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화
* * *
농노의 자식이든, 평민이든, 혹은 시골 귀족이든 왕족을 직접 보는 건 평생에 한 번 일어나기도 힘든 일이었다.
물론 무르엘라 후작 가문의 딸쯤 되면 어린 공주의 말동무를 위해 몇 번 정도 왕궁에 방문하기도 했으나, 당시 어렸던 쟈니스에게 그건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공주님께 무례해서는 안 된다.’
‘함부로 몸에 손을 대서도 안 되고, 공주님의 기분을 잘 살펴야 한다.’
하녀와 집사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와중에 그녀가 공주와 우정을 쌓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오…오랜만에 뵈어요. 공주님.”
쟈니스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카밀라 공주 또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무르엘라 영애. 5년 전에 만난 이후로 오랜만이네요.”
왕족과 권세가의 영애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눈치챈 필립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나섰다.
“카밀라는 내일부터 아카데미에 다니게 되었다. 곧 네 후배가 될 테니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네? 공주님께서 아카데미에요?”
타국의 왕족은 몰라도 프리비아 아카데미가 자리한 칼라리아의 왕족이 프리비아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전례가 거의 없는 일이었기에 쟈니스는 절로 벌어진 입을 가려야 했다.
그런 와중 쟈니스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그런데 왜 공주님을 이름으로 부르시는…?”
아무리 필립이 교관 신분에 오스왈드 백작 가문의 영식이라고 해도 왕의 금지옥엽을 함부로 대하는 건 큰 무례가 될 수 있었다.
공주는 그 핏줄에 흐르는 피의 값어치만으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대답은 카밀라가 대신했다.
“저분은 그래도 되는 분이에요. 무르엘라 영애.”
“그…런가요?”
쟈니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한편 카밀라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던 루아가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정말로 공주님이에요?”
카밀라는 루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티 없이 맑은 눈빛에서 설렘과 호기심을 느낀 카밀라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가 루아겠구나.’
몸에 밴 태도와 가벼운 몸짓만 봐도 귀한 신분이 아니라는 건 확연히 드러났다. 오스왈드 백작 가문 정도 되는 곳의 후원을 받을 만큼 특별해 보이지도 않았다.
‘눈치를 안 보네.’
후원자는 철저히 을의 입장이기 마련. 평민으로 지내다가 귀족가의 후원을 받게 된 루아에게선 지금 가진 걸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 루아. 정말 공주님이지.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 거란다. 내 생각엔 저녁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너희들이 조금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좋아요!”
필립의 제안에 루아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립은 루아의 손에 금화 한 개를 쥐여준 뒤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서재로 올라갔고, 남은 세 소녀는 잠깐 서로를 살폈다.
쟈니스는 고민했다.
‘…뭘 하자고 해야 해?’
루아와 둘이 놀 때는 루아의 방에서 과자를 먹으며 수다를 떠는 게 전부였다. 그런 와중 난데없이 공주님이라는 귀한 신분의 아가씨가 낀 탓에 뭔가 특별한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색을 느낀 카밀라가 쓰게 웃으며 입술을 떼었다.
“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영애. 그리고 루아 양. 내일부터는 저도 당신들과 같은 아카데미 학생인걸요. 스스럼없이 대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세요?’
쟈니스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억지로 웃었다.
“아, 네 그럴게요.”
그때 눈치를 보던 루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공주님도 혹시 과자 같은 거 드세요?”
카밀라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십 대 소녀 중 그 누구도 군것질을 싫어하진 않을 터였다.
“네. 좋아한답니다.”
소녀들은 곧 루아의 방에서 대화를 나누기로 결정했고,
카밀라는 곧 문화충격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녀와 쟈니스를 방으로 데려온 루아는 곧바로 잠옷으로 갈아입더니 어디선가 접시에 가득 담긴 쿠키와 과자 따위를 들고 왔다.
“…저, 루아 양? 침대에서 간식을 먹으면 혼나지 않을까요?”
보고 있던 카밀라가 불안해질 만큼 대담한 행동이었다. 그녀가 루아의 입장이었다면 필립에게 완벽하고 똑 부러진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을 터였다.
“혼이 나요…?”
그러나 루아는 단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쟈니스가 숨을 죽이고 킥킥댔다. 그녀 또한 오늘 자고 갈 셈으로 놀러 왔기 때문에 편한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교관님께선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으세요. 공주님.”
필립의 별장에 몇 번이나 놀러 왔던 쟈니스는 이미 이 집의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새벽 늦게까지 떠들거나 방을 어지럽혀도 필립은 화낸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임주의는 또 아닌 것 같았다.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피후원자의 방을 이렇게 꾸며줄 수는 없었으니까.
‘정말 모를 사람이야.’
카밀라가 필립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루아의 호기심은 이미 한계에 달해 있었다.
“공주님은… 그러면 왕궁에 사는 거예요?”
“이젠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는 그랬죠.”
카밀라가 별생각 없이 대답하자 신이 난 루아가 질문을 계속했다.
“그러면 혹시, 나쁜 드래곤이나 사악한 마법사 같은 거 본 적 있으세요…?”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거론되자 쟈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을 흘렸다.
카밀라는 황당한 질문에 잠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킥킥대기 시작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저런 걸 묻는 루아가 웃겼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그런 모험을 할 기회는 없었네요. 만약 그런 것들과 마주쳤다면 제가 여기 이렇게 있지는 못했겠지만요. 아마 한입에 잡아먹히거나, 다 늙은 마법사의 부인이 되어 쓸쓸히 살고 있지 않았을까요.”
그 대답을 들은 루아가 사색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횡액을 당한 적이 있냐고 물어보는 질문과 다를 게 없었다.
“고, 푸흡, 공주님께 그게 무슨 실례니. 루아. 어서 사과드려.”
쟈니가 웃음을 참으며 루아를 나무랐다. 순진한 루아가 귀엽긴 했으나 이건 충분히 카밀라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였다.
“나쁜 뜻으로 물어본 게 아니니 괜찮답니다. 그보다 오스왈드 교관님께서 잘 대해 주시나 봐요. 방도 예쁘고, 잠옷도 예쁘네요.”
카밀라가 이곳에 온 이유는 물론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필립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와 가까워지거라. 카밀라. 나는 아직도 그가 어쩌면 우리 인간의 바로 눈앞까지 들이닥친 재앙에서 큰 역할을 해낼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는 얼로이 백작이 그렇게 될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필립 오스왈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판단하고, 내게 말해 주렴.’
딱히 임무나 의무라고는 말하기 힘든 일종의 부탁이었으나, 카밀라는 6왕자의 이 말에 대단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라버니는 절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아.’
그녀가 아는 알레시오스 왕자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녀는 따를 뿐.
“평소 성격은 어때요?”
“정말로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나요? 짜증도요?”
“연인은 있나요? 주변 관계는요?”
고귀한 핏줄의 그녀가 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자연스럽게 알아낼 기술을 가졌을 리 없었다. 그녀의 질문 세례에 당한 쟈니스는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교관님을 좋아하나…?’
첫눈에 반한 게 아니라면 저렇게까지 호기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래. 접점도 없는 사람이 말을 편하게 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셨잖아. 게다가 이름을 직접 부르셨지…….’
소녀의 망상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생각해 보면 공주님께선 곧 혼인하셔야 해. 아… 설마?’
본래 공주의 반려는 아국의 권세 있는 귀족이거나, 혹은 국외의 유력자인 경우가 많았다. 필립 정도라면 공주와 결혼하기에 충분한 신분이니 아예 경우가 없는 추측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 정말인가 봐.’
쟈니스의 머릿속에서 분홍 일색의 퍼즐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쟈니스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으나, 굳이 정의하자면 ‘싫다.’라고도 할 수 있는 감정.
쟈니스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이 감정의 정체를 파헤치고 싶었다. 그녀는 지금껏 필립과 겪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지하 던전에서 필립에게 구해진 일.
호수에서 만티코어와 마주친 일.
여행부실 지하의 던전에 함께 간 일.
따지고 보면 그리 많은 일을 함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하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쟈니스가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쿵, 하고 굴렀다.
‘생각해 보니 나… 나 오줌 쌌잖아.’
이불을 덮고 있었다면 세게 걷어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자 카밀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무르엘라 영애?”
“아…아니에요. 공주님. 옷 속에서 땀이 흘렀나 봐요. 아무래도 목욕을 해야겠어요.”
쟈니스에겐 진실을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 어설프게 둘러댄 그녀는 식은땀을 한 방울 흘렸다.
“그러면 루아도 목욕할래요.”
루아가 쟈니스에게 달라붙었다.
“공주님도 같이 가요. 여기 목욕탕에 요정님도 계시거든요!”
신이 나서 말하는 루아를 보며 카밀라는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녀와 동갑인 여자아이였으나 아직 철이 없고 어린 듯한 모습을 보니 한참이나 어린 동생처럼 보였다.
‘목욕탕에 요정이라니. 귀엽네.’
* * *
“오늘은 못 보던 아가가 한 명 더 있네?”
요정 유나는 목욕탕을 방문한 한 무리의 소녀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곤 수건으로 몸을 가린 카밀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가는 이름이 뭐니?”
이것만큼은 카밀라도 참기 힘들었는지 미간을 좁히고 요정을 노려보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저런 무례까지 참고 넘어갈 만큼 그녀가 나약하진 않았다.
“…카밀라 벨로페르 칼라리아. 이 땅의 공주입니다. 당신은 누구길래 이렇게 무례한 거죠? 어서 사과하세요.”
요정 유나는 카밀라가 정색하든 말든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이 집 목욕탕에 완전히 적응한 그녀는 이제 목욕탕의 물 정도는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어머, 공주라고요? 그래요. 반가워요. 에잇!”
곧 탕에 가득했던 물이 솟구쳐 올라 손의 형태를 취했다. 그것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카밀라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자, 잠깐만요. 저한테 뭘 할 생각이죠? 당신은 누구예요?”
한 번 발동된 요정의 장난기는 어지간한 일로도 꺼지는 법이 없었다. 곧 물의 손이 카밀라를 덮쳤고, 그녀의 몸을 가렸던 수건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꺄아악! 이거 놓으세요! 아아악!”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쟈니스는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여기서 나섰다가 자신 또한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루아. 요정님한테 그만두라고 해주면 안 될까?”
그녀의 부탁을 들은 루아가 나섰다.
“요정님. 그만하시면 안 돼요?”
그러나 요정 유나는 카밀라가 울음을 터뜨리며 빌 때까지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공중에서 던졌다 받거나, 몇 바퀴를 돌리는 등 온갖 장난이 끝난 뒤에 카밀라는 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흐아아아앙! 아아앙!”
공주의 그 처참한 모습을, 쟈니스는 차마 바라볼 수 없어 눈을 돌려야 했다.
58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