 리즈리엘. 그보다 오늘은 손님이 좀 많군요? 길을 잃지 않게 조심해야겠어요.”
센티넬 유르실은 숲에 몇 명이 방문하든 그리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필립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엘프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데려온 일행에게는 매우 관대한 편이었다. 드워프 같은 철천지원수 종족이 아닌 이상 보통은 그랬다.
엘프 정찰대장, 센티넬 유르실은 마차에 묶여 있는 말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말들은 그 손길이 썩 마음에 든 것처럼 콧김을 뿜거나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자, 움직이렴. 얘들아. 조금만 고생해 주면 너희들에게 달콤한 당근을 선물할게. 여러분도 따라오세요. 과일주를 많이 담길 잘한 것 같네요.”
‘저래서 마부까지 모두 돌려보냈군.’
말들은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스스로 걸음을 옮겼다.
일행은 센티넬 유르실을 따라 엘페니아 숲 깊은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엘페니아 숲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작고 큰 짐승들은 일행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고, 가끔 새끼 사슴이나 여우 같은 호기심 많은 동물이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오곤 했다.
엘프들은 나름 호의적이었다.
아주 친밀한 친구를 대하듯 편하지는 않았으나 싫지 않은 손님을 대하는 정도는 되었다.
필립은 일행의 반응을 살폈다. 몇 번 온 적 있는 리즈리엘은 여유로웠고, 쟈니스와 루아는 눈을 반짝이며 서로의 귓가에 뭔가 감상 같은 걸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
프리비아는 뚱한 표정으로 숲을 이곳저곳 살폈다. 드래곤인 그녀에게 엘프가 사는 숲 같은 건 길고양이가 많이 사는 동네와 크게 다를 것이 없을 터였다.
“…대륙을 꽤 돌아다녔지만, 엘페니아 숲에 직접 들어온 건 처음 같아. 내 사랑, 자기는 어때?”
“저도 처음이에요. 그보다 저 유르실이라는 엘프 아가씨는 정말 예뻐요.”
“내 눈에는 당신이 더 아름다워.”
“……정말이에요?”
캐슬러와 신시아 부부의 목소리를 들으며 필립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 부부의 금슬이 좋은 건 익히 아는 바였으나 바로 옆에서 저런 걸 듣고 있자니 닭살이 돋는 것만 같았다.
깊은 곳으로 두 시간 정도 계속해서 들어가자 곧 높고 커다란 나무들이 가득한 숲의 중심부가 나왔다. 말 그대로 집채 만한 나무들이었다.
엘프들은 그 거대한 나무에 나 있는 구멍이나, 혹은 나뭇잎과 죽은 가지를 이어 만든 집에서 살아가는 듯 보였다.
“이리로 오세요. 장로님께서 손님들을 만나고 싶다고 하시니까요.”
유르실의 안내에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필립은 곧 저 멀리 높게 솟아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볼 수 있었다.
‘저게 세계수군.’
한 국가의 랜드마크처럼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나무, 구름 가까이 닿을 만큼 높게 자란 그것은 누가 봐도 세계수처럼 보였다.
세계수의 가지는 엘페니아 숲 전역에 뻗쳐 있었다. 뿌리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마치 그 속에 들어와 살라고 하는 것처럼 뿌리가 집 모양으로 얽혀 있는 게 제법 신기했다.
마치 한 그루의 나무로 지어진 호텔처럼 보였다.
그 천연 주택 중 한 가구에서 제법 고급스러운 흰색 옷을 입은 엘프 여인 한 명이 걸어나왔다.
“너희들은 이제 돌아가 쉬렴.”
“네, 센티넬.”
그녀가 모습을 보이자 센티넬 유르실은 다른 엘프들을 돌려보낸 뒤 흰옷의 엘프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손님들을 데려왔어요. 할머님.”
유르실과 혈연관계인 듯한 흰옷의 엘프 여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일행을 맞이했다.
“먼 곳에서 오시느라 수고들이 많으셨어요. 쉴 곳을 준비해 두었으니 짐부터 풀도록 하세요.”
묘하게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투였다. 필립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프리비아는 그런 태도를 참지 못했다.
그녀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뭔가 불길함을 느낀 흰옷의 엘프가 흠칫 놀라며 프리비아를 살폈다.
그녀는 곧 프리비아를 둘러싼 흉포한 기운을 읽어내곤, 사색이 되어 비틀거렸다.
“…할머님? 괜찮으세요?”
“응? 아, 나는 괜찮아. 아가야. 나이를 먹으면 원래 가끔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단다.”
흰옷의 엘프는 오래 산 엘프답게 눈치가 인간보다도 빨랐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유르실을 안심시켰다.
“에, 엘페니아 숲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모쪼록 집처럼 편하게 생각해 주세요. 유르실? 너는 가서 손님들께서 짐을 풀고 편히 쉬는 걸 도와 드리렴.”
갑자기 극도로 공손해진 그녀의 태도가 의문이었으나, 일행 중 필립을 포함해서 프리비아가 뭔가 했다는 걸 눈치챈 이는 없었다.
프리비아는 로브 모자를 벗으며 앞으로 나섰다.
“엘프 장로? 잠깐 이야기 좀 해도 되나?”
그 뭔가 애매한 말투에 센티넬 유르실이 반발했다.
“잠깐, 장로님께 그 무슨 무례죠?”
그러자 엘프 장로가 식겁하며 유르실을 나무랐다.
“유르실! 가만히 있으렴. 당연히 이야기할 수 있죠. 손님. 제 방으로 안내해도 될까요?”
“그러던가. 애송이, 따라와라.”
프리비아는 필립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손님들을 잘 모셔야 한다. 유르실. 알겠지?”
엘프 장로는 어색한 표정으로 유르실을 다그쳤다. 센티넬 유르실은 그녀의 태도가 조금 낯설었는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조, 존귀하고 위대하신 분께서 미천한 곳을 방문하시다니….”
장로의 개인실로 보이는 방으로 안내된 필립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엘프 장로를 보며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살 만큼 산 엘프가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좀 불편했다.
“보아하니 천 살 가까이 산 것 같은데, 눈치가 참으로 없구나. 지난 세대 장로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너처럼 모자란 계집도 장로로 대우해 주느냐?”
프리비아는 엎드린 엘프 장로의 엉덩이를 신발 앞꿈치로 툭툭 건드렸다.
‘개진상이네. 진짜.’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
엘프는 기본적으로 드래곤을 두려워하는 종족이었다. 뭐 어느 종족이나 그렇겠지만, 엘프는 유전자 깊은 곳에서부터 드래곤을 두려워했다.
“그만 괴롭히시면 안 됩니까?”
“흥! 네놈은 마음이 약해서 탈이다. 괜히 잘 대해 주면 버릇이 나빠지느니라.”
필립이 조심스럽게 묻자 프리비아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장로에게 지시했다.
“기상.”
“넵!”
엘프 장로는 잘 훈련된 신병처럼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네년이 어린 엘프였다면 관대히 용서했겠지만, 천 살 가까이 살았으면 알아서 눈치를 챙겨야 할 게 아니냐? 감히 내 앞에서 건방지게 굴다니, 너무 오래 살아서 그만 살고 싶은 게냐?”
프리비아가 으르렁대자 장로는 몸을 벌벌 떨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존귀하신 분들을 뵌 적이 너무 오래되어 잠깐 미쳤었나 봅니다.”
“나는 자애로운 드래곤이니 용서하겠다. 그래. 아우베스는 지금 깨어 있느냐?”
엘프 장로는 그제야 눈앞의 드래곤이 어떤 의도로 이곳을 찾았는지 알 수 있었다. 엘프의 수호룡인 그린 드래곤 아우베스를 만나러 온 듯했다.
“아우베스 님께서는 사 년 전에 수면기에 드셨습니다….”
“…그래?”
같은 드래곤의 수면까지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프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세계수 이파리 세 장과 열매 두 개를 원한다. 네년이 내어 올 수 있느냐?”
그 말에 장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백옥 같은 엘프의 피부색이 저렇게까지 죽을 수 있다는 게 필립은 꽤 놀라웠다.
“그…그게…다, 당연히 드려야겠지만… 문제가… 문제가 있습니다.”
장로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문제가 있다고?”
프리비아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장로는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잎은 백 장이라도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엘페니아 숲에 살고 계시는 신수님께서 세계수의 열매를 엄중히 지키고 계셔서 여왕님께서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 말에 프리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신수? 이 숲에 그런 것도 살았나? 있다손 쳐도 그놈이 왜 세계수의 열매를 지켜?”
“그건 저희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닙니다. 제발 믿어 주세요.”
필립과 프리비아는 애초부터 장로가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저렇게 무서워하는데 거짓말을 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필립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기억을 되살렸다. 곧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이벤트가 스쳤다.
“…신수라면, 혹시 그 커다란 늑대를 말하는 겁니까? 머리에 뿔이 달렸고….”
“마, 맞습니다. 존귀하신 분께서 데려오신 분.”
장로가 대답하자 필립은 고개를 끄덕이며 프리비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세계수의 열매는 왜 찾으시는 겁니까? 영약을 만드는 데 잎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놈은 바보냐? 열매를 넣으면 효과가 훨씬 좋아진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계수의 열매는 굉장히 맛있느니라. 즙을 짜서 주스를 만들어도 좋고, 차를 우려도 좋지.”
“그러면 당연히 구해야죠.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