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화
* * *
필립은 프리비아의 안내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눈을 감고, 마음을 편히 가져라. 남의 꿈에 들어가는 건 본래 상위종족의 전유물로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네 정신력이 강하고, 저 아이의 정신이 불안정하니 문제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무슨 최면 치료 같은 건가 본데.’
천천히 심호흡하며 필립은 숨을 쉬는 것을 제외한 모든 행동을 멈췄다.
거의 완전한 탈력 상태에 접어들자 무릎에 올려 둔 타니아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 내부 장기의 움직임까지 느껴졌다.
곧 의식이 흐려지더니 오직 어둠뿐이던 시야에 흐릿한 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둡고, 삭막한 풍경이었다. 필립은 곧 자신이 허공에 떠 있다는 걸 자각했다.
지저분하고 좁은 감옥에 쇠사슬에 묶인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다. 털이 듬성듬성 빠져 있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저게 타니아군.’
마치 귀신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필립은 일단 타니아를 자세히 살폈다.
‘잔뜩 겁을 먹었네. 뭘 두려워하는 걸까.’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곧 알 수 있었다. 규칙적인 발소리가 감옥 밖 복도로부터 점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엄마…이모.”
나약하고 두려움에 찬 목소리가 들린 뒤 곧 감옥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셋, 냉막한 암살자 한 명과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사내, 그리고 성별을 알 수 없는 로브 차림의 인물 한 명이었다.
그들은 털을 바짝 세우고 있는 타니아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젠 좀 고분고분해졌나?”
“아직은 반항적입니다만, 일 년 내에는 정신이 무너질 겁니다.”
귀족의 질문에 암살자가 대답했다.
“꼭 이렇게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건가? 적당히 고문해서 복종심을 올리면 되지 않나? 굳이 인격을 부수고 다시 세뇌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어설프게 복종시키기에는 흑묘족이 가진 능력이 너무 위험합니다. 다른 멍청한 놈들은 백작님의 감각을 속일 수 없겠으나, 이 계집의 혈관에는 흑묘족의 피가 짙게 흐릅니다. 철저히 정신을 부수어놓지 않으면 언젠가 큰 위협이 될 겁니다.”
그 말에 귀족은 피식 웃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나야 자네들만 믿고 있을 수밖에 더 있겠나?”
“…맡겨 주신다면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얼로이 백작님.”
암살자의 입에서 얼로이 백작이라는 호칭이 나오자마자 필립은 숨을 삼켰다. 어두워서 얼굴이 제대로는 보이지 않았으나, 블러핸 얼로이와 비슷한
‘저 새끼구나.’
물론 이곳은 타니아의 꿈속이었기에 그가 들키는 일은 없었다.
“그러면 이제 시작하지.”
귀족, 얼로이 백작의 지시에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던 로브 차림의 인물이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벗었다. 그 얼굴을 본 필립은 헛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흑묘족 족장 스텔라잖아.’
새까만 머리칼과 조금 날카로운 듯한 이목구비가 똑같았다. 다만 그가 기억하는 인상과는 조금 달랐는데, 소름이 끼칠 만큼 가학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곧 감옥의 문이 열렸다. 스텔라의 얼굴을 한 여인은 허리에 찬 채찍을 들고 타니아에게 다가갔다.
“…아니야. 저거 이모 아니야. 우리 이모는 나한테 안 그래!”
이미 이성이 좀 불안정해 보이는 타니아가 겁먹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여인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채찍을 들어 올렸다.
‘저걸로, 저 작은 아이를 때린다고?’
필립의 상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애썼으나, 애초에 그의 몸은 이곳에서 형체를 가지지 못했다.
‘지랄하지 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넋을 놓고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보통 몇 대나 버티나?”
얼로이 백작이 물었다.
“처음에는 다섯 대 정도는 버텼습니다. 요즘은 두 대면 정신을 잃는 모양이더군요.”
암살자가 대답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죄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필립은 눈을 감으려고 시도했으나, 그것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이 공간에서 그는 철저히 방관자였다.
‘아, 지랄.’
여인이 채찍을 내리치려는 그 순간이었다.
필립은 머리가 터질 듯한 분노를 느꼈고, 곧 팔을 뻗어 여인의 목을 졸랐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자각할 수 있었다. 손에 가느다란 목이 잡혀 있는 감각, 땅을 딛고 서 있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할 생각보다 먼저 든 건 눈앞의 저들을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에, 필립은 여인의 목을 붙들고 번쩍 들어 바닥에 내리찍었다.
“아아아악!”
여인은 비명을 질렀으나 안면이 함몰되어 끄윽, 하는 신음밖에 낼 수 없게 되었다.
“…아빠?”
타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괴물 새끼들 같으니…….”
필립은 이를 악물며 으르렁댔다.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이 아무 죄도 없는 어린아이를 고문할 수 있단 말인가.
“너희는 딱 기다려라. 무조건, 무조건 죽여 줄 테니까.”
그러나 그 괴물들은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갑자기 나타난 필립을 노려보는 모습 그대로 굳은 채였다.
곧 감옥 배경이 유리 거울처럼 깨져 나갔다. 타니아의 짧은 꿈이 그 끝을 고한 것이었다. 필립은 의식이 흐려지는 걸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자 보인 건 프리비아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뭐가 재미있는지 싱글거리며 필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이의 꿈속에 간섭하는 건 오랜만에 보는구나. 네놈, 사실 한 400년쯤 산 것 아니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주인이 있는 꿈속에서 자기 자신을 자각하는 건, 자아가 보통 강해서 되는 일이 아니니라. 그건 그렇다 치고, 뭘 보았느냐?”
필립은 전후 사정과 타니아의 꿈속에서 알아낸 정보들을 대충 설명했다. 다른 이들에겐 쉽게 밝힐 수 없는 정보였으나 프리비아는 알아도 그리 큰 상관이 없었다.
“…그 얼로이 백작이라는 놈이 크레센트와 엮여 있었다고? 그러면 마족하고도 연관이 있다는 말이 아니냐? 네 말대로라면 이 꼬맹이는 본래 그 백작이란 놈의 숨겨진 칼이 될 운명이었구나.”
“그렇겠죠. 그 칼로 뭘 하려고 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이제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살면서 얼로이 백작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졌거든요.”
그 선언에 프리비아는 가슴이 설레는 걸 느꼈다. 티는 내지 않았으나, 그녀는 요즘 필립의 행보를 지켜보는 재미로 살고 있었다.
아카데미에는 백 년이 넘도록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었다.
“일단 정치적인 대응을 먼저 할 겁니다. 먼저 북부 변경백의 도움을 받아야겠군요. 그의 성격상 곧 제게 연락할 테니까요. 그리고 흑묘족도 이제 일할 때가 된 것 같으니 몇 가지 일을 맡길 생각입니다.”
프리비아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심심하진 않겠네.’
“그런데 타니아는 왜 깨어나지 않는 겁니까? 혹시 어디 문제가 생긴 건 아닙니까?”
“왜겠느냐? 네놈이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뇌에 부하가 생긴 거다. 본래는 없던 정보를 억지로 쑤셔 박은 셈이니 당연한 일이지. 하루 정도 자고 나면 일어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건 다행이군요.”
필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타니아가 과거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고 나니 조금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별장으로 돌아간 필립은 곧 헤일리 바로운과 쟈니스 무르엘라의 방문을 받았다.
“…근처에서 만났어요. 교관님 댁에 간다길래 따라간다고 했죠. 마침 드리고 싶었던 말이 있었거든요.”
쟈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꿀을 탄 차를 홀짝였다.
“저는 제 아버지의 전언과, 제 개인의 사과를 위해 방문했습니다. 교관님.”
헤일리 바로운은 응접실 소파에 앉지도 않고 필립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제 불민한 행동으로 인해 교관님께 피해를 끼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다행히도 아버님께서 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나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딱히 네가 잘못한 건 없는데. 애초에 블러핸 얼로이가 먼저 시비를 건 게 아니니?”
필립이 되묻자 헤일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결과가 어쨌든, 제 행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을 곤란에 빠트렸으니 그것은 오롯이 저의 잘못입니다.”
같은 변경백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가정교육의 수준이 달랐다. 필립은 저 14세 소년을 저렇게 바르게 키워낸 바로운 변경백에게 존경심이 드는 걸 느꼈다.
저건 부모가 모범을 보여야지만 가능한 일이었다.
“본래 저희 가문 사람들은 끝난 싸움을 논하지 않습니다만, 이번에는 예외로 얼로이 가문에 정식 항의를 할 생각입니다. 그들은 교관님이 블러핸을 때려눕힌 것을 탓하기 전에, 가문의 후계자인 저를 핍박한 일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겁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쟈니스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그것 때문에 왔어요. 아빠…가 아니라 아버님께서 저번에 교관님께서 절 구해 주신 일에 대한 보답으로 이번 분쟁에서 오스왈드 가문의 편에 서겠다고 하셨거든요.”
필립은 일이 너무 쉽게 풀리자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변경백 가문 하나와 마법계에 큰 영향력을 지닌 무르엘라 후작가가 자신을 도와준다면 고작 이런 분쟁 정도는 아예 없던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지.”
필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쟈니스는 주먹을 불끈 쥐며 티가 나지 않게 좋아했다.
“일단 알겠다. 이렇게 찾아왔으니 루아와 좀 놀다 가렴. 괜찮다면 저녁 식사도 대접할 테니.”
필립은 쟈니스와 헤일리를 루아의 방으로 보낸 뒤에 자신 또한 별장을 나섰다. 유세프 상회를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아, 공자님. 어쩐 일로?”
상회 직원이 필립을 반갑게 맞이했다.
“창고지기 블랫을 만나러 왔습니다.”
“블랫은 아마 2번 창고에 있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부르겠습니다.”
“아니, 제가 직접 가죠.”
필립은 상회의 2번 창고로 향했다. 본래 창고는 외부인은 물론이고 자격이 상회 직원들마저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으나, 필립은 예외였다.
“은인께서 저를 찾아 주시니 영광입니다. 하달할 명령이 있으십니까?”
창고지기 블랫은 검은 머리의 30대 사내로, 흑묘족이었다.
“조사할 것이 있습니다. 목표는 얼로이 백작가. 얻고 싶은 건 그들이 크레센트와 협력한 증거, 혹은 증인입니다.”
저번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은 흑묘족은 필립과 유세프 상회의 지원 아래 필립의 개인 정보 조직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아직 정식 조직으로 거듭나기 전이었으나, 간단한 정보 수집 정도는 도울 수 있을 터였다.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은인.”
창고지기 블랫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흑묘족에게 살길을 열어주고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필립을 위해서라면 다소간의 희생마저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다.
“만약 그쪽에서 눈치를 챈 것 같다면 즉시 모든 활동을 멈추고 제게 보고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유세프 상회 측에 요청하면 됩니다.”
필립은 몇 마디 설명을 덧붙인 뒤 상회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