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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60화 (60/119)
  • 060화

    * * *

    루아는 목검을 든 채 헤일리 바로운과 마주 보고 있었다.

    “서로 다치지 않게 주의해라.”

    디아나 파렌할 교관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렸으나 루아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헤일리의 움직임을 천천히 살폈다.

    “잘 부탁한다.”

    필립에게 마음의 빚을 가진 헤일리는 어색한 표정으로 루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변경백의 아들이 평민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아무리 대련을 앞두고 있다 해도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기에 학생들이 수군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대련을 받아줘서 고마워. 헤일리.”

    루아가 생글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헤일리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그려졌다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그는 지금껏 살아오며 여러 상대와 대련을 했으나, 저렇게 해맑은 상대는 처음이었다.

    ‘저렇게 웃는 애를 공격하라고?’

    목검을 겨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 만큼 순진하고 귀여운 얼굴.

    헤일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자신을 다잡았다. 저렇게 검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해도 요즘 1학년 사이에선 나름 무서운 성장세를 보이는 학생이었으니까.

    “그래. 선공은 양보하겠다.”

    “응!”

    헤일리가 선공을 양보하겠다고 말하자 루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헤일리의 빈틈을 살폈다.

    필립은 긴장된 표정으로 루아와 헤일리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아직 수준 차이가 많이 나긴 하네.’

    비록 루아의 재능이 불가해의 수준이라곤 하지만, 헤일리 바로운 또한 당대의 천재 중 한 명.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검을 수련한 헤일리를 지금의 루아가 상대할 수는 없었다.

    현재 헤일리는 어지간한 교관보다 수준이 조금 낮은 정도였다.

    “….”

    루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헤일리에게서 빈틈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루아는 어쩔 수 없이 필립과 놀 때 쓰던 기술을 선택했다.

    앞으로 크게 한 발 내딛자, 헤일리는 루아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목검을 모로 세웠다.

    그 순간 루아의 무게 중심이 왼쪽으로 크게 쏠렸다. 누가 봐도 큰 공격을 할 것만 같은 기색이었다.

    ‘…응?’

    그런데 그녀의 발끝과 시선이 이상했다. 루아의 시선은 헤일리의 오른쪽 목덜미를, 발끝은 왼쪽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루아 정도의 수준에선 결코 나올 수 없는 완성도의 페이크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집중력을 조금 잃어버린 루아의 동작이 그만 커지고 말았고, 헤일리는 가까스로 반응했다.

    “꺄악!”

    다급한 나머지 힘이 너무 많이 실린 탓에 둘의 목검이 마주치는 순간 루아는 비명을 지르며 목검을 놓쳤다.

    멀리 날아가려던 목검을 필립이 뛰어올라 낚아챘다.

    “괘, 괜찮나?”

    루아를 다치게 할 생각이 없었던 헤일리가 당황하며 루아에게 다가갔다. 루아는 얼얼해진 손바닥을 감싸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난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으나 많이 아파 보이는 표정이었기에 헤일리는 침을 꿀꺽 삼킨 뒤 필립의 눈치를 살폈다.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헤일리를 노려보다가 급히 시선을 피했다. 헤일리가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헤일리를 노려보는 소녀 두 명이 있었다. 올리비아와 아니스였다.

    “그만. 대련은 끝났다. 오스왈드 교관님은 학생이 다쳤는지 좀 확인해 주시고, 나머지 학생들은 교수님 수업을 들을 준비를 해라.”

    “네! 교관님!”

    1학년 1학기의 끝이 보이는 이 시점에서 학생들의 기강은 상당히 잘 잡혀 있었다. 사실 필립이 별로 한 건 없었고 디아나 파렌할이 아이들을 휘어잡은 셈이었다.

    디아나 교관이 아이들을 인솔해 강의실 쪽으로 사라지자 필립은 루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살폈다.

    “어디 손 좀 보자.”

    “네에….”

    루아의 손바닥은 충돌로 인해 조금 부어 있었다. 이건 별것 아닌 부상이었기에 상관없었으나, 조금 큰 나무 가시가 박혀 있는 게 문제였다.

    “히잉….”

    필립은 루아의 표정을 보곤 하마터면 피식 웃을 뻔했다. 설마하니 꼬맹이 시절부터 산을 타고 놀던 루아가 이것보다 더 심한 상처를 입은 일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녀는 지금 엄살과 어리광을 동시에 피우고 있는 거였다.

    나쁜 현상은 아니었다. 쌍둥이인 루엔과 자신을 돌봐준 ‘아저씨’라는 인물에게로 향했던 의존심이 거의 모두 필립에게로 넘어왔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이런 귀여운 수작에는 속아주는 것이 예의였다.

    “많이 아팠겠구나.”

    필립은 루아의 손바닥에서 가시를 빼낸 다음 수통의 물로 상처를 깨끗이 씻었다. 그리곤 상비하고 있던 붕대를 조금 잘라서 감아 주자 처치가 끝났다.

    “…헤일리는 너무 강한 것 같아요. 교관님.”

    루아는 조금 기가 죽은 것 같았다. 필립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애는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검을 잡았으니 당연하지. 너는 검을 배운 지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잖니? 네가 이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다. 하지만 네가 조금 더 침착했다면 헤일리가 크게 창피를 당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거든.”

    “그건 싫어요. 헤일리는 친구잖아요.”

    “하지만 이기고는 싶잖니?”

    “그건 그렇지만요….”

    필립은 그녀가 겪을 자기모순을 해결해 줄 수는 없었다. 그는 루아를 강의실까지 데려다준 뒤 디아나 교관을 찾아갔다.

    “잠시 마법 학부 쪽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필립의 말에 디아나 교관은 쿡쿡 웃으며 은근한 시선으로 필립을 바라보았다.

    “마법 학부의 그 교관을 만나러 가는 겁니까? 요즘 둘이서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는 마법 학부 교관에게 물어보니 대단히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아무래도 나이가 같고 하다 보니 남 같지가 않더라고요. 그녀와 제가 친한 사이인 건 맞지만,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닙니다.”

    필립의 대답에 디아나 교관은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그렇게 시작하더란 말입니다. 후훗.”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펠리시아에겐 누가 불러서 갔다고 전할 테니 잘 만나고 오십시오.”

    디아나 교관이 그렇게 말하자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 * *

    필립은 프리실라가 묵고 있는 교직원 기숙사의 문을 노크도 없이 열었다.

    대답하기 귀찮으니 노크하지 말라고 프리비아가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제 밤새도록 야간 실험에 참여한 덕에 오늘 하루는 비번이었다.

    “안녕하세요. 프리비아 님.”

    필립의 인사에 드래곤의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또 무슨 일이냐?”

    문득 필립은 그녀에게 장난을 쳐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프리비아 님이 보고 싶어서요. 그러면 안 됩니까?”

    침대에 누워 있던 프리비아가 벌떡 일어났다.

    “요 건방진 애송이가 드디어 겁을 상실했구나. 내가 네놈이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만날 수 있을 만큼 한가한 인사로 보이느냐?”

    짐짓 화난 듯한 목소리였으나,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필립은 어쩐지 느낄 수 있었다. 프리비아는 부스스한 암청색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필립을 째려보았다.

    “…솔직히 바쁘지 않으신 건 사실이잖습니까.”

    필립이 정곡을 찌르자 프리비아는 그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크흠, 아니니라. 나는 충분히 바쁘다. 그래서, 정말로 순수하게 날 보러 온 게 맞느냐?”

    “그건 아니고, 알려드릴 것과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프리비아는 직접적인 도움은 베풀지 않더라도 지식과 지혜를 빌려주길 망설이진 않는 드래곤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은근히 필립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걸 즐기는 것처럼도 보였다.

    “먼저 다음 주에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곧바로 엘프들이 사는 곳에서 세계수의 잎을 얻어 올 생각입니다. 친구 중에 상인이 한 명 있는데, 그 친구가 마침 엘페니아 숲으로 상행을 떠난다는군요.”

    “그 도도한 것들이 목숨보다 아끼는 세계수의 이파리를 남에게 함부로 내어주진 않을 테니 직접 찾아가는 게 맞겠군. 하지만 네놈이 직접 간다고 해도 내어 주리라는 보장은 없지.”

    프리비아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나도 슬슬 답답하니, 도움을 좀 주도록 할까.’

    하도 주변 사건에 휘말리는 필립의 성장세가 답답하던 참이었다.

    “엘페니아 숲이라면 잘됐군. 그곳의 엘프들을 보호하는 드래곤이 내 오랜 친구이니, 내가 함께 간다면 쉽게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필립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함께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이건 이미 약속이 된 거라 포탈로 단숨에 이동할 수 없습니다. 이틀 정도 시간을 들여 마차로 이동해야 합니다만. 그리고 사실 이 상행에는 얽힌 일이 좀 있습니다.”

    프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얽힌 일이라니? 뭘 말하는 게냐?”

    “그게 그러니까…….”

    필립이 유세프 상회의 후계자 구도와 이번 상행에서 예상되는 충돌을 천천히 설명하자 프리비아의 눈에 점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뭐? 상회 후계자들끼리의 암투라고?’

    어린 시절부터 악연으로 엮인 자매와의 정치적 생명을 건 사투라니, 드라마틱한 자극에 목말라 있던 프리비아에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기대감을 억누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런 건 괜찮다. 설마하니 내가 그런 일에 신경이나 쓸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강력한 드래곤께 인간 사이의 일은 별것 아니시겠죠.”

    필립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딱히 프리비아와 함께 가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어찌 보면 상전에 가까웠으나, 다루기 힘든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그녀와 함께 행동한다면 불편한 것보다는 편한 점이 더 많았다. 그녀는 답답한 게 있으면 자기가 나서서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물론 답답하지 않다면 절대 먼저 나서지 않을 테지만.

    “아, 그리고 제가 오늘 아침에 이런 걸 받았습니다.”

    필립이 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쓰인 편지 한 장과,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물빛 구슬 하나였다.

    편지의 내용은 한 줄이었다.

    째 성 함 니 다 – ㅠ나 쓰ㅁ

    마치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쓴 반성문 같은 느낌이었다.

    표음 문자인 공용어를 소리나는 대로 쓴 문장.

    필립은 이 편지를 쓴 사람이 요정 유나라는 건 대충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물빛 구슬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는 몰랐기에 프리비아를 찾아온 것이었다.

    “호오.”

    구슬을 받아든 프리비아는 그녀답지 않게 탄성을 뱉었다. 그녀로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이게 뭐 하는 구슬입니까?”

    “이건 그 요정 년을 구성하는 핵의 일부분이다. 이런 걸 넘기다니,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했나 보군. 인간으로 치면 심장의 삼분지 일을 떼어서 넘긴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내가 너무 심했나?’

    그 말을 듣자 필립은 자신이 그녀에게 너무 심하게 대한 건 아닐까 잠깐 고민했으나, 전혀 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은 계기만 되었을 뿐이었다.

    ‘공주를 벌거벗겨서 공중제비를 돌렸는데 고작 그 정도 혼났으면 싸게 먹혔지.’

    “그러면 이걸로 뭘 할 수 있습니까?”

    “많은 걸 할 수 있지. 네게 당장 도움이 될 만한 건 네가 가진 에고 소드를 강화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엥? 네리아를 말입니까?”

    프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요정과 에고 소드의 탄생은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모두 어떠한 현상에서 깨어나는 자아인 셈이니까. 요정은 자연 현상에서 탄생하고, 에고 소드는 인간이나 다른 고등 생물의 행위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그 구슬을 녹여 네가 가진 검에 스며들도록 한다면 네 에고 소드의 자아는 더욱 견고해지고, 또한 다른 힘을 각성할 수도 있느니라.”

    ‘자아가 더 세진다고? 지금보다 더?’

    필립은 이 부분에서 아주 잠깐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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