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화
* * *
“너는… 오스왈드 가문의 애송이군.”
얼로이 백작은 앞으로 나선 필립을 보며 중얼거렸다. 살의와 폭력성으로 얼룩진 그 시선을 마주한 필립은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마족으로 다시 태어난 지 몇 분도 안 된 주제에, 누굴 보고 애송이라는 겁니까?”
필립은 그렇게 말하며 상황을 살폈다. 눈치 빠른 조문객들은 이미 자리를 피해 도망쳤으나, 눈치가 없거나, 혹은 호기심이 공포를 넘어선 몇몇은 적당히 몸을 숨긴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면 공주가 나서질 못하는데.’
인간이 만든 단체 중 가장 비밀스러운 집단인 창성회. 그 구성원인 공주는 상황이 어지간히 악화되지 않는 이상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솔직한 말로, 6왕자나 막내 공주의 목숨보다 그녀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게 더 중요했으니까.
필립은 알레시오스 왕자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전투 상황의 수신호였다.
내용은 상황을 통제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켜라.
아카데미 출신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수신호였다. 그러나 필립은 알레시오스의 표정을 확인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저 빌어먹을 무학력자가…?’
‘뭐라는 거야’라는 말을 얼굴에 옮겨 놓은 듯한 표정. 필립은 그가 아카데미에 다닌 적이 없다는 걸
필립은 공교육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절절히 느끼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물론 펠리시아는 필립의 수신호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필립의 움직임에 맞추겠다는 듯 섣불리 움직임을 가져가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본래 적에게 자신의 의도를 알리는 건 금기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필립은 단전에 힘을 모은 뒤 크게 외쳤다.
“왕자님!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나십시오!”
그제야 알레시오스 왕자는 필립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했다. 그는 재빨리 자신의 여동생인 카밀라를 챙겨 전투에서 이탈했다.
“모두 도망치시오! 일단 물러나 저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전력을 모아야 하오!”
왕자의 지시에 귀족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누군가 먼저 자리를 이탈하자 눈치를 보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단련된 검사였으나 귀족 중 마족과의 싸움에서 먼저 나설 만큼 용감한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자 급해진 건 백작이었다. 그는 인질로 이용해야 할 귀족들이 사라지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어딜 도망가느냐!”
백작은 필립과 펠리시아를 내버려 두고 알레시오스 왕자를 노리기 위해 날아오르려 했다. 필립은 그 짧은 순간 검을 휘둘러 오러 채찍으로 백작의 날개를 공격했다.
날개는 백작의 목숨줄이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북부로 도망쳐야만 했기에 그는 날개를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크윽….”
맨 팔뚝으로 필립의 검기를 쳐낸 백작은 고통스럽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신음을 뱉었다.
필립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좀 어설픈데?’
작위를 가진 마족 수준은 아니었으나, 얼로이 백작이 전생한 몸체는 제법 수준이 높은 소체였다.
이전에 상대한 뱀파이어보다 조금 약한 정도.
오러 마스터 정도는 되어야 승리를 점칠 수 있을 정도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백작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곧 드러났다.
‘자기가 얼마나 강해진 건지, 그리고 그 강함으로 뭘 할 수 있는 건지 전혀 모르고 있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필립이 마족으로 전생했더라도 똑같은 현상을 겪었을 것이었으니.
‘공주만 나서면 이기겠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필립은 알테어 얼로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가라앉은 눈으로 백작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참전할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얼로이 백작은 그 분위기를 알아차렸는지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저년이 도와주는 걸 바라느냐? 아쉬워서 어쩌나. 저 멍청한 계집은 이십 년 전 계약을 했지. 저년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절대 내 몸에 손대지 못한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필립의 의문과 함께 검을 고쳐 잡았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자신의 죽음과 펠리시아의 죽음을 동시에 각오해야만 했다.
알테어 얼로이는 필립의 의문을 풀어주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 시절, 얼로이 백작의 흉계와 음모를 혼자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맺었던 계약이 지금의 그녀를 옥죄고 있었다.
“저 계집이 비록 오러마스터라고는 하나 심장이 터지고서도 살아남을 수는 없는 법이다.”
백작의 말에 필립은 입맛을 다셨다. 심장이 터지고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맹약의 사슬’을 이용한 계약을 맺은 듯했다.
맹약의 사슬은 상호 간에 목숨을 건 계약을 맺을 때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계약을 어긴 자의 심장을 찔러 죽이는 아티팩트.
인간의 손에 만들어진 물건도 아니었고, 고대 유물을 회색 마탑이 발견한 것이라 오러 마스터라고 해도 그 물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백작을 한 번 공격하는 것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공격이 닿기도 전에 맹약의 사슬 끝에 달린 쇠바늘이 그녀의 심장을 헤집을 것이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필립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 잠깐만. 그러면 이겼는데?’
필립은 급히 입을 열었다.
공주가 맹약의 사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면 이 말의 뜻을 알아들을 터였다.
“맹약의 사슬을 쓴 건가? 하지만 당신은 마족으로 전생하기 위해 이미 한 번 죽었잖……이크!”
“그 주둥이 닥치지 못해!”
필립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얼로이 백작의 목숨을 건 공격이 날아들었다. 오러 대신 마족 특유의 검은 마력이 일렁이는 공격. 백작은 검을 들지 않았기에 어느새 자라난 날카로운 손톱으로 필립의 심장을 노렸다.
필립은 급히 월광검의 이치에 따라 오러를 움직였다. 그의 검에서 새파란 검기 대신 창백한 빛을 흘리는 검기가 솟았다.
백작의 손톱과 필립의 검이 마주친 그 순간 필립은 생각했다.
‘상성은 내가 우위지만, 출력 차이가 너무 심한데.’
필립의 월광검이 물이라면, 백작이 가진 검은 마력은 불이었다. 비슷한 수준이라면 필립이 무조건 이길 테지만, 출력 차이가 몇 배는 넘었다.
양동이 몇 개에 담긴 물로 집 한 채를 태우는 불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필립은 뒤로 크게 밀려나며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이렇게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이유도 네리아의 첫 번째 주인에게 이미 수백 번은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일격에 비해선 백작의 공격은 저열하고 유치했다.
“필립!”
펠리시아가 필립을 돕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백작의 어깨를 노리는 사선베기.
그러나 백작의 육체는 펠리시아의 검기 정도는 쉽게 버텨낼 수 있었다.
백작이 펠리시아를 무시하고 필립에게 달려들려는 그 순간 펠리시아의 검기가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피부가 찢어지는 감각을 느낀 백작이 급히 펠리시아를 공격했다.
“하윽!”
어찌어찌 그의 손톱을 막아낸 펠리시아는 뒤로 크게 물러나 자세를 정비했다. 그녀가 벌어준 잠깐의 시간을, 필립은 헛되이 쓰지 않았다.
한계까지 압축된 검기가 나선을 그리며 뻗어 나갔고, 곧 공기마저 찢어발길 만큼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필립의 필살기라 할 수 있는 ‘회전나선검’이었다.
백작은 감히 그것마저 경시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의 대부분을 해방했다. 곧 그의 회색 몸뚱이가 시꺼먼 마력에 휩싸였다. 전능감이 들 정도로 강력해진 자신을 자각하자,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저 애송이의 몸을 찢어발기고 그 심장을 애비에게 보내야겠군.’
곧 필립이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검은 마력과 월광검의 묘리가 섞인 오러가 충돌하자, 화약이 터지는 것 같은 충돌음이 터졌다.
“으아아악!”
필립은 그 충격파를 버티지 못하고 튕겨져 날아갔다. 펠리시아는 그런 필립의 상태를 살피지도 못하고 백작 쪽을 바라보았으나, 흙먼지 때문에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검기를 있는 대로 뽑아 휘두르며, 그 바람으로 흙먼지를 걷어내려 했다.
“…빌어먹을 핏덩이가 잔재주를 부리는군.”
놀랍게도 그 충돌 속에서도 얼로이 백작은 비교적 멀쩡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피부 곳곳이 찢어졌고, 날개를 덮은 피막 또한 길게 찢어져 제대로 된 비행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승리를 확신한 채 알테어 얼로이를 바라보며 킥킥 웃었다.
“거기서 지켜봐라, 알테어. 난 이 계집아이를 기억한다. 몰래 가문을 빠져나가 만날 만큼 예뻐하던 아이지? 난 이 계집아이가 똥오줌을 지리며 울부짖을 때까지 살갗을 저밀 것이다. 그걸로 끝일 줄 아느냐? 눈알을 뽑고, 혀를 자르고, 팔다리를 뽑아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꼴을 보여주도록 하마.”
펠리시아는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가 백작을 공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필립의 존재뿐이었다. 필립 또한 그녀가 있었기에 백작을 공격할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코빙턴 얼로이. 지난 이십 년 동안 생각했는데, 당신은 역시 인간보다는 마족이 어울려요. 그 역겨운 발상이 인간의 머리통에서 나올 만한 건 아니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테어 얼로이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누가 흘린 듯한 철검 한 자루가 그녀의 손에 날아와 잡혔다.
“날 공격하겠다고? 정말? 네 검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심장이 터져 죽을 텐데. 맹약의 사슬은 너도 잘 아는 물건이 아닌가?”
“그건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죠. 당신, 이미 한 번 죽었잖아요. 그 계약이 멀쩡히 남아있을지는 당신도 나도 모르지 않나요?”
알테어 얼로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백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고작 핏덩이 둘 때문에 오러 마스터가 목숨을 걸겠다고? 웃기는군.”
백작의 허세에도 알테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작은 그녀의 검에서 검강이 솟아나는 그 순간을 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강력한 오러 마스터인 그녀와 싸워 이길 수는 없겠지만, 약해빠진 계집애를 방패 삼는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코빙턴, 코빙턴. 이 불쌍한 양반. 당신은 필립이라는 아이가 뭘 한 건지 모르겠죠. 내 목숨 같은 건 그 아이의 재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알테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맹약의 사슬로 맺은 계약이 아직 유효한지 확신할 수 없었으나, 이미 결정한 이상 망설일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상복 차림으로 철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이 자리에서 아무도 없었다.
백작은 그 어떤 반응조차 하지 못했고, 그의 팔 한쪽이 알테어가 뽑아낸 검강에 잡아먹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아.”
알테어는 식은땀을 흘리며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제아무리 그녀가 창성회의 일원이자 오러마스터라도, 죽음의 공포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녀는 왼쪽 가슴을 세게 움켜쥐며 심장이 뛰는 소리를 잠깐 느끼더니 환하게 웃었다.
“저 안 죽나 봐요. 코빙턴. 그러면 당신이 죽어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