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화
* * *
필립은 얼로이 백작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의 죽음을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니…?”
펠리시아 또한 참석했는데, 백작 부인이자 전 공주 출신인 알테어 얼로이의 친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필립이 얼로이 백작 가문에 결투 재판을 신청한 것 때문에 편두통을 앓고 있던 와중, 얼로이 백작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마터면 놀라 자빠질 뻔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필립은 펠리시아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얼로이 백작을 누가 죽였는지는 알고 있었으나, 어떻게 죽였는지는 몰랐다.
“아, 아무튼 잘 된 거겠지? 아닌가? 사람이 죽었는데 잘 되었다고 하면 뭔가 이상한가?”
펠리시아는 도덕적인 갈등을 겪는 듯했다. 필립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나는 잘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펠리시아는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변경백의 장례식이니만큼 수많은 귀족이 참석했다. 기본적으로 얼로이 가문에 충성을 바치는 가문의 귀족들은 모두 참석했고, 왕가에서도 조문인을 보낸 듯했다.
백작 부인인 알테어 얼로이는 상복을 입었고, 첫째 아들인 필로스 얼로이 또한 상복을 입은 채 자신의 아버지가 들어있는 관을 침통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왕가의 조문인이 다가가 예를 표했다.
“부친께서 당하신 일에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자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립은 왕가에서 보낸 조문인이 다름 아닌 여섯째 왕자인 알레시오스라는 걸 알아차렸다.
게다가 그의 옆에는 몸집이 작은 소녀가 한 명 있었는데, 그녀는 막내 공주인 카밀라였다. 저 둘을 보낸 것만 해도 왕가 측에서 백작이 사라진 얼로이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이제 얼로이 가문은 망했군.’
애초에 분위기가 이렇게 평화로운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얼로이 백작이 이전부터 지병을 앓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암살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분위기가 이래서는 안 되었다. 변경백의 모든 병력이 출입을 통제해야 했고, 장례식 또한 철저히 비공개로 이루어지는 게 정상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는 건, 계승권을 가진 첫째 아들과 변경백의 전 가신들이 얼로이 백작의 죽음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변경백이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인데.’
“…누님.”
6왕자 알레시오스는 알테어 얼로이를 바라보며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20대 중반인 그는 알테어 얼로이와 열 살 이상 차이가 났음에도 꽤 친한 듯했다.
“알레시오스. 오랜만이구나. 지금은 남편을 떠나보내느라 좀 바쁘니, 장례식이 끝난 뒤에 이야기하자꾸나.”
‘전혀 안 슬퍼 보이는데.’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알테어 얼로이는 얼마 전에 미망인이 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밝아 보였다.
심지어는 저번에 찻집에서 만났던 때보다 피부가 더 좋아 보일 정도였다.
곧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교회에서 파견된 추기경이 직접 장례를 주관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빛의 이름으로, 한 교인이 주의 곁으로 돌아가 그의 옆에 자리함을 축복하는 바입니다.”
그는 여러 미사여구를 사용해 얼로이 백작의 지난 삶을 어떻게든 포장하려 했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얼로이 백작은 비록 신실한 교인은 아니었으나 열심히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량한 일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마음속 한구석에는 빛을 품고, 그 빛을 향해 걸어가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마치 얼로이 백작이 풍차를 세워 농민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넘치는 강에 둑을 세워 안전을 보살핀 것처럼 말입니다.”
필립은 추기경의 연설을 들으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아니, 얼마나 착한 일을 한 게 없으면 풍차를 세우고 둑을 만든 걸 선행이랍시고 늘어놓는 건데.’
사실상 지능이 정상 수준인 영주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었다. 추기경의 입꼬리가 조금씩 떨리는 걸 바라보며 필립은 장례식이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조금 감탄했다.
“…이로써 얼로이 백작의 육신은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나니, 주께서 그의 영혼을 돌보기를 축원하겠나이다.”
추기경은 몇 분 떠들지도 않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곧 얼로이 백작이 든 관이 가족 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알레시오스 왕자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귀족 여러분, 저는 폐하를 대신해, 유언장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변경백의 후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소.”
그 말에 필로스 얼로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왕가에서 왜 가문의 후계에 간섭하려 드는 겁니까?”
알레시오스 왕자는 그의 반발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응했다.
“간섭이 아니라, 그대의 계승권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도우려는 거요. 왕가의 공증이 있다면 그대는 다음 대 변경백으로 확실히 자리 잡을 수 있지 않겠소?”
말만 들으면 좋은 일이었으나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필립은 알고 있었다.
둘째 아들인 블러핸은 다리가 부러져 장례식에 참석조차 하지 못한 상황.
첫째인 블러핸이 다음 대 변경백이 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굳이 왕가에서 나설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굳이 왕가에서 공증하겠다는 건 얼로이 가문이 앞으로 왕가의 영향력 아래 놓여야 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 사실을 필로스 얼로이 또한 잘 알았다.
“왕가에서 굳이 공증하지 않아도, 저 필로스 얼로이가 가문의 적법한 계승자라는 건 극명한 사실입니다. 가문의 봉신들은 저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껏 가문이 바쳤던 충성 또한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필로스는 기분이 나빠졌다는 걸 숨기지 않았다. 대단히 무례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알레시오스 왕자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글쎄, 그게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소만.”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필로스 얼로이는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제아무리 왕자라고 해도 가문의 영지인 이곳에서 저렇게 나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왕자가 아닌 다른 이들에서 나왔다. 장례식에 참석한 봉신 가문 중 몇 가주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우리 레이커드 남작 가문은 봉신 계약을 철회하겠소.”
“실로벤 자작 가문 또한 마찬가지요. 더는 얼로이 가문에 충성을 바칠 수 없겠군. 왕가의 공증을 받는다면 또 모를까.”
아무래도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필립은 이 중세식 일일연속극을 특등석에서 관람하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이게…아니…주군의 장례식에서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다섯 개나 되는 가문이 봉신 계약 철회를 주장하며 소란을 피웠다. 얼로이 백작이 살아있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제대로 후계자 계승을 준비하지 못한 필로스 얼로이는 만만한 먹잇감 그 자체였다.
“그대도 알다시피, 그대의 부친인 코빙턴 얼로이가 그리 훌륭한 주군은 아니었지 않소? 어쩌면 이게 당연한 일이겠지. 레이커드 남작 가문과 실로벤 자작 가문은 그대들 얼로이 가문이 변경백이 되기 전에는 왕가에 충성하던 유서 깊은…….”
알레시오스 왕자는 얼로이 가문에 악감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하던 알레시오스 왕자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음?”
순간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알레시오스 왕자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믿기 힘들게도 백작의 관이 묻힌 무덤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들썩거리고 있었다.
곧 무덤의 흙이 폭발하듯 솟아올랐고, 바로 몇 분 전에 묻혔던 관이 박살이 났다. 그 과정에서 많은 양의 흙먼지가 터져 나갔고, 참석한 이들이 팔로 얼굴을 가렸다.
운 좋게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이 곧 하얗게 질린 표정이 되었다.
“…백작이! 얼로이 백작이 되살아났다!”
반응이 빨랐던 필립과 펠리시아는 시야를 빠르게 회복했고, 일어난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소리친 그대로였다.
“피, 필립?”
악귀처럼 얼굴이 일그러진 얼로이 백작이 무덤을 헤집고 솟아나 공중에 떠 있었다.
일단 사람의 피부색이 아니었다. 마족을 상징하는 회색 피부와, 피막으로 된 날개가 등허리에 달려 있었다.
“…꼴 보기 싫은 얼굴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군. 네놈들이 나누는 대화가 조금만 더 만족스러웠더라도 얌전히 묻혀 있을 생각이었는데.”
되살아난 얼로이 백작은 길어진 송곳니를 드러내며 이죽거렸다.
“아, 아버님?”
혼이 빠진 것처럼 놀란 필로스 얼로이가 눈을 크게 뜨며 백작을 불렀다. 백작은 아들을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병신 같은 놈. 제 애비가 암살을 당해 죽었는데, 복수할 생각은커녕 작위를 이어받을 욕심에 내 죽음을 묻으려 들다니.”
그리고는 손날을 세워 번개처럼 필로스 얼로이의 가슴에 손날을 꽂아 넣었다.
“커흑! 아, 아버님…왜?”
“너는 내 뒤를 이을 자격이 없다. 필로스.”
백작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가슴 안에서 손을 꼼지락대더니 곧 필로스의 심장을 꺼내었다.
아직 혈관이 잘리지도 않은 심장이 갈비뼈 밖에서 맥동하자, 필로스 얼로이의 얼굴이 곧 창백해졌다. 그는 극도의 공포로 숨을 몰아쉴 뿐 뭘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게 마족이란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심장 요리를 좀 먹어둘 걸 그랬군.”
백작은 필로스의 심장을 비틀어 뽑아낸 뒤 손에 쥐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필립은 확신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로이 백작은 결국 마족으로서 전생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다음은 너희들이다. 머저리 같은 귀족 놈들.”
백작의 시선이 곧 봉신 계약을 철회한 귀족들을 향했다. 그러나 백작이 뭘 하기 전에 알레시오스 왕자가 검을 뽑아 그를 가로막았다.
“…대관절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군. 어떻게 살아난 거요, 백작?”
백작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지, 왕가의 핏덩아. 네가 물어야 할 건 그런 게 아니지.”
순간 백작의 신형이 사라졌다. 동체 시력이 뛰어난 몇을 제외한 이들의 눈에는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알레시오스 왕자는 급히 백작을 막으려 했으나, 그의 뒤에 서 있던 막내 공주가 공격당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카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공포와 충격이 왕자의 몸을 휘감았고,
그 순간 필립과 펠리시아가 동시에 움직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필립은 검기를 길게 뻗어 백작을 가격했고, 펠리시아가 날린 검기는 백작의 어깨에 날아가 박혔다.
“꺄아아아악!”
카밀라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뭐 하나 일이 쉽게 풀리는 게 없네. 이젠 하다 하다 죽은 사람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질 않나.”
필립은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네리아도 지금껏 주인님처럼 다사다난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네리아의 핀잔을 들으며 필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팔자려니 해야지. 안 그래,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