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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52화 (52/119)

052화

* * *

환상통(幻想痛)은 실제로 다치지 않은 부위에 고통을 느끼는 현상이다.

보통은 사고나 부상으로 잘려나간 부위에 느껴지는 것이었으나, 놀랍게도 필립은 그 어디도 다치지 않았음에도 온몸에 환상통을 앓고 있었다.

“……으윽.”

특히 목과 심장이 아팠다.

네리아의 첫 번째 주인은 꽤 상냥한 성격이었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걸 즐기지 않았다.

따라서 단숨에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목과 심장에 거의 모든 공격이 집중되었는데, 알면서도 반응하지 못할 수준이었기에 필립은 꼼짝없이 당해야만 했다.

―그러게 다른 방법을 찾자니까요? 이건 너무 무식해요. 세상에 수련을 이렇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정신병에 걸릴 거라구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미 결투 재판을 신청하는 서신을 왕가에 제출했는데.”

―그런 건 고양이가 실수로 보냈다고 하면 되잖아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안 될 건 또 뭐예요? 주인님이 하고 있는 일이 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네리아를 주인 없는 검으로 만드실 생각이세요? 네리아는 손발이 없어서 주인님이 벽에 똥칠을 하셔도 도와줄 수가 없다고요!

“아주 악담을 해라. 응?”

사실 필립도 네리아의 말이 옳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들이박기만 한다고 해서 꼭 그의 실력이 는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애초에 얼로이 백작이라는 사람이 주인님의 결투 재판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게요?

“그럴 리가 없지. 전쟁을 일으키는 게 목적이라면 오스왈드 백작가의 자식을 합법적으로 잡아 죽일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

이 세상의 결투 재판이란 그런 식이었다. 왕가의 참관인이 결투를 주재하고, 재판의 당사자 중 누군가 사망하더라도 그 자리에선 절대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 없었다.

만일 필립이 결투 재판에서 패배해 사망한다고 해도 오스왈드 가문은 당장 그 자리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곧바로 전쟁을 준비하겠지. 그러면 얼로이 백작은 쉽게 목적을 이루는 셈이 되는 거고.’

필립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똑같아. 무조건 나올걸. 본인이 직접 나오든, 대전사를 고용해 나와 싸우게 하든 얼로이 백작은 결투 재판에 참석하게 되어 있어. 그 전에 죽기라도 하면 모를까.”

―…확 벼락이나 맞아 죽었으면 좋겠네요. 아니면 변기에 빠져 죽던가요.

필립은 네리아의 농담에 킥킥대며 웃었다.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겠어? 누가 얼로이 백작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줬으면 좋긴 하겠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필립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네리아를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 다시 가상 공간에 들어가 수련할 시간이었다.

그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그 말을 모두 듣고 있었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야옹.”

필립의 의식이 네리아의 공간 속에 있을 때, 타니아는 조용히 필립의 그림자에서 솟아났다.

보통 흑묘족도 그림자 사이를 넘나들 수 있지만,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흑묘족은 거의 없었다.

선대 족장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거나,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탁월한 재능을 지녀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타니아는 그 둘 모두에 해당했다.

타니아는 곧 어두운 수풀 속을 누비며 별장을 빠져나왔다. 짧은 팔다리를 열심히 놀려 그녀가 향한 방향은, 얼로이 백작 가문의 영지가 자리한 서쪽이었다.

* * *

얼로이 백작가의 하녀 밀라는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마을에서 손맛이 좋기로 유명했으며, 그녀 또한 그 손맛을 어느 정도 물려받은 덕에 그나마 덜 힘든 주방에 근무할 수 있었다.

“밀라! 이 멍청한 년아! 오리 구이에 쓸 사탕무즙이 모자라잖아! 이런 것도 확인하지 않을 거면 당장 때려 치워!”

수프를 젓고 있던 그녀에게 주방장의 호통이 날아들었다.

밀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주방장은 사탕무즙 같은 비싼 식재료에는 평소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녀를 탓하기 일쑤였다.

‘구경도 못 하는 식재료가 떨어지건 말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예에! 지금 준비할게요.”

주방장은 밀라에게 사탕무 두 개를 집어 던졌고, 하나는 어떻게든 받을 수 있었으나 나머지 하나는 밀라의 작은 머리통과 그대로 충돌했다.

“아얏!”

“한 시간 내로 준비해 와, 늑장을 부리면 하녀장에게 네년을 채찍질하라고 할 테다.”

두꺼비를 닮은 주방장은 마치 멧돼지처럼 으르렁댔다. 겁을 먹은 밀라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알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적이 드문 뒷마당에 나간 밀라는 작은 모닥불을 지핀 뒤 냄비에 사탕무를 졸이기 시작했다. 점성을 띨 때까지 졸이려면 한 시간 정도는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남작님….’

본래 시골 영지의 남작 가문에서 일하던 그녀는 얼로이 백작으로 인해 남작 가문이 파산하자, 일자리를 찾아 이곳까지 흘러든 소녀였다.

자신을 딸처럼 귀여워했던 남작을 떠올리자 코가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을 훔친 그녀는 주변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주위를 살폈다.

“…어머?”

작고 사랑스러운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수풀을 헤집고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털이 불길하다 여겨지는 검은색이었으나 그런 사실 정도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을 만큼 귀여운 고양이였다.

“애애옹.”

“달콤한 냄새를 맡고 왔니?”

밀라는 코를 훌쩍이며 빙긋 웃었다. 그녀는 사탕무 냄비를 젓던 주걱을 꺼내, 손가락 끝에 그 즙을 묻히고 입김을 불었다.

“비싼 거라 많이는 못 주고, 맛이나 볼래? 어?”

잠깐 고개를 돌리는 사이 고양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에엥?”

유령에게 홀린 기분이었기에 밀라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곤 입맛을 다시며 사탕무 냄비를 젓는 데 열중했다.

한 시간 정도가 흐르고, 사탕무의 즙이 완전히 점성을 띠자 밀라는 그것을 주방장에게 가져갔다.

“여기 있어요. 주방장님.”

“몰래 찍어 먹거나 한 건 아니겠지?”

“저는 도둑이 아녜요.”

“내 경험상, 너처럼 촌구석에서 온 계집애들은 대부분 손버릇이 안 좋던데. 뭐, 단 걸 먹고 싶으면 내 방에 찾아오라고.”

밀라는 주방장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기 일을 하기 위해 수프 냄비로 향했다. 그의 시선이 너무 역겨웠다.

주방장은 오늘의 메인디쉬인 오리 구이를 완성하기 위해 사탕무즙을 들고 오븐 앞에 섰다. 그 옆에는 주방장의 도제인 젊은 청년이 자리했다. 청년은 주방장의 조카로, 주방장이 후임자로 낙점한 인물이었다.

“…백작님께선 오리 구이를 좋아하시지. 다른 요리사의 오리 구이가 아니라, 내 오리 구이를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다. 껍질에 사탕무즙을 바르고, 나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구워내면 달콤한 맛과 바삭한 식감을 둘 다 잡을 수 있다.”

그는 도제에게 이것저것 설명하며 오리 구이를 완성했다.

“백작님께선 항상 오른쪽 다리부터 드시곤 한다. 그걸 생각하며 불 세기를 잘 조절해야 해. 가슴과 배 부위는 늦게 입을 대시니 조금 더 구워야 하고, 다리는 물자마자 육즙이 제대로 터질 수 있게….”

곧 완성된 오리 구이를 가져가기 위해 얼로이 가문의 집사가 방문했다.

“오늘 점심식사는 집무실에서 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포도주 한 병과 간단한 샐러드도 함께 준비해 주시오.”

“백작님께서 요즘 바쁘신 모양입니다. 하하.”

집사는 주방장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저택 내 지위가 높았다. 주방장이 비굴한 웃음을 흘리자 집사는 엄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걸 왜 궁금해하는 거요?”

“아, 아닙니다.”

집사는 데리고 온 하녀에게 오리 구이가 담긴 접시를 들게 한 뒤 자신은 포도주를 들었다. 그가 사라지자 주방장은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씨발 새끼. 좀 친해지자고 하는 건데 더럽게 까탈스럽군.”

* * *

“교관님. 타니아가 안 보여요.”

다크서클이 광대뼈까지 내려온 필립은 한밤중에 루아가 자신의 방을 방문하자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벌써 며칠째 네리아의 첫 번째 주인에게 도전했으나, 아직 제대로 검을 마주치지도 못했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 탓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형편이었다.

“타니아? 그 애는 원래 자주 자리를 비우곤 하잖니?”

필립의 말에 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타니아가 자주 가는 곳에 전부 가 봤는데, 아무 데도 없었어요. 나쁜 사람한테 끌려간 거면 어떻게 해요?”

그럴 확률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으나, 필립은 타니아가 암살자 출신이라는 걸 루아가 모르길 원했다.

“이 주변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쩌면 마법 학부의 프리실라 교관에게 놀러갔을 수도 있겠구나. 한 번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꽤 친해진 것 같았거든.”

루아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어느 정도 안심한 듯했다. 필립의 말이 틀린 적이 없다는 건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만약 내일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찾아보도록 하자. 검은 고양이는 드무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거…….”

말을 잇던 도중 필립은 창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므애애애옹.”

새끼고양이 타니아가 앞발로 창문을 열고 들어온 것이었다.

“거 보렴, 여기 왔잖니.”

“타니아!”

루아는 재빨리 타니아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곧 타니아가 입에 뭔가를 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갸웃했다.

“타니아, 이건 뭐야?”

뭔가 반짝이고 작은 물건이었다.

“반지로구나. 어디서 주운 거니?”

필립은 손을 내밀어 타니아의 입에 물린 반지를 가져왔다. 그녀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내놓았다. 반지를 자세히 살핀 필립은 눈을 깜빡였다.

“…귀족의 인장 반지로구나. 어디서 잃어버릴 만한 물건이 아닌데.”

어느 정신 빠진 귀족인지는 몰라도 곤욕깨나 치르고 있을 것이었다.

“어?”

필립은 문득 반지에 새겨진 인장이 이상하게 익숙하다는 걸 느꼈다. 곧 그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몇 방울 맺혔다.

‘이거… 얼로이 백작가의 문장이잖아?’

대체 이게 어떻게 타니아의 주둥이에 물려 있던 것인가.

필립은 귀신을 보는 것과 같은 표정으로 타니아를 바라보았다.

“미야아옹.”

타니아는 칭찬해 달라는 듯 꼬리를 살랑거리며 얌전히 안겨 있을 뿐이었다.

“…루아, 잠깐만 방에 있다가 오겠니? 타니아는 이리 주렴. 금방 다시 부르마.”

필립은 일단 루아를 방으로 돌려보낸 뒤 타니아의 옆구리를 붙들고 자신의 눈높이와 맞추었다.

“이, 이게 뭐니? 대체 이걸 어디서 구한 거니?”

귀족 가문의 인장은 결코 남의 손에 들어가선 안 되는 물건이었다.

맏아들이 적의 손에 잡힐지언정 인장이나 깃발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예민한 가주들은 잘 때도 인장 반지를 손에 끼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만약 인장 반지를 누군가 가져왔다면, 잠든 사이에 몰래 훔쳐냈거나…….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죽였어.”

타니아는 루아가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그 말투가 마치 심부름을 잘 해낸 어린아이가 칭찬을 바라고 어리광을 피우는 것 같았다.

“……어……음……어어…자, 잘했다.”

한참 고민하던 필립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를 품에 안고 쓰다듬었다.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잘한 건 맞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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