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화
* * *
필립은 리즈리엘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뭔가 방법이 있어?”
필립의 속삭임에 리즈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행은 조금 늦어지겠지만, 일단은 순순히 체포당하는 수밖에요. 어차피 이번 사건도 언니 잘못이 될 테니까요.”
깊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세티안 경에게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 총관이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군요. 모두 밝히겠습니다.”
“…총관님?”
이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리즈리엘이 당황한 기색으로 그를 불러세웠다.
“미안합니다. 아가씨. 하지만 더는 제 양심을 속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에요…?”
리즈리엘이 뭘 하든 총관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세티안 경에게 가까이 다가가 털썩 무릎을 꿇은 뒤 땅에 납작 엎드렸다.
“낱낱이 고하겠으니 부디 관대한 처우를 바랍니다…….”
총관은 엎드린 채 리즈리엘이 지금껏 벌인 만행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희 아가씨께서는 지금껏 열이 넘는 엘프 노예를 암시장에 넘겼으며, 비밀 유지는 전적으로 제가 담당했습니다. 뒤탈이 나지 않도록 고용했던 용병들에게 큰돈을 준 뒤 하나씩 암살했고….”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필립이 정말로 그랬냐는 듯 리즈리엘에게 의심의 시선을 보내자, 리즈리엘은 눈물을 글썽이며 필립을 노려보았다.
‘놀리면 안 되겠군.’
아무래도 총관이라는 사람을 꽤 믿었던 모양이었다. 필립은 입모양으로 ‘장난이었어’라고 말한 뒤 다시 총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래 활동한 상인의 연기력이란 필립마저 감탄할 만큼 훌륭했다. 그는 오래 모신 아가씨를 위해 자신이 죄를 뒤집어쓰려는 듯한 모습을 훌륭히 연기해 내고 있었다.
‘배신자를 이용하다니. 제법 애를 쓴 모양인데.’
델루안 유세프의 계획은 제법 매서웠다.
당연히 이 자리를 벗어나 도시에 가면 시시비비가 제대로 가려지겠지만, 이 상황에서 상행의 발을 묶는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상인의 생명은 신용이었고, 약속된 상행에 늦는 건 신용에 큰 타격을 줄 것이었다.
대륙의 수많은 상단 중 엘프라는 종족과 어느 정도 신뢰 관계를 구축한 건 유세프 상단이 유일했으니까.
‘상단 전체의 이미지까지 희생해서 리즈리엘을 침몰시키겠단 발상이 좀 놀라운데. 저렇게까지 해서 뭘 노리는 거지?’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상황을 완전히 해결하려면 필립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캐슬러 무르엘라를 바라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후작의 기사 세티안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차들과 리즈리엘을 번갈아 가며 관찰하다가 뭔가 결심을 내린 듯 입술을 깨물었다.
물증과 증언이 동시에 나왔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이거 정말이야?”
“대장? 대장? 어떻게 해요?”
버틈 용병대는 대장인 버틈에게 판단을 위임했다. 15년 차 용병 버틈은 일생일대의 기로에 선 채 식은땀을 흘리며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씨발.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데. 어떤 대가리 깨진 새끼가 애새끼까지 데리고 노예사냥을 나오냐고.’
게다가 필립은 혼자 오우거를 복날 개처럼 두들겨 패서 쫓아보낼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강자였다.
‘저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엘프를 몰래 납치해다 파냔 말이야.’
필립 정도의 실력이라면 어느 권세 있는 귀족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만 해도 금은보화 속에서 헤엄을 칠 수 있을 것이었다.
“일단 지켜본다. 뭔가 돌아가는 게 이상하잖아.”
버틈은 그렇게 말하며 용병대를 진정시켰다. 필립의 표정이 너무 여유로웠기 때문이었다.
필립의 신호를 받은 캐슬러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과열되어 가는 분위기를 가라앉히려 했다.
“워, 워. 다들 진정하십시오. 세티안 경. 저들은 노예 사냥꾼 같은 게 아닙니다.”
세티안 경은 무르엘라의 직계이자 적색 마탑의 쿼터마스터인 캐슬러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려 하자 내심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캐슬러 님?”
캐슬러 무르엘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두 손을 어깨 위로 살짝 들어 보였다.
“뭐 간단한 이야깁니다. 저기 저 청년은 제가 아는 사람이거든요. 세티안 경은 만약 제가 엘프를 노예로 팔아넘긴다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당연히 안 믿습니다.”
캐슬러 무르엘라는 만약 악독한 심성을 지녀 엘프 노예를 탐내더라도 최종 구매자가 될지언정 중간 판매자는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돈이 목적이라면 굳이 노예사냥을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같은 말입니다. 저분은 오스왈드 가문의 적자인 필립 오스왈드이고,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교관입니다. 얼마 전에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죠. 그렇지 않아요, 내 사랑?”
캐슬러가 뒤를 돌아보며 부르자 역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신시아 무르엘라가 로브에 달린 모자를 벗으며 말을 앞으로 몰았다.
“맞아요. 여보. 최근 들어 저분처럼 신실하고 좋은 청년을 본 적이 없었죠.”
말에 탄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덩치가 작은 누군가가 그녀의 허리를 팔로 단단히 끌어안고 있었는데, 필립은 그 누군가가 입을 열자 단번에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관님이 그럴 리 없어요!”
“…쟈니스?”
필립이 중얼거리자 캐슬러가 곤란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따라오고 싶다고 하도 보채서 말입니다.”
쟈니스 무르엘라는 말에서 내려 필립과 리즈리엘이 서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가 필립과 가볍게 포옹하는 장면을 보자, 세티안 경은 판단을 마친 듯했다. 그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누군가를 겨누었다.
“…아니, 아닙니다. 제가 이런 자리에서 거짓을 고할 리 없잖습니까? 저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에 온 겁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지 않으면, 제가 아닌 사람이 제 역할을 대신하게 될 거란 말입니다.”
총관은 기사의 검이 자신을 향하자 두려움에 떨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세티안 경은 그에겐 관심조차 주지 않고 캘버라는 이름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자네와는 할 말이 많은 것 같군. 캘버를 붙잡아 무장을 벗겨라.”
“이런 씨팔!”
캘버는 욕설을 뱉으며 즉시 자신의 말에 올라타려 했으나, 십수 명이나 되는 병사를 뿌리치고 달아날 수는 없었다.
병사들이 그를 둘러싸자 캘버의 검에 희미한 오러가 맺혔다. 검기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미약했으나, 일반 병사들의 질 낮은 갑옷을 뚫기엔 충분한 오러였다.
“지금 도망치면 자네 가족들은 모조리 노예로 팔릴 걸세. 캘버.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세티안 경의 말에 캘버는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다가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곧 그가 들고 있던 장검이 힘없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 * *
총관과 캘버는 단단히 포박된 채 꿇어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어이가 없네요. 언니가 이런 수작을 부릴 줄은 몰랐는데. 이건 자기 살을 깎아서 그 피로 제 눈을 가리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리즈리엘은 필립의 옆에 붙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왜 배신했는지 안 묻는 건가?”
필립이 묻자 리즈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뭐 배신할 만하니까 배신했겠죠. 제가 총관을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았는데, 그런데도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을 거예요. 상인이란 족속은 원래 돈 앞에선 부모도 배신하는 법이거든요.”
“아가씨, 잠깐만요. 아가씨를 해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총관이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리즈리엘을 불렀으나, 그녀의 시선이 총관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이거 정말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캐슬러 님과 당신이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분명히 무력 충돌이 일어났을 겁니다.”
세티안 경은 필립과 리즈리엘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는 굉장히 분노한 듯 캘버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어떤 빌어먹을 종자가 감히 후작 각하의 기수인 절 속이려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겁니다.”
“아마 제 언니인 델루안 유세프일 거예요. 이런 짓을 해서 이득을 볼 사람은 언니밖에 없거든요.”
리즈리엘은 그렇게 대답했다.
“고작 상회 후계자 경쟁에 후작 가문을 끼어들게 한다는 겁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세티안 경이 헛웃음을 뱉었다.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니까요. 아마 언니도 그런 생각이었을 거예요.”
“겁을 상실했군요. 그녀는 분명 귀족이 아닐 텐데 말입니다. 만약 캐슬러 님과 오스왈드 교관님이 아니었다면 큰 충돌이 있었을 겁니다. 저는 영지로 돌아가 후작 각하께 이 모든 사실을 보고하겠습니다.”
‘그러면 델루안은 교수대에 매달릴 텐데. 뭐 내 알 바는 아니고.’
이른 타이밍에 그녀가 사라진다면 앞으로의 행보가 조금은 편해질 터였다.
“아, 돌아가실 겁니까?”
신시아, 그리고 쟈니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캐슬러 무르엘라가 문득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저와 아내, 그리고 제 막냇동생이 좀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제 귀여운 동생이 엘페니아 숲을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대가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지불하겠습니다.”
리즈리엘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당연히 되죠.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큰 곤욕을 치렀을 텐데요.”
신분이 보장된 일행 몇 명 정도야 얼마든지 합류해도 되었다. 게다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은 걸 확인한 델루안이 돌아가는 길에 어떤 수작을 부렸을지 알 수 없는 상황.
무르엘라 가문의 마법사라면 크나큰 전력이 될 터였다.
“이거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쟈니스, 너도 고맙다고 해야지”
“…고마워요.”
수줍은 표정으로 인사하는 쟈니스를 귀엽다는 듯 잠깐 쳐다보던 세티안 경이 병사들에게 지시해 총관과 캘버를 말에 묶었다.
“그러면 여기서 작별해야겠습니다. 가능하다면 후작령에 들러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후작님께 증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필립은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고생하십시오.”
잠시간의 소란 이후 일행은 다시 여로에 올랐다. 엘페니아 숲은 앞으로 한나절을 더 가야 했으니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필립은 객마차의 자리를 포기하는 대신 신시아와 쟈니스가 마차에 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신시아가 타던 말 위에 올라탄 필립은 캐슬러와 말머리를 나란히 맞추었다.
“마차에 타시지 않고 왜 말을 타십니까? 쟈니스만 태워도 되었을 것 같은데.”
캐슬러의 질문에 필립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십 대 소녀 한 명은 견딜 만한데, 두 명은 좀 버거워서요.”
캐슬러는 금세 이해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마차에 타고 난 뒤부터 마차 내부에서 수다를 떠는 소리가 쉴 틈 없이 울려오고 있었다.
“쟈니스는 귀여운 아이죠. 종달새처럼 사랑스럽게 지저귀지만, 가끔 머리가 아플 때가 있긴 합니다.”
한 시간 정도 말을 몰아 움직이던 필립은 곧 마차 안에서 누군가 뛰쳐나오는 것을 보았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프리비아였다.
“…대체 어떻게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 수 있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귓가에 맴도는 소음을 털어낸 뒤 가벼운 동작으로 필립이 앉은 안장의 뒤편에 올라탔다.
‘드래곤도 애들은 못 버티는군.’
필립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환영했다.
“어서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