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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61화 (61/119)

061화

* * *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여름방학은 6월 중순부터 8월까지, 두 달에 가까운 기간이었다. 꽤 길다고도 할 수 있었으나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는 일단 에어컨 같은 것도 없고, 아이들이 가문의 교육을 받을 시간 또한 필요했으니까.

학생들은 보통 본가로 돌아가거나, 본가가 매우 멀거나 혹은 분쟁 중일 경우 아카데미에 머무르며 같은 신세인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여행부의 3학년 학생들, 쟈니스와 셰릴, 그리고 스테판 중 본가로 돌아가는 이는 오직 스테판뿐이었다.

셰릴은 근로 장학생이었기에 방학에도 아카데미에서 일해야 했고, 쟈니스의 경우 그녀가 본가로 가는 게 아니라 그녀의 형제자매 중 누군가가 쟈니스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아카데미로 찾아오곤 했다.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구나. 쟈니스.”

여름방학을 앞두고 부실에 모인 여행부 일동은 쟈니스가 콧노래를 부르며 어린아이처럼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자 묘한 눈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필립의 질문에 쟈니스는 무슨 소니냐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아니거든요? 하나도 기분 안 좋아요.”

“…그렇구나.”

필립은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기분이 좋은 이유를 말하고 싶어 입술이 근질거리던 쟈니스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방학을 앞두고 너희를 부른 건, 앞으로 여행부와 함께할 새 부원들을 소개하는 것과 동시에 너희에게 전달할 말이 있어서란다.”

필립의 공지에 셰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 부원이요?”

“그래. 다들 들어오렴.”

필립이 지시하자 들어온 건 루아의 친구들이었다. 헤일리 바로운과 아름다운 소녀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쟈니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공주님? 그리고 헤일리 바로운?”

카밀라 공주는 아카데미 학생이 되었으나 아직 교양 수업 몇 가지만 조금 들을 뿐이었다. 듣기로는 아직 진로를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사실 공주인 그녀가 검술이나 마법 둘 중 뭘 배우든 그리 큰 의미가 있지는 않겠지만, 그녀 나름대로 꽤 고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쟤가… 아, 아니, 죄송해요! 저분이 공주님이셔?”

생각 없이 말을 뱉었던 셰릴이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찰싹 때리며 정정했다. 그녀는 쟈니스에게 이미 들은 게 있었다.

스테판 또한 그건 마찬가지였기에 공주의 존재 자체에 놀라지는 않았으나, 카밀라가 동아리 활동 같은 것을 한다는 사실 자체는 꽤 놀라운 일이었다.

필립은 그의 옆에 선 카밀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모독죄에 해당하는 그 불경한 행위를 본 아이들의 동공이 쉴 새 없이 흔들렸으나, 필립이나 카밀라나 별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건 한 가지를 의미했다.

필립은 그래도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카밀라에 대해선 너희도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녀의 신분이 평범하지는 않지만,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한 명의 학생에 불과하니 너희가 잘 돌봐주길 바란다. 그리고 헤일리 바로운 또한 다음 학기부터는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으니 또한 함께 잘 지냈으면 좋겠구나.”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헤일리 바로운입니다.”

헤일리는 정중히 3학년 학생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 점잖은 모습에서 대귀족의 자제다운 품격이 느껴졌기에 셰릴과 스테판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보고만 있어도 주눅이 들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카밀라 벨로페르 칼라리아에요. 잘 부탁드려요. 선배님들.”

카밀라는 여유롭게 인사했다. 그녀에게서 기품 이상의 뭔가를 느낀 셰릴은 그야말로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카밀라의 눈빛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심과 묘한 카리스마가 공존하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내가 공주님과 같은 자리에 있다니.’

하지만 쟈니스는 달랐다. 그녀는 이미 공주의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추태를 루아와 함께 목격한 사람이었다.

‘역시 왕가의 핏줄은 좀 다른 걸까? 내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며칠은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을 것 같은데.’

조금 다른 의미의 감탄이었다.

“그리고 전달할 건, 나는 방학 동안에도 아카데미에 남을 테지만 방학이 시작되고 일주일 정도는 외지에 나가 있을 예정이다.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거나, 혹은 날 방문하고 싶을 때 참고하도록. 그러면 다들 방학 잘 보내거라.”

필립이 아카데미에 남을 거라고 말했을 때 가장 기뻐한 건 셰릴과 쟈니스였다. 그녀들 또한 아카데미에 남아있을 예정이었다.

아이들끼리 친해질 시간을 주기 위해 먼저 나가려던 필립은 쟈니스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교관님?”

“왜 그러니?”

“잠깐 할 말이 있어서요.”

쟈니스는 필립을 따라 복도로 나왔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에 침을 바른 뒤 입을 열었다.

“그… 제 오라버니랑 새언니가 방학 동안 집에 머무르게 되었거든요. 어제부터요.”

쟈니스가 조금 수줍어하자 필립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잘됐구나.”

“오라버니에게 교관님 이야기를 했더니…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교관님께서 불편하시다면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딱히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는 부탁이었기에 필립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혹시 오늘 만날 수 있나?”

쟈니스의 오빠라고 하면 필립도 아는 인물이었다.

캐슬러 무르엘라.

그는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평민 출신의 여검사와 결혼한 유명인이었다. 음유시인들이 노래 소재로도 써먹을 만큼 널리 알려진 로맨티스트였기에 딱히 거부감은 없었다.

“물론이에요!”

쟈니스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신이 너무 푼수처럼 웃었다는 걸 깨닫곤 다시 표정을 굳혔다.

* * *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여동생을 둔 오빠는 보통 두 부류로 나뉜다.

데면데면하거나, 혹은 딸처럼 아끼거나.

캐슬러 무르엘라는 #두 번째(후자의) 부류였다.

무르엘라 가문이 쟈니스를 위해 구입한 저택에 방문했을 때, 캐슬러 무르엘라는 자신의 아내인 신시아 무르엘라와 함께 필립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오스왈드 교관님. 제 동생의 목숨을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온화한 인상의 서른 살 청년이었다. 한참이나 어린 필립에게도 정중했고, 그보다 여섯 살이 어린 신시아 무르엘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 아가씨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정말 감사해요.”

“아닙니다. 교관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었습니다.”

필립이 겸양의 말을 뱉자 캐슬러 무르엘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세상이 그렇게 당연하게만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자아이를 위해 뱀파이어와 맞서는 게 당연하다면 세상에 나쁜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캐슬러는 꽤 철학적인 인물로 보였다. 교복에서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은 쟈니스가 얼굴을 붉히며 캐슬러를 말렸다.

“그만둬요. 오라버니. 또 어려운 이야기나 늘어놓으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열여섯이 된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캐슬러가 쟈니스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그만 핏덩이를 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았다. 알았어. 아무튼, 가문을 대표해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교관님. 조만간 가문에서 답례품을 하나 전달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그 말에 필립은 고개를 저었다.

“쟈니스가 저렇게 건강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보답 같은 건 바라지 않습니다.”

“교관님이야말로 교육자의 귀감이십니다.”

크게 감탄한 캐슬러는 곧 하녀에게 일러 술병 몇 개를 가져오도록 했다. 병에 타르로 붙여 놓은 라벨을 본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아니, 저건?’

“언젠가 교관님 같은 분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마음에, 모은 것 중 가장 귀한 포도주는 어딜 가든 항상 들고 다니는 편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에밀 파노이가 몇 번 언급한 적 있는 술이었다.

“제 할아버지께서 물려 주신 놈입니다. 베루시아라고, 몇 년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맛은 정말 좋을 겁니다. 며칠 후에 일정이 있으니 과음하지는 못하겠지만, 교관님 같은 분을 만나서 술 한 잔 기울이지 않는 건 죄악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보?”

신시아 무르엘라가 도끼눈을 뜨고 캐슬러를 째려보았으나, 캐슬러는 조금 움찔했을 뿐이었다.

“적당히만 즐길 거야. 내 사랑. 그러지 말고 당신도 함께 마시는 게 어때?”

그가 술병을 막은 마개를 따면서 말하자, 향기로운 냄새가 응접실 전체에 퍼졌다. 그 향을 맡고서도 거절할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필립은 저 술이 수석교수 봉급을 오 년 내내 모아도 살 수 없을 만큼 비싼 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건 마시지 않는 게 손해였다.

“교관님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다면요….”

신시아 무르엘라는 자신의 출신을 꽤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필립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부인께서 함께 자리하신다면 훨씬 기쁠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 술판이 벌어졌다.

필립과 캐슬러는 죽이 꽤 잘 맞았고, 그런 사람들의 첫 만남이 으레 그렇듯 과음하지 않겠다는 처음의 결심은 어디론가 날아갔다.

금화 수십 개짜리 고급 포도주와 위스키를 여섯 병이나 비우고 난 뒤, 캐슬러는 거의 만취한 상태가 되었다.

마법사 출신인 그는 정신력이 꽤 강한 편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육체는 연약한 마법사의 그것이었다.

“…그래… 동생. 나이가 스물둘이라고? 그 정도면… 우리 쟈니스하고… 어느 정도 나이가 맞겠군….”

술로 부릴 수 있는 마법 중 하나가 바로 상대를 부르는 호칭을 바꾸는 것이었다. 캐슬러가 필립을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교관님에서 동생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필립은 적당히 웃어넘겼다. 필립의 몸뚱이는 기본적으로 알코올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독한 술을 아무리 마셔도 조금 어지러울 뿐 이성은 멀쩡했다.

캐슬러는 그런 필립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그런 태도거든… 내가 방금 동생을 떠본 거야… 알지? 딸꾹!”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시아 무르엘라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취했어요. 내 사랑. 교관님께 그게 무슨 실례인가요?”

“실례… 라니? 지금 얼마나 즐거운데… 그 무슨 말이에요? 아쉽다, 아쉬워. 이번에 맡은 일만 아니었어도 밤새 마실 수 있었는데… 그 나쁜 엘프 사냥꾼 놈들이….”

남편이 일 이야기를 내뱉자 깜짝 놀란 신시아 무르엘라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보!”

정신이 번쩍 든 캐슬러가 머리가 깨질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런, 말실수를 했나 보군. 하지만 딱히 비밀도 아닌데 소리를 지를 것까지는 없잖아요.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손을 휘저으며 필립에게 사과했다. 그가 필립을 부르는 호칭은 어느새 교관님으로 돌아와 있었다.

“미안합니다. 분위기를 깨서. 사실 유세프 상회 쪽에서 일을 하나 맡았어요. 이렇게 끝내면 교관님께서 찝찝하실 테니 말씀드리죠. 엘프를 노리는 노예 사냥꾼들을 생포하는 일인데, 델루안 유세프라고, 다음 대 상회의 주인이 될 거라고 여겨지는 여자에게서 받은 부탁이죠.”

그 말을 들은 필립이 눈을 깜빡였다.

“델루안 유세프 말입니까? 수도 칼라리아 지부의 지부장?”

“오, 이미 안면이 있습니까? 사실 그녀에게 교관님을 소개하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다음 대 회주와 미리 안면을 터놓으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으윽, 내 머리야.”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다니…?’

필립은 감탄했다. 델루안이라는 여자의 올해 사주가 궁금해질 정도로, 그녀는 운이 없었다.

캐슬러가 저 말을 내뱉는 그 순간 필립은 델루안의 계획이 무엇인지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저, 캐슬러 님. 이런 말씀 드리기 좀 실례일 수도 있는데….”

“아, 말씀하십시오.”

필립은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입속에서 술맛이 났다.

“그 여자 곧 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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