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 * *
며칠 만에 아카데미에 출근한 필립은 곧바로 수석교수의 호출을 받았다.
개인 사정으로 며칠이나 쉰 것이기에 혼이 날 줄 알았던 필립은 수석교수의 집무실에 에밀 파노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곤 눈을 깜빡였다.
“…잘 왔네. 오스왈드 교관. 그동안 푹 쉬었나? 자네를 찾아온 손님들이 있어서 이렇게 불렀다네. 하하.”
수석교수의 표정엔 필립을 탓하거나 나무라는 기색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다만 그를 찾아온 손님들을 필립이 대신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손님의 면면을 본 필립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6왕자님과 공주님께서 여기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번듯한 미남인 6왕자와 묘한 표정의 어린 공주가 파노이의 연구실 소파에 앉아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자네 왔군. 이렇게 또 보니 반갑네.”
알레시오스 왕자는 필립보다 세 살이 많은 청년이었다. 왕족의 사내가 대부분 그렇듯 이미 결혼했으며 영지를 받아 독립하는 대신 국가에 헌신하기 위해 왕국 기사단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필립은 일단 고개를 숙여 왕족들에게 예를 표했다. 왕자는 손을 들어 그의 인사를 받은 뒤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게 아니라. 내 귀여운 막냇동생이 오늘부터 프리비아 아카데미의 학생이 되었으니 자네에게 청탁을 좀 하고 싶어서 말일세.”
“예?”
필립은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알레시오스 왕자와 그는 빈말로라도 친하다곤 말하기 힘들었다.
며칠 전 얼로이 백작의 죽음 이후 필립은 부상 탓에, 알레시오스 왕자는 상황을 마무리하기 위해 대화를 할 시간 자체를 낼 수 없었다.
‘이거 자네가 한 건가?’
‘그런가 봅니다.’
‘정말 대단하군, 자네는 영웅일세. 이보게들, 오스왈드 공자를 챙기시오!’
이것이 필립과 왕자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이런 식의 만남이 이루어질 만한 그 어떤 연결고리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필립은 장담할 수 있었다.
“자네처럼 유능한 교관이 근무하는 아카데미라면,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을 가르치기에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
“칼라리아 왕족님들은 프리비아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는 게 불문율 아니었습니까?”
필립의 질문에 왕자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거야 파벌이 형성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지. 사실 계승권과 거리가 먼 우리 같은 왕족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세. 이미 폐하와 학장님께도 허락을 구해 두었고, 편입의 형태로 입학이 결정되었네.”
그의 말대로라면 딱히 필립을 찾아올 이유가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필립의 의문을 왕자 또한 느꼈는지 그의 표정이 조금 진중해졌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해 많은 것을 느꼈네. 서부 변경백이 마족과 계약했다는 것이 밝혀진 지금 시점에서 왕궁이라도 그리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걸 말일세. 내가 판단하기에, 자네는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었어. 그곳에서 가장 침착했던 사람은 자네였거든.”
필립은 알레시오스 왕자가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필립의 눈빛에 경계심이 깃들자 왕자는 피식 웃으며 옆에 얌전히 서 있던 공주의 어깨를 감쌌다.
“오해하지 말게. 나는 자네에게서 뭘 알아낼 생각도, 자네를 통해 이득 같은 걸 얻을 생각도 없으니. 단지 하나 욕심을 내자면 내 어린 동생이 위험해지지 않는 것뿐. 그래서 자네를 찾아온 걸세.”
“….”
필립은 왕자의 말이 진심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다. 단지 왕자의 생각이 옳았고,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난 잠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수석교수는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어차피 그는 듣고자 하면 수십 발자국 너머에서도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들을 수 있었다.
교수가 자리를 비켜 주자 필립이 입을 열었다.
“…수백 명의 근위 기사단이 지키는 왕궁보다, 교육기관인 아카데미가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셨단 말입니까? 제가 어찌 그걸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알레시오스 왕자는 필립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나는 감이 좋네. 공자. 그리고 자네는 이미 내게 믿음을 주었네. 되살아난 얼로이 백작이 내 동생을 노릴 때, 오직 자네만이 반응했거든. 그건 카밀라의 안위를 일찍부터 걱정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반응이지.”
필립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침묵을 지키자 왕자는 카밀라 공주의 어깨를 붙들고 필립 앞에 세웠다.
“오라버니…?”
“이 작은 아이를 보게. 공자. 만일 내가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 누가 이 아이에게 신경이나 쓰겠나? 나라고 해서 이 아이를 지킬 힘이 있겠는가? 나 또한 핏줄에 고귀한 피가 흐를 뿐인 일개 기사에 불과하거늘.”
알레시오스 왕자의 말에 필립은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사실 카밀라 공주는 필립의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인물이다. 시간이 꽤 지난 지금에 와선 그녀가 종막까지 살아남는지, 혹은 그 전에 목숨을 잃는지조차 가물가물했다.
6왕자와 카밀라 공주는 어머니가 다른 남매였으나 6왕자가 동생을 생각하는 같은 배에서 나온 남매보다 더욱 두터워 보였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입학 절차를 마치셨다니 지금부터 제 학생인 셈입니다.”
필립의 대답이 너무 적당했는지 알레시오스 왕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자네는 오늘부터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게. 자네 신분과 곧 퍼질 명성을 생각하면 왕자인 나와 의형제가 되어도 이상할 게 없겠지. 그러면 카밀라 또한 자네의 의매가 되겠고.”
필립은 얌전히 거절했다.
“그건 좀 부담스럽습니다.”
“아니, 왜? 왕족과 형제가 되는 건 누구나 바라마지 않을 명예인데.”
“제가 명예 같은 걸 원했다면 여기서 교관이나 하고 있겠습니까?”
삐딱한 반응이었으나 알레시오스 왕자는 점점 필립이 마음에 들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을 파악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그는 필립이 어떤 인물인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그러지 말고, 내가 이렇게 부탁하겠네.”
왕자는 필립의 손을 붙들었다. 필립은 거머리가 닿은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빼려고 했으나, 왕자는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필립은 정말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을 써야 할 아이들이 한가득 있었다.
거기에 귀한 피가 흐르는 공주까지 더해진다면 루아가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도 전에 머리 색이 흰색으로 바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레시오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는 결국 왕자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 * *
필립은 카밀라 공주를 데리고 별장으로 향했다.
‘단단히 잘못 걸렸군.’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것, 필립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왕족인 알레시오스와 의형제가 되었고, 그건 필립의 행보를 왕가의 영향력을 뒤에 업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가가 가진 힘은 둘째치고서라도 그 피가 가진 정통성과 명예는 우습게 여길 만한 게 아니었기에 그것만으로도 많은 일을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알레시오스 오라버니와 형제가 되셨으니, 지금 이 순간부터 오라버니로 모실게요.”
공주는 어른스럽고 조신한 성격이었다. 아주 간단한 손짓 하나에도 예절과 기품이 배어 있었고, 귀한 피가 흐르는 것과는 반대로 태도 또한 매우 공손했다.
필립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는 애다워야지. 루아하고 몇 주 정도 붙여 놓으면 되려나?’
“그래. 무슨 인연으로 우리가 만났는지는 몰라도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자꾸나.”
필립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놓았다. 공주고 뭐고 그의 보호 아래 들어온 이상 단지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네. 오라버니.”
“그래.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내가 후원하고 있는 여자아이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애는 평민 출신이지만, 나중에는 내 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이니 혹시라도 그 아이를 무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착하고 활발한 아이이니 친하게 지내도록 노력해 보렴.”
카밀라가 그럴 것 같지는 않았으나 필립은 일단 그녀에게 주의를 전해 두었다.
“…혹시 그 애 나이가 몇 살이에요?”
필립의 말에 카밀라가 눈을 조금 반짝였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기대감과 약간의 흥분을 엿본 필립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열네 살. 너와 같은 나이지.”
“그렇군요. 잘 지내도록 노력할게요.”
필립의 눈에는 카밀라가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별장에 도착한 필립은 카밀라를 루아의 방으로 데려갔다. 카밀라의 짐과 하녀가 왕궁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루아와 같은 방을 쓰게 할 생각이었다.
공주에 대한 존중 같은 건 전혀 없는 행사였으나 카밀라는 그리 불만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분홍색으로 예쁘게 꾸며진 방을 보며 감탄까지 하는 것 같았다.
“왕성의 네 방이 더 좋을 텐데. 여기가 마음에 드니?”
“…네. 제 방은 이렇게 예쁘지 않거든요.”
“곧 네 방이 생기면 좋을 대로 꾸며도 된단다.”
필립의 말에 카밀라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알레시오스 왕자가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서부 변경백이 마족으로 변했으니 세상에 믿을 만한 귀족은 거의 남지 않은 셈이란다. 다른 귀족에게 널 맡길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를 택했다. 적어도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의 보호를 받고 있으렴.’
그녀의 오라버니가 왜 그런 선택과 결정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카밀라는 아직 필립에게서 뭔가 특별한 것을 느끼지 못했다.
실력이 뛰어난 기사는 근위 기사단에도 많았고, 마족과 혼자 상대할 수준의 기사 또한 오럼 나이트나 실베르 나이트에선 드문 존재가 아니었다.
단지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공주인 그녀를 동네 꼬맹이처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불경했으나, 전리품처럼 바라보는 것보다는 나았다.
“수업은 내일부터이니, 있다가 루아가 오면 함께 나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자. 검술 수업을 신청했다지? 훈련용 검을 하나 사야겠구나.”
“네, 감사해요.”
곧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제 두 번째로 만나는 사이에 난데없이 의남매라는 형태로 묶이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필립이 몇 마디를 건네며 카밀라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곧 루아가 돌아왔다.
“교관님. 저 왔어요오.”
요즘 그녀는 혼자 집에 오는 법이 없었다. 헤일리와 올리비아, 쟈니스를 비롯한 1학년 학생들과도 자주 어울렸고, 여행부 선배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덕에 매일 한가한 누군가와 함께 돌아왔다.
오늘 루아에게 간택당한 사람은 쟈니스 무르엘라였다.
“안녕하세요. 교관님.”
“그래. 안녕. 요즘 자주 놀러 오는구나.”
루아의 귀여움에 푹 빠진 쟈니스는 요즘은 거의 친자매처럼 친해졌다. 팔짱을 끼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애는 누군가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문득 카밀라를 발견한 쟈니스 무르엘라가 물었다. 그녀는 질문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어디서 많이 봤는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던 카밀라가 결국 먼저 나섰다.
“안녕하세요. 무르엘라 영애. 예전 아버님 생신 때 뵈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말을 듣자 쟈니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렀다. 그녀의 말투와 태도에서 뭔가 떠올린 것 같았다.
“저, 실례지만 혹시 아버님 되시는 분 성함이…?”
그녀가 조심스럽게 묻자 카밀라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제 부친의 성함은 벨로페르 엘세우스 칼라리아 주니어이십니다.”
“…설마.”
쟈니스는 화들짝 놀라며 루아의 뒤로 숨어야만 했다.
“…공주님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