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화
* * *
다음 날 늦은 밤. 필립은 흑묘족 족장인 스텔라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그 누구의 눈에도 들키지 않은 채 필립의 침실로 들어와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말씀하신 얼로이 백작 가문을 조사하다 보니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어요.”
“아니, 벌써요?”
만 하루가 조금 지난 시점에서 벌써 성과가 나왔다는 건, 얼로이 가문이 생각보다 철저하지 못하다는 걸 의미하거나, 혹은 흑묘족의 능력이 예상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걸 의미했다.
“운이 좋았거든요. 크레센트에 붙잡혀 있었던 정보원이 얼로이 가문의 집사 한 명을 알아봤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암살자로 활동하던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곧바로 그를 미행해 당신께서 말씀하신 자료들을 수색했는데, 이런 것들이 나왔어요.”
스텔라는 몸에 붙는 가죽옷 차림이었다. 그녀는 앞섶을 열고 옷 안감 사이에 숨겨 둔 종이를 꺼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신체가 일부 드러났으나, 필립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여기 있어요.”
필립은 서류를 받아 펼쳤다. 스텔라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어떻게 눈동자가 그대로지?’
필립처럼 젊은 나이의 사내는 제아무리 수양이 잘 되었더라고 하더라도 여인의 몸에 최소한의 관심을 갖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그녀의 가슴이 반이나 드러났음에도 눈동자조차 굴리지 않았다.
‘정신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서류의 내용을 확인한 필립은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이걸 대체 어떻게 구한 겁니까?”
그야말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서류에는 얼로이 백작의 직인이 찍혀 있었는데, 크레센트에게 누군가의 암살을 의뢰하는 의뢰서였다.
암살 대상의 이름을 본 필립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테어 얼로이…이건 백작 부인의 이름인데.’
“그 집사는 크레센트가 와해된 이후 나름대로 살길을 찾은 모양이에요. 암살자 출신이니 금방 버려질 거라 예상했겠죠. 뭐, 그 덕분에 저희는 쓸 만한 무기를 찾게 되었지만.”
“이건 쓸 만한 수준이 아니죠. 이것 하나만으로 얼로이 백작을 끝장낼 수는 없겠지만, 그 기폭제가 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아요.”
왕의 피를 이은 아내를 암살하려고 든 얼로이 백작의 계획에 필립은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걸 느꼈다.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일을 몇 개나 벌이는 건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보였다.
애초에 공주와 이어진 것도 정상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공주가 죽는다면 왕은 절대 참지 않을 것이었다.
마족과 상대하고 있는 북부의 기사단들을 뒤로 물려서라도 얼로이 백작을 응징하려 들 게 분명했다. 마족이 아니었다면 진작 일어났을 일이었다.
‘공주를 아내로 삼고, 서부 변경백의 자리를 얻어내고, 무엇이 모자라서 날 압박하고 자기 아내를 암살하려 드는 걸까.’
필립을 굳이 건드려서 얻어낼 만한 게 없었다. 오스왈드 백작 가문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는 명분으로 쓰기엔 블러핸의 다리가 부러진 것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신기하네요.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 같은데 지금껏 저렇게 잘 살아있는 걸 보면요. 얼마나 운이 좋아야 하는 걸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네리아가 중얼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속으로 대답하던 필립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벌인 모든 일이, 사실 성공하려고 벌인 게 아니라면?’
발상의 전환은 생각보다 간단히 이루어졌다.
본래라면 공주를 강제로 취해 왕의 사위가 되는 건 성공 확률이 낮은 일이었다.
제아무리 국력의 절반 이상을 북부의 마족을 틀어막는 데 낭비하고 있더라도, 피해자 본인인 공주가 전쟁을 원치 않았더라도.
게다가 서부 귀족 중 얼로이 백작가를 대체할 만큼 강한 가문이 없었다고 해도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왕이 극도로 계산적인 인물이거나 극도로 무능력한 인물이 아닌 이상 어떤 식으로든 보복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목적이 다 같이 망하는 거였다면? 아니, 그냥 분란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네?”
필립의 중얼거림을 들은 스텔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백작 부인을 만나야겠어. 최대한 빨리.’
필립은 그렇게 결심했다.
* * *
아카데미에서 마차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도시, ‘팔로암’의 거리였다.
펠리시아는 필립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힘이 그리 실리지 않은 일격이었으나 필립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정말.”
“미안. 하지만 그분은 꼭 만나봐야겠어.”
필립의 예상대로 펠리시아는 얼로이 백작 부인과 지금까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몇 달에 한 번 정도 약속된 장소에서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수준이었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는 결국 누나를 설득해 전 공주이자 현 백작 부인인 알테어 얼로이와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그녀는
필립은 완전히 변장을 마친 상태였다.
교관 제복이 아닌 적당히 품이 넓은 로브를 입었고, 얼굴에는 안경까지 썼다. 게다가 화장으로 인상을 바꾸니 조금 날카로웠던 분위기는 간데없었고 부드러운 인상의 학자풍 미남자의 모습만이 보였다.
“내가 정말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니까, 절대 실례를 범하지 않았으면 해.”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뭘로 보긴. 바로 얼마 전에 어린 학생을 앓아눕도록 때린 망나니로 보지.”
필립과 펠리시아는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걸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펠리시아의 말에 따르면 알테어 얼로이는 이곳 상점가에 자리한 한 찻집을 종종 방문한다고 했다.
“여기야. 아마 공주님께선 먼저 와 계실 거야.”
펠리시아의 말대로 본래 귀부인이나 영애들이 보여야 할 찻집의 문은 닫혀 있었다. 하지만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으니 통째로 빌린 것이었다.
“…어?”
필립은 찻집 앞에서 석상처럼 굳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건 은밀한 기세였다. 기감이 몹시 예민하지 않은 자라면 느낄 수 없는 종류의 기세였기에,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펠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응? 왜?”
“혹시 공주님께서 오러 마스터이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 잘못 먹었어?”
펠리시아는 필립의 볼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였다. 필립은 고개를 갸웃하며 찻집 문을 열었다.
‘아니, 분명히 느꼈는데.’
테이블이 고작 여덟 개 정도에 불과한 작은 찻집의 중앙에 아름다운 여인이 드레스 차림으로 앉아 있었고, 호위로 보이는 중년 사내 한 명이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여인은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홀짝이며 필립과 펠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어서 오렴. 예쁜아. 우리가 얼마 만에 만나는 거니?”
“반년이요. 공주님. 다시 뵈니 정말 좋아요.”
펠리시아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필립은 그 반응으로 저 여인이 바로 알테어 얼로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서 있지 말고 어서 여기 앉으렴. 나도 널 정말로 만나고 싶었단다. 옆에 저 아이가 네 동생이니?”
“네. 필립. 어서 인사드려.”
마흔에 가까울 나이일 알테어 얼로이는 이십 대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젊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이상하게 분위기가 밝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작 부인.”
필립은 정중히 인사했다. 알테어 얼로이는 필립이 귀엽다는 듯 생긋 웃으며 그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네가 젖먹이일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지. 그때는 나도 어린 소녀였는데, 시간이 어쩌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는지 모르겠구나.”
“…지금도 충분히 젊으십니다. 누님께서 미리 말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따님이 대신 나온 줄 알았을 겁니다.”
필립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엔 아부도 진심으로 들리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알테어 얼로이는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솜씨로 여자아이들을 홀렸구나. 결혼한 몸이 아니었다면 나도 넘어갈 뻔했는걸. 그래. 날 만나고 싶다고 했지? 무엇이 궁금하니?”
필립은 잠시 숨을 고른 뒤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얼로이 백작을 왜 살려 두시는 겁니까?”
“너 무슨 소리야? 필립?”
그 말에 깜짝 놀란 건 펠리시아였다. 그녀는 필립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알테어의 반응이 심상찮은 것을 확인하곤 눈을 크게 떴다.
알테어 얼로이는 흥미롭다는 듯 필립을 똑바로 응시했다. 필립은 그 시선에서 압박감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수석교수보다 더 세잖아. 저게 말이 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강함은 적어도 에밀 파노이 이상이었다.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건 우리 예쁜이일 줄 알았는데. 너는 이미 느끼고 있었구나?”
“처음에는 옆에 서 계시는 호위분의 기세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직접 마주한 지금은 확실히 알겠더군요. 백작 부인께서는 오러 마스터이십니까?”
“네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하나만 질문해도 되겠니?”
“예. 그러십시오.”
알테어 얼로이는 턱을 괸 채 입술만 움직이며 물었다.
“너, 혹시 검신전 소속이니?”
“아닙니다. 그런 정신병자 집단에 들어갈 마음은 없습니다.”
필립의 즉답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알테어 얼로이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너 정말 마음에 드네. 그래, 네 질문에 모두 대답해 줄게. 내가 오러 마스터냐고 물었지? 맞아. 그 경지에 이른 지 십 년은 넘었어. 그리고, 얼로이 백작을 왜 살려 두냐고? 그것도 간단해. 놈은 죽으면 안 되니까.”
펠리시아는 필립과 알테어가 나누는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다.
“…전 잠깐 나가 있을게요.”
알테어가 자리를 피해 주려던 펠리시아를 만류했다.
“그럴 필요 없단다. 예쁜아. 네 동생은 정말 대단하구나. 이십 년 동안 잘 숨겨 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기세를 흘려서 깨달은 건 아닐 테고, 뭔가 의심이 드는 구석이 있으니 날 만나고 싶다고 했겠지.”
“얼로이 백작의 행보가 너무 이상했습니다. 억지로 일을 키우려는 느낌이 강했죠. 그래서 뒤를 좀 캤더니 이런 게 나왔습니다.”
필립은 알테어 얼로이의 이름이 적힌 의뢰서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읽어본 알테어 얼로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피식 웃었다.
“용케도 이런 걸 구했구나.”
“이걸 본 순간 느낌이 오더군요. 백작 부인께서 해를 당하시면 폐하께선 이번만큼은 참지 않을 거라 여겼습니다. 제가 한 추측을 얼로이 백작이 하지 않았을 리 없죠. 그런데도 암살을 의뢰했단 건 뒷일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행보였습니다.”
필립은 한 템포 쉰 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변경백이 된 과정마저도 뒷일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은 도박수였습니다. 이젠 의심이 들더군요. 어쩌면 얼로이 백작의 목적은 오히려 실패가 아니었을까, 하고요. 그렇게 가정하니 말이 들어맞더군요. 그리고 그걸 방해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오직 백작 부인뿐이었습니다.”
알테어 얼로이는 제법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곤 감탄을 내뱉었다.
“너는 몹시도 뛰어난 아이구나.”
“…사실 백작 부인의 기세를 느끼기 전까지는 모든 게 헛된 망상일 뿐이었습니다.
“그건 우리 예쁜이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어. 그래.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18년 전의 이야기를 해 줄게. 조금 긴 이야기가 되겠지만.”
알테어 얼로이는 조금 식은 찻물로 입술을 적신 뒤, 입술을 떼었다.
“‘창성회’라는 단체를 들어본 적이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