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화
* * *
용병들은 필립이 해낸 일을 보고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우거가 어떤 몬스터인가.
용병들의 악몽이라 불리며 수많은 여행자와 용병을 잡아먹은 길 위의 공포였고, 기사라곤 영주 집안의 인물들뿐인 시골 영지에선 외부에 토벌을 의뢰해야 할 만큼 강력한 괴수였다.
트롤 한 마리만 혼자 잡아도 트롤 슬레이어라 불리며 위명을 떨치는 판국에 그것보다 족히 두 배는 더 강한 오우거를 두드려 패서 쫓아냈으니 용병들의 수준에선 필립이 얼마나 강한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버틈 용병대장, ‘대머리 버틈’으로 불리는 용병 버틈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필립의 눈치를 살폈다.
‘…아카데미 교관이라며?’
그나마 견문이 넓은 버틈은 필립의 수준을 대충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오래전 다크우드라 불리는 숲에서 괴수 토벌 작전에 참여했던 그는 30대 후반의 꽤 이름난 기사단장 한 명이 오우거 하나를 몇 분에 걸친 전투 끝에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그때 그 기사단장보다 강하다는 거지?’
―역시 대형 괴수가 찌르고 써는 맛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사람은 너무 말랑말랑하단 말이에요.
한편 필립은 네리아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정말로 강화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말하는 것만 들으면 잘못했다간 희대의 마검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루아는 필립이 보여준 전투를 통해 뭔가 깨달은 듯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보통 그 나이의 소년 소녀들은 물론이고 성인 또한 경험이 강렬하고 충격적일수록 머릿속에 깊게 남기 마련이었다.
“슬슬 정리하고 출발하지.”
리즈리엘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짐꾼들과 용병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정리하세요. 이제 움직일 시간이니까. 보셨죠? 드래곤이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몬스터 같은 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일행은 곧바로 머문 자리를 마저 정리했고, 여정을 이어갔다. 버틈 용병대는 필립이 마차에 들어가고서야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 수 있었다.
“…저런 건 처음 봤어요. 대장.”
용병대의 막내 오웬이 버틈에게 속삭였다. 버틈 대장은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너 이 새끼,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상한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마라. 저런 사람은 우리와 사는 세상이 다르다. 괜히 접근해서 뭐라도 얻어내려 하는 순간 넌 벌레처럼 죽게 될 거다.”
경험 많은 용병인 버틈은 귀족이라는 인종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영지의 백성들에겐 친절하더라도, 자신들과 같은 용병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칼과 도끼로 무장하고 있어 그렇게까지 함부로 대하지는 못하지만, 같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한다는 건 용병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터였다.
“제, 제가 뭘 했다고 그래요? 아직 말 한마디 섞어 보지도 않았는데.”
오웬이 투덜거렸다.
“지랄하네. 내가 병신으로 보이냐?”
버틈은 오웬의 머리통을 한 대 후린 뒤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문제는 막내인 오웬이 아니라는 걸 그는 몰랐다.
‘…한 번 도전해 볼까?’
용병대의 유일한 여자 대원인 마샤가 묘한 눈으로 필립이 탄 마차를 응시하고 있는 걸 버틈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 밤.
일행은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분지에 야영을 위한 캠프를 설치했다.
다섯 명 정도 되는 짐꾼들은 큰 천막 하나를 썼고, 귀빈용 천막은 기본적으로 2인용이었다.
리즈리엘은 졸지에 같은 천막을 쓰게 된 프리비아를 살짝 째려보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피했다.
‘왜 저 여자가 무섭지?’
이상한 일이었다. 조금 날카롭지만 아름다운 여인임에는 분명한데, 이상하게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느냐?”
마치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프리비아였으나 리즈리엘은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와 함께 있는 것이 불만이더냐? 넌 분명 저 애송이 품에 안기고 싶었을 텐데.”
갑자기 언어폭력이나 다름없는 말이 날아들었다. 리즈리엘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소리세요!”
“아니면 말지 왜 성질을 부리느냐? 잠이나 자거라.”
프리비아는 리즈리엘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로브를 벗고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리즈리엘은 잠깐 혼자 씩씩대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딱히 프리비아에게 악의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고, 필립이 상전처럼 모시는 여인이었으니 마찰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그나저나 몸이… 예쁘네.’
리즈리엘은 프리비아를 홀린 듯 관찰했다. 성적인 매력이 느껴진다기보다는 아름다운 선을 지닌 몸이었다.
프리비아는 그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리며 자신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혹시 만져 보고 싶으냐?”
“아뇨.”
장난감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리즈리엘은 급히 옷을 갈아입고 침낭에 들어갔다.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하자 프리비아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 * *
다음 날 또한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동, 또 이동의 연속이었다.
“…슬슬 준비해야 해요. 아마 오늘쯤 분명 수작을 부려 올 거예요.”
리즈리엘은 잔뜩 긴장한 채 마차를 몰았다. 필립은 그녀에게 캐슬러 무르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마치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빼고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흐아암.”
루아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전날 밤 새벽까지 필립과 수다를 떨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몇 시간만 자도 체력이 회복되는 필립과 달리 아직 오러를 쌓지 못한 그녀는 회복이 더뎠다.
필립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졸다가 마차가 덜컹거리면 깨어나는 걸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프리비아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가씨께서 어젯밤 산책이라도 다녀오신 모양입니다. 하하.”
총관이 농담을 건넸다. 필립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좀 걷기는 했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두 분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여쭤도 됩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아이입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총관은 사람을 대하는 데 매우 능숙한 사람이었다. 말투 또한 차분하면서도 유쾌했고,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
그와 잡담을 좀 나누던 필립의 귓가에 리즈리엘의 다급한 외침이 울렸다.
“모두 정지! 정지하세요!”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린 필립은 곧 서쪽에서 한 무리의 무장한 인원들이 다가오는 걸 보았다.
흙먼지가 구름처럼 일어나는 모습과, 초원을 짓밟는 말발굽 소리에 일행 사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들은 모두 말을 타고 있었으며, 무장 수준이 뛰어난 것을 보아 귀족의 사병들 같았다.
곧 마음을 먹으면 상행을 습격할 수 있는 위치까지 다가왔고, 곧 선두에 선 이가 전투마를 몰고 리즈리엘의 앞에 섰다.
“당신들은 누구죠?”
리즈리엘은 겁먹은 기색 없이 투구를 쓴 기수를 향해 물었다.
“잠시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본인은 베론체 후작 각하의 휘하에서 봉신하는 기사로, 최근 엘페니아 숲 근처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 탓에 이곳에 파견되었습니다. 선량한 엘프를 무력으로 생포에 노예로 팔아넘기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 말입니다.”
“우리는 엘페니아 숲으로 향하는 중이지만, 노예 사냥꾼은 아니에요. 유세프 상회 소속이고, 매년 약속된 거래를 위해 거래 물품을 운반하고 있었죠.”
기수는 필립과 일행을 살폈다. 그가 보기엔 딱히 수상한 구석은 없었다. 일행의 대표로 보이는 리즈리엘은 이런 상행을 맡아서 하기엔 조금 젊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유세프 상회 소속이라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유세프 가문의 직계가 아직 젊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
딱 봐도 귀족처럼 보이는 미남 청년에, 아름다운 여인이 둘, 그리고 어린 소녀까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이들이 극악한 범죄 집단이라고 생각이 들기는 힘들었다.
험상궂은 용병들이야 상행을 한다면 당연히 고용하는 이들이었으니 예외였다.
“…그렇습니까? 이거 실례했습니다. 안전한 상행 되시기 바랍니다.”
기수가 그냥 물러나려 하자 곧 그의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잠깐, 세티안 경. 이대로 그냥 보낼 수는 없습니다. 혹시 모르니 확인이라도 하는 게 어떻습니까?”
나선 사람은 로브로 얼굴을 가린 한 사내였다.
“캘버. 확인이라니? 그 무슨 말인가? 이미 저들의 길을 가로막았는데, 여기서 더 실례하란 건가?”
세티안 경이라고 불린 기수가 의문을 표했다.
“잠시면 됩니다. 경. 경께서는 이런 일이 처음이시겠지만, 노예 사냥꾼들은 의심받지 않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합니다. 게다가 저분들은 물론 귀족이겠지만, 귀족이라고 해서 엘프 사냥을 하지 말란 법은 없잖습니까?”
마치 필립 일행이 엘프 사냥꾼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 캘버라고 불린 로브 사내는 리즈리엘의 불편한 시선을 마주하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말이 너무 격해졌군요. 죄송합니다 제 뜻은 그런 게 아닙니다. 다만 무엇이든 확실히 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죠. 괜찮다면 저희 측 마법사님께서 탐지 마법을 한 번만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리즈리엘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캐슬러 님? 잠시 부탁드립니다.”
곧 푸른색 로브를 입은 캐슬러 무르엘라가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필립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캐슬러 또한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리며 재채기를 하는 척했다.
“크흠. 크흐흠.”
헛기침을 몇 번 뱉은 그는 지팡이를 들었다. 그러자 지팡이 끝의 수정으로부터 빛의 파장이 퍼졌다. 마차 네 대를 전부 뒤덮을 만큼 넓은 범위였다.
짐마차 네 대는 모두 멀쩡했으나, 필립과 루아, 그리고 프리비아가 타고 있던 객마차에서 환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캐슬러 님. 저건 무슨 의미입니까?”
세티안 경이 묻자 캐슬러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저 마차에 마법 물품이 숨겨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경. 빛의 형태를 보니 마차 밑바닥이군요.”
캐슬러 무르엘라.
그는 후작 가문의 자제였으나, 적색 마탑의 쿼터마스터이기도 했다. 적색 마탑을 대신해 이 자리에 있는 그의 말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잠깐 확인해 보겠습니다.”
캘버라는 이름의 사내가 리즈리엘이 반응하기도 전에 앞으로 나섰다. 그가 허리에 찬 검으로 마차의 밑부분을 몇 번 휘젓자, 곧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뭔가가 떨어져 내렸다.
사내, 캘버는 언뜻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 뭔가를 주워들었다.
그건 딱 봐도 묵직해 보이는 족쇄와 수갑 따위의 구속구들이었다.
“…정령을 부르지 못하도록 침묵 마법을 걸어 둔 구속구군요. 이들은 현행범입니다. 세티안 경. 가증스럽게도 저희를 속이려고 한 모양인데….”
필립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지랄을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