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화
* * *
“잘 모릅니다.”
필립은 잘 알고 있었으나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다. 알테어 얼로이는 당연히 그럴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모를 수밖에. 수면 위로 드러난 단체가 아니란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리는 인류의 내분을 막기 위해 존재한단다. 인류의 전력이 마족들에게 온전히 집중되도록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게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내가 얼로이 백작 부인이 된 것도 그 역할의 일환이거든. 물론 한 번도 동침하지는 않았지만….”
백작 부인의 말에 펠리시아가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그러면 블러핸 얼로이는…?”
“그 망나니 놈은 물론 내 배에서 나오지 않았단다. 딱 보면 모르겠니? 나하고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을 텐데. 그 애는 혼외자식이야. 코빙턴 얼로이가 거래하던 상회의 아가씨를 임신시켜 낳은 아이지.”
알테어 얼로이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건 젊은 나날을 의무와 신념에 바친 불행한 여인의 이야기란다.”
그리고는 마치 아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어머니처럼 조금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하자면, 코빙턴 얼로이는 죽어야 사는 남자란다. 그는 마계 공작 데흐트라와 계약했어. 인간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한 뒤 사망하면, 그 후에 마족으로 전생하기로.”
알테어 얼로이가 내놓은 정보에 필립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애초에 전쟁을 일으키는 게 코빙턴 얼로이의 목적이었다는 이야기지. 그것만 해내면 그는 마계 공작 데흐트라의 휘하에서 강력한 마족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고.”
알테어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과거의 일을 떠올리니 감정이 좀 북받치는 모양이었다.
“당시 창성회에 막 가입한 신입이었던 내게 코빙턴 얼로이에게 접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지. 그는 공주인 내가 전쟁을 일으키기에 좋은 명분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어.”
“그러면 결국에는….”
“그래. 놈은 실패했지. 그러나 나는 놈을 죽일 수 없었어. 놈을 죽인다면 적어도 칼라리아 서부에선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 곧 창성회 선배이신 대현자께서 놈이 마족과 계약했다는 걸 알렸고, 누군가는 옆에서 그를 감시해야만 했어.”
“아.”
필립은 그제야 내막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는, 코빙턴 얼로이를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감금하려고 했어. 하지만 그렇게 허술한 인간이 아니었지. 그는 자신의 목숨을 매개로 여러 수작을 부려 놨어. 우린 그것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낼 수 없었고. 그래서 내가 나선 거란다.”
공주였던 알테어는 피해자의 신분이 되기를 자청했다. 창성회와 함께 아버지인 국왕을 설득해 얼로이 가문을 변경백으로 만들었고, 직접 백작 부인이 되어 얼로이 가문을 이십 년 동안이나 감시한 것이다.
어쩌면 현명하다고도, 어쩌면 미련하다고도 할 만한 선택이었다.
다만 의문이 하나 남았다.
“그런데 대체 코빙턴 얼로이는 왜 마족과 계약한 겁니까?”
“놈은 왕이 되려 했어. 얼로이 가문에는 나라 하나를 세우고도 남을 만한 재산이 있었지만, 정통성 없는 가문에 충성을 바칠 만한 귀족은 거의 없었지. 언젠가 내게 말하더구나, 나를 왕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마족과의 계약 같은 건 파기하겠노라고.”
“왕이 되고 싶어서 마족과 계약했다고요? 그런 멍청한 짓을?”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까지는 모르겠구나. 처음에는 코빙턴 놈을 빨리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몇 년 정도 지내다 보니 백작 부인 노릇도 생각보다 괜찮았거든.”
물론 그랬을 리가 없었다. 필립은 그녀가 이십 년이나 얼로이 백작 가문에 붙어 있던 이유를 캐묻고 싶었으나, 지금 묻는다고 해서 대답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제가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필립의 질문에 알테어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피식 웃었다.
“코빙턴… 아니, 우리 그이를 죽이고 싶은 것 아니니? 하려던 걸 하렴. 다만 뭘 조심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겠지?”
“…전쟁이 나면 안 되겠죠. 생각보다 쉽겠는데요.”
“쉽다고?”
필립은 알테어의 되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다음번에는 다른 자리에서 뵙겠습니다. 조금 더 반가운 상황에서 말입니다.”
* * *
“왜 또 왔느냐?”
프리비아는 필립의 방문을 받곤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얼로이 백작가와 시비가 걸린 걸 아시잖아요? 그게 사실은…….”
필립은 자신이 알아낸 정보들을 프리비아에게 일러바쳤다. 마족이 관련된 일이니 그녀가 나설 명분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프리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이건 내가 나설 수 없는 일이니라. 내가 간섭할 수 있는 영역에선 조금 벗어났으니, 날로 먹을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거라.”
“아니, 왜입니까?”
“왜기는, 코빙턴 얼로이라는 놈이 죽고 나서 마족이 되건 말건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 전쟁이 일어나건 말건 그것 또한 내 알 바가 아니니라.”
‘아니, 이러면 좀 나가린데.’
필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로써 프리비아의 도움을 받아 얼로이 백작을 어떻게 해보려던 계획은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나설 수 있는 일은 대단히 한정되어 있다. 만약 이 사건의 끝에서 네가 직접 마족을 마주치게 된다면 놈의 목을 비틀어 주마. 하지만 그게 아니잖느냐?”
프리비아는 어디까지나 마족이 직접 관련된 일에만 나설 수 있는 몸. 저번 흑묘족 사건 때는 인큐버스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프리비아의 힘을 빌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건 그렇죠.”
“내 호의를 이용할 생각이 아니었으니 한 번은 봐주마. 알아서 해결하거라.”
퇴짜를 맞은 필립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교직원 기숙사를 나섰다.
‘이젠 어쩔 수 없나.’
필립은 전쟁 없이 코빙턴 얼로이를 죽일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다. 단지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기에 이 방법을 함부로 선택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는 별장에 돌아와 양피지와 펜을 들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디 한번 해보자고. 먼저 시비를 걸었다 이거지?”
그가 작성하고 있는 건 결투 재판을 위한 양식이었다.
만약 코빙턴 얼로이의 목적이 정말로 전쟁 그 자체라면, 결투 재판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결국 정치적인 영향력을 깎아내야 해. 그에게서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상황을 만들 능력을 제거해야 하는 거지. 일단 이 분쟁에서 승리하는 게 먼저고, 그다음은 바로운 백작가와 무르엘라 후작가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권세 높은 귀족들의 분쟁은 결국 명분 싸움이었다. 가문 하나의 힘이 아무리 강대해 봤자, 그를 섬기는 봉신이 충성을 바치길 거부한다면 큰 힘을 쓰지 못한다.
얼로이 백작이 둘째 아들 블러핸 얼로이의 다리를 부러트린 것도 결국에는 명분을 얻기 위함이었다.
얼로이 가문 휘하의 봉신들이 어쩔 수 없이 협조해야 할 명분.
그것도 필립이 결투 재판에서 승리한다면 사라질 터.
필립은 어쩔 수 없이 그동안 미뤄 두었던 수련을 몰아서 하기로 결심했다.
침실로 향한 그는 오랜만에 네리아를 품에 안고 누웠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겠다. 네 첫 번째 주인님과 마주할 때가 온 것 같아.”
―…괜찮으시겠어요? 네리아의 첫 번째 주인님은 오러 마스터라고요. 아무리 꿈속의 일이라고 해도 한 번 죽을 때마다 정신력이 깎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란 말이에요. 죽음을 반복하다 보면 폐인이 되실 수도 있어요.
네리아가 걱정을 표했다. 그러나 필립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빨리 해결하려면 다소 희생을 각오할 수밖에.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시작할게요.
필립이 눈을 감고 마치 잠들기 직전처럼 편한 자세로 숨을 고르게 내쉬자, 그는 곧 네리아가 만든 가상 공간 속에 들어올 수 있었다.
배경은 평범한 들판이었다.
은은한 빛을 머금은 흰색 갑주를 입은 여기사가 필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네리아의 첫 번째 주인이라는 거지.’
이전까지 그녀를 가졌던 주인과 달리 여기사는 온화한 인상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그녀에게 처음 도전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냥 쳐다보고 있다가 죽었지. 뭘 한지도 못 봤어.’
까마득한 실력 차이 때문에 도전하는 의미가 없어 지금껏 방치해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필립과 시선을 마주치다가 싱긋 웃었고, 그 순간 필립의 목이 날아갔었다.
‘지금은 좀 다르겠지. 최소한 눈에 보이기라도 할 거야.’
필립은 그녀와 마주한 그 순간 온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어느새 손에 들려 있는 네리아의 손잡이를 부술 듯이 잡은 그는 다리를 벌리고 다가올 공격에 대비했다.
여기사는 예전처럼 필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필립은 이번엔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 알 수 있었다.
‘중단으로 페이크를 한 번 주고 목을 노렸어.’
목이 잘려 시야가 뒤집히는 경험은 언제 해도 끔찍한 것이었다.
―…1트 실패하셨네요?
꿈에서 깨어나자 네리아가 필립을 위로하려는 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로 2트 간다. 한 150트만 하면 어떻게 한 번은 검을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데.”
필립은 식은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편지에 적은 결투 재판 날짜는 오늘로부터 2주 후. 그 안에 어떻게든 최대한 성장해야만 했다.
‘…벌써 죽겠군.’
다시 가상 공간으로 들어선 필립은 여기사의 손과 발, 그리고 시선을 살폈다.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자신이 읽은 정보를 신뢰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여기사와 어느 정도 맞상대가 가능한 수준까지만 올라간다면 결투 재판에 오러 마스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필립은 여기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첫 번째 주인님은 대단히 상냥한 분이셨어요. 네리아가 자아를 각성한 이후로 매일 네리아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그리고 활동할 당시에는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거든요? 그렇게 막무가내로 덤벼서 될 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네리아의 핀잔에도 필립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의 검에서 채찍 같은 오러가 솟구쳤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그만이지.’
필립은 먼 거리에서 그녀를 공격했으나 여기사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검강을 날려 필립의 상체를 완전히 부수었다.
“헉!”
다시 깨어난 필립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눌렀다.
―400트는 하셔야겠는데요?
네리아가 킥킥댔다.
필립은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처음 그녀에게 도전한 이후로 나름대로 실력이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에밀 파노이를 필립의 자리에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으니까.
“…일단 가볍게 100트만 좀 해 보고, 다른 방법을 찾든지 결정해야겠군.”
그렇게 수십 번이나 더 죽은 뒤에야 필립은 만신창이가 된 멘탈을 끌어안고 잠에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