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화
* * *
“저희 쪽은 준비가 끝났어요.”
리즈리엘은 상단 마차를 대동하고 필립의 별장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상행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상품이 실린 마차가 세 대였고,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소형 용병대 하나가 고용되어 있었다.
“마침 나도 준비가 끝났어. 슬슬 출발하자.”
필립은 등에 사람 하나 정도는 우습게 들어갈 만큼 커다란 배낭을 메었다. 그의 물건은 거의 들어가 있지 않았고, 거의 다 프리비아와 루아의 옷과 개인 물품이었다.
루아는 본래 데려가지 않으려 했으나 캐슬러 무르엘라와의 만남으로 인해 위험한 상황이 일어날 확률 자체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에 데려갈 마음을 낼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여행은 그 모든 순간이 전부 경험이었다. 안전한 집이나 아카데미가 아닌 다른 곳에서 겪는 일들은 루아의 자산이 될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카밀라도 데려갈까 잠시 고민했던 필립은 그녀의 체력이 상상 이상으로 약하다는 사실을 깨닫곤 얌전히 그녀를 별장에 두기로 했다.
고양이 타니아와 셰릴이 그녀가 외롭지 않도록 함께 시간을 보내 줄 것이었다.
“오, 이제 출발하는 게냐?”
여행용 로브로 갈아입은 프리비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완전히 마법사를 연기하려는 듯 허리에 짧은 지팡이까지 매달고 있었다.
“…저분은 누구세요?”
리즈리엘은 물론 프리실라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그녀와 인상착의는 같았으나 프리비아가 풍기는 분위기가 남달랐다.
마주하고 있으면 존댓말이 저절로 나오는 아우라라고 할까, 리즈리엘은 자신보다 명백히 연하로 보이는 프리비아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프리실라 교관의… 친언니지.”
필립은 눈을 질끈 감고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 그렇군요.”
언니치고는 쌍둥이처럼 외모가 닮았으나 리즈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마법사 한 명이 동행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은 상태였다. 그게 누구든 그리 큰 상관은 없었으나, 필립과 친해 보이는 게 조금 불편하긴 했다.
“리즈 언니. 안녕하세요!”
루아가 배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녀를 본 리즈리엘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마차를 호위하듯 서 있던 용병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잠깐, 애새끼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그는 저 멀리서 봐도 용병 일을 할 것처럼 생긴 대머리 사내였다. 쇠사슬 갑옷에 어깨에는 가죽 견갑을 찼고, 루아의 몸통보다 조금 큰 전투 도끼를 등에 지고 있었다.
애새끼라는 단어에 루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자신에게 시선이 꽂히자 설마 나?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움찔했다.
“이건 이야기가 다르지. 유세프 나으리. 응? 상행 호위라면서? 귀족 호위까지 해야 하면 계산을 좀 다르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용병이 인상을 찌푸리자 리즈리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 만한 사람들이 왜 이런 유치한 기 싸움을 벌이려는 거야? 필립 앞에서 부끄럽게.’
이번에 고용한 용병대는 이 근방에선 최고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이름은 ‘버텀 용병대’.
그들과는 몇 번이나 함께 일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조그만 마찰이 있기는 했으나 시작부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필립이 순진한 귀족 도련님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내막은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암살 집단 크레센트의 멸망에 필립이 깊게 관여한 걸 아는 리즈리엘로서는 웃기기만 한 일이었다.
필립은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리즈리엘을 바라보았다. 리즈리엘은 짜증스런 표정을 지은 뒤 용병을 노려보았다.
“그러면 당장 꺼지세요.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검술 교관, 그리고 실력 있는 마법사가 있는데 당신 같은 용병들이 꼭 필요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군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근처에서 의뢰를 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녀의 대응을 본 프리비아가 필립의 귓가에 속삭였다.
“…성격이 마음에 드는구나.”
그 모습에 리즈리엘의 짜증이 더해졌다.
용병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계약이 이대로 엎어지면 손해가 큰 건 그들이었다. 조금 정중해진 용병이 눈을 치뜨며 리즈리엘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래서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거요?”
“싫으면 가라고 했죠? 계약을 파기하는 건 당신들이에요.”
“하지만 귀족 호위는 계약 내용에 없었잖소?”
“누가 당신들에게 이 사람들을 지켜 달라고 했나요? 주제를 좀 알고 물건이나 똑바로 지키세요. 고작 용병 주제에 감히 누굴 호위한다는 건가요? 당신들이 무슨 기사단이에요?”
그야말로 토끼가 늑대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꼴이었다. 그들이 비록 전장을 누비는 용병이라지만, 오러를 수련한 필립에겐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따로 좀 더 챙겨 줄 테니 그냥 가시죠. 목숨 내놓고 일하는 사람들인데, 그 정도야.”
필립이 그렇게 말하자 리즈리엘은 움찔했다. 하지만 함부로 그의 의견에 반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말이 통하는 도련님이셨군요. 감사합니다.”
용병들의 안색이 활짝 펴졌다. 그들은 곤란한 상황에 나서 준 필립의 도움에 크게 감사하지는 않았으나, 한고비 넘겼다는 듯 감사의 표시 정도는 하는 듯 보였다.
‘뭐 곧 개고생할 텐데 좀 틱틱거린다고 해서 화낼 것까지는 없지.’
저들을 최대한 배려할 수는 있겠지만, 하는 꼴을 보니 딱히 그럴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곧 일행은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총 네 대. 상품이 실린 마차 세 대와 사람이 탈 마차 한 대였다.
상행의 지휘를 맡아야 할 리즈리엘은 마부석에서 직접 말을 몰았고, 필립과 프리비아, 루아, 그리고 유세프 상단의 총관 한 명이 함께 객석에 탔다.
마차가 출발하자 루아는 바퀴로부터 전해지는 충격을 느끼며 몸을 들썩였다.
“흐익!”
꼬리뼈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꽤 컸기에 루아는 울상을 지으며 엉덩이와 의자 사이에 손바닥을 끼워 넣었다.
“하하, 마차를 탈 땐 몸에 힘을 최대한 빼야 합니다. 아가씨. 덜컥거리는 것에 저항하려 하면 더 아프거든요. 뭐, 나중에는 다 적응이 되어서 그리 아프지 않겠지만요.”
총관은 인자한 인상의 40대 중년인이었다. 루아는 그의 말에 눈을 감고 몸의 힘을 모두 뺐다. 그리고 마차가 돌을 밟고 지나가자 혀를 깨물고 말았다.
“꺄윽!”
필립은 피식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혀 깨물어써여. 교관님.”
루아가 말하자 필립은 킥킥대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거 아프겠구나. 조심했어야지.”
“히잉….”
그때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던 프리비아가 지팡이를 들었다.
“이러면 괜찮을 게다.”
그녀가 지팡이를 대충 휘두르자 루아는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루아의 표정이 편해지자 필립은 묘한 표정으로 프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챙겨 줄 것은 다 챙겨 주는군.’
“뭘 보는 거냐?”
“아닙니다. 간식이라도 좀 드시겠습니까?”
“됐다.”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프리비아를 바라보며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왜 따라오겠다고 한 거지?’
* * *
마차는 자동차와 달리 연료가 있다고 무한히 움직일 수 있는 이동수단이 아니었다. 말들 또한 쉬어야 했고, 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체력을 갉아먹는 놈이었다.
그리고 마차에 오르지 못한 짐꾼들과 용병들 또한 몇 시간에 한 번 정도는 휴식을 취해야 했으니 필연적으로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꼬박 더 움직여야 근처에 다다를 수 있으니, 여기서 푹 쉬어 두는 게 좋을 거예요.”
상단 일행은 이름 없는 어느 강의 중류 근처에 모닥불을 피웠다. 온갖 재료를 넣은 수프가 끓는 냄새가 퍼지고, 용병들 또한 투구를 벗고 땀을 식혔다.
“마차는 어떠니, 루아?”
프리비아가 걸어 준 마법 덕에 루아는 나름 편하게 마차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엉덩이가 아파요….”
“금방 익숙해질 거다. 아직 어색해서 그런 거야.”
짐꾼들과 용병들은 잘 끓인 수프를 나누어 먹었고, 필립과 루아는 리즈리엘이 따로 챙긴 빵과 베이컨 따위로 점심을 해결했다.
프리비아는 딱히 입맛에 맞지 않는지 빵 조각을 조금 뜯어먹곤 남은 걸 루아에게 양보했다.
“더 안 드셔도 됩니까?”
필립이 걱정해 주는 게 꽤 기꺼웠던 프리비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걱정을 하는 게냐? 난 상관없다.”
마치 상전을 모시는 것처럼 프리비아를 대하는 모습에 리즈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필립이 누군가를 저렇게 대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직속 상관이나 다름없는 수석교수에게도 저렇게는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땅을 파서 머무른 흔적을 정리한 필립은 문득 지면이 조금 울리는 걸 느끼곤 고개를 들었다.
“음?”
루아 또한 비슷한 걸 느꼈는지 어느 한 방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 진동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큰 괴물이 와요!”
진동은 점점 가까워졌고, 잠시 후에는 약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그리고 상단 사람들은 곧 강 근처에 자란 나무를 사정없이 부러뜨리며 다가오는 괴물을 보았다.
“오, 오우거다!”
성인 남성을 네 명 이어 붙여도 남을 만큼 커다란 키에, 근육으로 가득한 몸뚱이, 파란빛이 도는 피부.
아름드리 나무를 뽑아 들고 나타난 그것은 거대 괴수 중 하나인 오우거였다.
“…세상에, 저게 뭐람.”
리즈리엘은 질린 표정으로 입을 가렸다.
“투구 쓰고 무기 들어, 이 병신들아!”
“이런 씨발 갑자기 웬 오우거가?”
용병들은 재빨리 움직였다. 베테랑들답게 순식간에 전투 준비를 마친 그들은 곧바로 마차와 짐꾼들을 등 뒤에 세우곤 긴장된 표정으로 무기를 꽉 쥐었다.
―와, 오우거는 오랜만에 봐요. 주인님.
네리아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필립은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삽을 내려놓고 검을 뽑았다.
“…마침 잘됐군. 루아, 잘 봐라. 너보다 힘이 한참 강한 상대를 어떻게 제압해야 하는지 알려 줄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바쁜 탓에 루아의 교육에 좀 소홀했던 필립은 좋은 교보재가 나타나자 교육열로 불타기 시작했다.
거대 괴수를 상대하는 데 오우거처럼 적당한 교보재도 드물었다.
“저,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리즈리엘이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오우거라는 괴수는 본래 훈련된 기사도 둘 이상이 나서야 상대가 가능한 놈이었다.
그 말을 들은 프리비아가 킥킥댔다.
“그건 오우거에게 물어야지.”
리즈리엘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필립이 검을 들고 자신을 지나치자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잘 보렴. 모든 공격에는 힘의 중심이 있단다. 상대의 덩치가 크면 클수록 그 중심 또한 거대해지지. 그만큼 반경은 넓어지고, 동작은 커진다.”
웬 인간 하나가 검 한 자루를 들고 자신과 맞서려 하자 오우거는 손에 든 나무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보통 인간이라면 단숨에 쥐포가 되었을 만큼 강력한 공격이었으나 필립이 그런 것에 당할 리가 없었다.
필립은 이미 오우거의 품 안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검기를 덧씌운 검으로 오우거의 가슴을 크게 가르자, 오우거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태풍을 생각하면 쉽다. 태풍은 그 기세가 대단하지만, 그 태풍을 이루는 핵 근처는 잔바람조차 잘 불지 않을 만큼 평화롭지. 공격의 방향과 속도를 읽을 수 있다면 곧바로 안쪽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루아가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구경하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한 필립이 공중에 뛰어올라 오우거의 턱에 돌려차기를 한 대 맞췄다.
오우거의 두꺼운 목도 그 충격을 제대로 흡수하진 못했는지 괴수의 큰 동체가 비틀거렸다.
“꾸워어어어!”
“너도 여기서 죽고 싶진 않잖아. 가라. 응?”
딱히 오우거를 죽일 생각이 없던 필립은 오우거가 광폭화 상태에 빠지지 않기를 바랐다. 만일 이 장소가 오우거의 영역 안쪽이라면 죽여야 할 테고, 그렇지 않다면 도망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가라니까? 말을 안 듣네.”
오러를 담은 로우킥이 오우거의 나무줄기 같은 정강이를 한 차례 더 가격했다.
“끄워어어어어!”
오우거는 비명을 질렀다. 필립은 추가타를 더 넣지 않고 오우거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보통 오우거는 지능이 낮다곤 하지만, 머리통에 비해 지능이 낮을 뿐 아예 멍청하진 않았다.
필립에게 살의가 없음을 알아차린 오우거는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들고 있던 나무를 내던지곤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필립은 그 거대 괴수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루아, 잘 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