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 * *
“…다른 건 제가 어떻게든 구할 수 있는데, 세계수의 잎은 엘프 측과 직거래를 해야 해요. 사실 엘프 사회에서는 그렇게 귀한 물건이 아닌데, 세계수와 관련된 물건은 반출이 너무 어려워서요. 수취인이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구경도 못 하게 하니까요.”
“그러면 결국은 내가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그쪽으로 상행을 가면 보통 얼마나 걸리나?”
“늦으면 열흘 정도는 걸리죠.”
“어쩔 수 없이 방학을 노려야겠군. 혹시 그쯤으로 일정을 조정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어차피 그 근처로 이동할 예정이기도 하니 하루 이틀쯤은 조정할 수 있죠. 함께 갈 거예요?”
필립은 응접실에서 리즈리엘과 영약 재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프리비아가 말한 다른 재료들은 돈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나 세계수의 잎은 엘프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면 구경조차 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제 언니는 그 상행에 뭔가 수작을 부릴 거예요. 뭐, 약자의 의무죠. 뭔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이겨내길 바라며 도전하는 게.”
리즈리엘은 차를 홀짝이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녀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 쿡쿡대며 필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슬슬 당신이 가진 황금 인장을 드러낼 때가 온 것 같아요.”
“그건 네가 알아서 해. 네 계획에 따를 테니까. 상인의 생리는 상인이 잘 아는 법이니까.”
“언니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을 놓을 거예요. 그 빌어먹을… 아차차, 언니는 항상 제게 적대적이었죠. 언젠가 제 모든 것을 빼앗고 창녀로 팔아버리겠다고 한 적도 있어요. 그때 제 나이가 고작 열여섯이었는데.”
이야기를 듣던 필립은 리즈리엘이 언니에게 가진 적대감이 꽤 크다는 걸 눈치챘다.
“전 어릴 적부터 딱히 유세프 상회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진 빠지는 상행 같은 건 한 번도 좋아하지 않았다고요. 내 언니, 델루안 유세프에게서 절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어야만 했죠. 오빠와는 그래도 가족 사이의 정 같은 게 있었지만, 언니는 절 이용할 생각뿐이었거든요.”
속 깊은 이야기를 토해내는 리즈리엘을 보며 필립은 무거운 숨을 뱉었다.
“고생이 많았네.”
그런 형제를 둔다는 건 무엇보다 끔찍한 일 중 하나일 터였다.
“욕심이라는 단어를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빚어낸다면 딱 그 여자의 모습이 될 거예요. 정말 궁금하네요. 평생 가졌던 걸 모두 잃었을 때 언니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대체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필립은 따져 묻지 않았다. 리즈리엘의 표정에서 엿보이는 희열만 봐도 단단히 준비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런 건 최대한 묵혔다가 나중에 계획이 완전해지고 들어야 재밌지. 스포일러는 중범죄거든.’
“그래. 사람 죽여야 하는 것만 아니면 뭐든 도와줄 테니, 잘 해봐.”
“…고마워요. 당신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리즈리엘은 앞으로 몸을 기울여 필립의 손을 잡았다. 필립은 그녀가 단지 감동했을 뿐이라 생각했지만, 리즈리엘은 그 정도로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개수작은 제대로 결과를 도출해 내기도 전에 누군가의 방문으로 인해 가로막혔다.
“교관니이임!”
다급한 루아의 목소리가 필립의 몸을 움직였다.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리자 몸에 수건만 감은 루아의 모습이 보였다.
필립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루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공주님이 울어요! 공주님 엄마 어디 있어요?”
“응?”
난데없이 왕비를 찾는 루아의 말에 놀란 필립은 잠깐 생각하더니 곧 루아가 왜 저러는지 추측해 내었다.
‘공주가 엄마를 찾으면서 운다고?’
“…빨리 가보자.”
“어어, 같이 가요.”
필립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즈리엘 또한 잠깐 인상을 찌푸리다가 급히 따라나섰다. 개수작이 방해받은 건 둘째치고 공주가 엄마를 찾으며 우는 광경을 놓치기는 싫었다.
그건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구경이었으니까.
* * *
“흑…흐으응…엄마아…훌쩍.”
카밀라 벨로페르 칼라리아는 루아의 침대에 얼굴을 묻고 훌쩍였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으나 그녀 또한 낯선 환경이 두렵던 차였다.
그런 와중 평생 겪어 본 적 없는 물리적 학대 비슷한 것을 당했으니 멘탈이 완전히 깨져 버린 것이었다.
필립과 리즈리엘은 루아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카밀라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그러니까, 그게….”
말없이 카밀라를 위로하고 있던 쟈니스가 곤란한 표정으로 목욕탕 요정의 만행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요정이 그랬다고?”
필립은 벌레 씹은 표정으로 목욕탕 쪽을 노려보았다.
‘저 나잇값이라곤 할 줄 모르는 지박령이….’
필립은 침대에 걸터앉아 카밀라의 상태를 살폈다. 필립이 가까이 오자 카밀라의 울음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너 괜찮니?”
“…이게 괜찮아 보여요…?”
“아닌 것 같구나.”
“그러면 왜 물어보는 거예요?”
반응이 날카로운 게 보통 끔찍한 경험이 아니었던 듯했다. 필립은 빨개진 눈으로 훌쩍거리는 카밀라를 보며 그녀 또한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널 괴롭힌 요정은 신기루 호수에서 수천 년을 살아온 요정이다. 인간의 법도가 통하지 않는 존재지. 이 일에는 분명 네 잘못도 있어.”
필립이 그렇게 말하자 서러워진 카밀라의 목에서 끄윽, 하고 울음이 다시 치밀어 오르려 했다.
“하지만 내 집에서 내게 보호받아야 할 널 괴롭혔으면 안 됐어. 내가 단단히 혼쭐을 내 주마. 함께 가서 구경해도 되는데 어떻게 할래?”
필립의 말이 이어지자 카밀라의 붉어진 눈에 복수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갈래요.”
그녀는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이를 악물었다. 살면서 이렇게 분노해본 적이 없었다. 존귀한 핏줄로 태어나 생전 처음 보는 평민 소녀 앞에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치를 당한 셈이었다.
‘절대 용서 못 해.’
“그래. 많이 놀랐지? 내게 단단히 혼이 나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못할 거다.”
필립은 즉시 카밀라를 데리고 목욕탕으로 올라갔다. 요정 유나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그녀 또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으나, 필립은 그녀가 수천 살이나 먹은 요정이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카밀라와 필립이 함께 올라오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하고는 다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저, 저 아가가 먼저 제게 버릇없이 굴었어요. 전 단지 조금 놀려준 것밖에 없다구요.”
필립은 한숨을 푹 내쉰 뒤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입 다무세요. 얌전히 지내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당신에게 무례를 범했든 어쨌든, 이 집에 들어온 이상 내 보호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조금 겁만 주고 내려놨어야죠. 그 정도라면 저도 이해하고 넘어갔을 텐데.”
단호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필립은 그녀를 몰아붙였다.
“하, 하지만….”
“하지만 같은 건 없습니다. 당신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했어요. 내게 허락도 받지 않고 말이죠. 이렇게 되면 당신을 보호하는 걸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군요.”
그 말에 요정 유나는 사색이 되어 허둥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여기 있어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건 당신이 날 존중할 때의 이야기죠. 나는 방금 일어난 일에서 당신이 날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나를 존중하지도 않는 이와 한 지붕 아래서 살아갈 자신이 없고요.”
유나에겐 저 말이 드래곤에게 자신을 넘겨 영약으로 바꿔 먹겠다는 말로 들렸다. 공포에 질린 요정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먹였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제 근원은 당신에게 귀속되어 있어요. 당신과 떨어지면 저는… 나는 끔찍한 최후를 맞고 말 거예요. 그러길 원하시나요?”
필립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길 원하지는 않지만, 이젠 제 알 바가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의 운명은 이제 제 소관에서 벗어날 테니까요. 난 당신을 해치거나, 혹은 이용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완전히 선을 그으려는 듯한 필립의 태도에 유나는 다급해졌다. 그녀는 필립의 저 태도를 마주하고서야 필립의 근처에 머물게 된 것이 얼마나 좋은 결과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적당한 무관심. 그리고 적당한 호의.
목욕탕에 들를 때마다 그녀와 잡담을 나누던 필립의 모습은 간데없었다.
만약에 드래곤을 만나지 않고 근처 호수나 강에 자리를 잡았다면 그녀는 지금쯤 어느 영적인 존재의 피와 살이 되어 있었을지도 몰랐다.
운이 좋다면 언젠가 힘을 되찾을 때만을 기다리며 기약 없이 도망치기를 반복했을 터. 그리고 이곳에서 쫓겨나는 순간 그 무서운 드래곤의 시선에 바로 노출될 것이 분명했다.
‘난… 저 사람 곁에 있어야 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요정 유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용서를 빌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필립은 그녀가 용서를 구하기 시작했음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당신이 목욕탕을 부숴 놨어도, 혹은 이 집 전체를 주저앉혔다 해도 용서했을 겁니다. 그게 실수라면요. 하지만 내 집에서 내 보호를 받는 사람을 함부로 괴롭혔다는 건 내 위에 서겠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요.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제발요. 네?”
유나는 지켜보던 카밀라마저 안쓰러운 감정이 들 정도로 애처로운 목소리로 빌었다. 그녀는 요정에게 가졌던 적대감이 점점 옅어지는 걸 느끼곤, 필립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필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용서는 내가 당신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호의가 될 겁니다. 나는 당신이 절 이용하려는 걸 한 번 용서했고, 또 당신이 제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번 일을 용서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이 아이에게 사과하세요.”
유나는 순간 얼굴이 환해졌다. 그녀는 짧은 다리를 움직여 카밀라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들고 끅끅대며 울었다.
“미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히끅.”
마음이 약해진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아요.”
“앞으로 지켜보겠습니다.”
필립은 그렇게 말하곤 카밀라의 손을 붙들고 목욕탕을 나섰다.
혼자 남은 요정 유나는 한참 동안 훌쩍이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너무해.”
사실 그녀 또한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는 요정이었기에, 필립의 행동이 딱히 너무한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그저 서러울 뿐이었다.
요정은 수천 살을 먹더라도 정신연령이 그리 높아지는 종족이 아니었다. 까마득한 고대로부터 존재하던 요정들에게도 아이 같은 면이 있었고, 그들 또한 여전히 장난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천 년 동안 쌓인 삶의 경험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요정 유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필립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거라곤 애초부터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에게 필요한 건 앞으로 뭔가 잘못되더라도 쫓겨나지 않을 방법이었다.
“…어쩔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의 명치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마치 물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녀의 손은 아무 저항 없이 피부와 근육을 뚫고 심장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음 순간 손을 빼었을 때, 그녀의 손아귀에는 손가락 두 마디 직경의 물빛 구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유나는 그것을 이용해서 필립의 호의를 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