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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48화 (48/119)
  • 048화

    * * *

    ‘사실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무너질 가문이기는 한데.’

    얼로이 가문은 사실 필립의 안중에도 없던 장애물이었다.

    쌓아온 업보가 치사량에 이르러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뭘 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사라지는 세력.

    그 때문에 필립 또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그가 가진 수많은 정보는 대부분 게임 플레이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고, 얼로이 가문에 대한 정보는 그리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펠리시아와의 친밀도가 기준치 이상일 때 얼로이 가문과의 부정적 이벤트가 일어나면, 펠리시아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 줬지.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면 애들은 몰라도 된다고만 했었고.’

    아마 펠리시아 또한 가문의 힘을 이용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오스왈드 가문도 참 이상한 가문이지.’

    그는 문득 자신이 속한 오스왈드 백작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세계관에 깊숙이 얽힌 이들이 자신의 가문을 부르는 별명은 ‘웅크린 거인.’

    필립의 기억에도 배드 앤딩 직전이 아니라면 오스왈드 가문은 절대 발톱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펠리시아는 아무 조건도 없이 해결하겠다고 말했지.’

    그다지 큰 결심도 없이, 그녀는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필립을 안심시켰다. 그건 펠리시아가 가진 패가 오스왈드 가문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일단 펠리시아를 찾아가야 했다.

    필립은 교직원 기숙사로 향했다. 펠리시아를 만날 생각이었다.

    펠리시아는 자신의 기숙사 방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필립의 방문에 조금 놀란 듯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물어볼 게 좀 있어서.”

    펠리시아의 룸메이트인 디아나 파렌할은 늦게까지 검을 휘두르다 목욕을 하러 간 상황이었다. 필립은 펠리시아의 침대에 걸터앉아 얼로이 가문에 대해 질문했다.

    “얼로이 변경백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거야? 그것부터 알아야겠어. 아무래도 저쪽에서 이렇게 나오는 게 뭘 떠보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해서.”

    펠리시아는 아주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제 말했지? 지금 얼로이 백작이 서부 변경백이 된 과정에 대해서.”

    “그랬지. 좀 믿기 힘들었지만.”

    “뒷사정이 좀 복잡하지만, 왕가와 친분이 깊은 가문은 아는 사실이야. 백작 부인이 얼로이 백작을 정말 사랑해서 결혼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뭐, 누군가를 사랑해서 결혼하는 귀족 아가씨는 거의 없겠지만 그분은 특히 안타까웠어.”

    쓸쓸한 표정으로 말하는 펠리시아는 생각이 아주 많아 보였다.

    “얼로이 가문은 변경백이 되기엔 정통성이 부족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염원을 이뤄주지 않을 수는 없었지. 그는 변경백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창고에 쌓인 밀을 모두 태우고 군마가 될 말을 모두 죽일 인물이었으니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지금처럼 북부 전선이 마족과 대치하고 있지는 못했겠지. 백작을 막으려면 마족을 상대해야 할 기사들을 불러들여야 했을 거고. 폐하께서도 골치가 아프셨겠네.”

    이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계략이었다. 자본력이라는 건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과 같아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의 목 언저리에 닿아 있기 마련이었다.

    물론 왕가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태평성대였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으나, 북부의 마족들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어쨌거나, 얼로이 백작은 공주님과 결혼하기 위해 당시 정혼자였던 여인을 죽이고 타살로 위장했어. 사실 그 여인의 호위였던 벨티언 경을 우리 가문이 거뒀거든?”

    ‘오.’

    필립은 솔직히 감탄했다.

    그런 증인이 있다면 이번 일 정도는 쉽게 무마할 수 있을 터였다. 칼은 칼집에 들어있을 때 가장 위협적인 법. 넌지시 존재만 알리는 정도로도 얼로이 가문은 기꺼이 주둥이를 닥칠 게 분명했다.

    잠깐 생각하던 필립이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고작 이런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쓰기엔 너무 아까운 소재인데.’

    “그 사실, 다른 가문과 공유해도 되는 건가?”

    필립이 묻자 펠리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째려보았다.

    “…되겠니?”

    “아니,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일단 내 이야기 먼저 듣고 다시 생각해 봐.”

    필립은 펠리시아에게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고, 펠리시아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거 아니야? 물론 가능하기야 하겠지만….”

    “앞으로 갈 길이 먼데, 길을 막는 장애물은 완전히 쓸어 놔야지. 어설프게 치워 놨다가 나중에 다른 사람이 걸릴 수도 있잖아.”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필립이 문득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니, 펠리시아? 내일도 바쁠 텐데 어서… 응? 교관?”

    디아나 프렌할이 옷 대신 수건으로 몸을 감은 채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꺄아악! 언니! 그렇게 들어오면 어떻게 해!”

    필립은 펠리시아에게 등짝을 몇 대 얻어맞고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 * *

    별장으로 돌아온 필립은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주인님도 참 고생이시네요. 그러게 왜 애를 그렇게 패셨어요?

    “딱 봐도 말로 해서는 안 들을 것처럼 생겼잖아.”

    ―그건 그래요. 참 버르장머리 없게 생겼더라구요.

    네리아와 잡담을 나누던 필립은 문득 창문을 발톱으로 긁는 소리를 들었다. 필립이 일어나 창문을 열자 그 너머에서 검고 작은 형체가 휙 들어왔다.

    “…미야오옹.”

    어린 흑묘족, 타니아였다.

    그녀는 최근 거의 집고양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꽤 삼엄한 감시 속에서 생활했으나, 이젠 가만히 놔두어도 도망가기는커녕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찾아 종일 낮잠을 즐기곤 했다.

    “루아가 놀아주다 잠든 모양이네. 이리 와라.”

    게다가 필립에 대한 공포도 거의 사라졌는지, 아니면 필립이 자신을 꽤 예뻐한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종종 필립의 방에도 들어왔다.

    “야오옹.”

    타니아는 필립의 침대 위에 올라 그루밍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양이 팔자가 사람 팔자보다 몇 배는 더 좋아 보인단 말이지. 마음 같아선 나도 얼로이 백작 같은 건 내버려 두고 그냥 내 할 일이나 하고 싶은데.”

    “하아아악!”

    네리아에게 중얼거리던 필립은 문득 타니아가 하악질을 시작한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털을 바짝 세우고 송곳니를 드러낸 모습이 영락없이 잔뜩 겁먹은 모습이었다.

    ―얼로이 백작이라고 하니까 저러던데.

    필립은 네리아의 증언에 따라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얼로이 백작.”

    “하아아아악!”

    “얼로이.”

    “하아악!”

    “얼그레이.”

    “…….”

    정확하게 얼로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녀는 얼로이 가문과 어떤 접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물어볼 도리가 없지. 얘는 말을 하지 못하는데. 고양이가 어떻게 말을 해?”

    ―쟤는 말하는 고양이 아니에요?

    필립은 피식 웃으며 다시 드러누웠다. 새끼 고양이는 곧 하악질을 멈추고 짧은 다리를 움직여 필립의 옆에 몸을 말고 누웠다.

    “…머리 아파.”

    그리곤 앞발로 머리를 감싸며 끙끙거렸다. 그 약하고 안쓰러운 목소리를 들은 필립은 깜짝 놀라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너 방금 말했니?”

    타니아는 필립의 질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징징거렸다.

    아무래도 트라우마를 건드린 게 도리어 충격요법이 된 것 같았다.

    “…머리가 아프다구. 머리 아프단 말이야. 나 머리 아파.”

    “이걸 어떻게 해 줘야 하지?”

    필립은 급한 대로 타니아를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고양이는 다행히 두통이 좀 가시는 듯 낑낑대는 소리가 조금 줄어들었다.

    “아파….”

    몇 달 만에 말문이 트인 흑묘족 꼬맹이는 필립의 품에 파고들었다. 필립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가 잠들 때까지 얌전히 몸을 내어 주었다.

    ‘내일 프리비아 님을 만나봐야겠는데.’

    마침 내일은 주말이었다. 친구가 없는 프리비아는 온종일 숙소에서 시간을 죽일 터였다.

    * * *

    “대체 네놈은 왜 네놈이 아쉬울 때만 여길 찾는 거냐? 내가 네놈 부모라도 되는 줄 아느냐?”

    프리비아는 단단히 삐진 듯 필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필립은 미리 준비해 둔 고급 찻잎을 내밀었다.

    “그렇게 차갑게 구실 것까지는 없잖습니까.”

    필립이 찻잎을 내밀자 그 가치를 알아본 프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내가 차를 즐긴다는 건 누구한테 들은 거냐?”

    “학장님이요.”

    “그 빌어먹을 꼬맹이는 나이를 처먹어도 바뀌는 게 없구나. 그놈은 언젠가 오지랖 때문에 죽을 거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필립이 방에 있던 찻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하자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고급품을 들고 왔군. 핏덩이 주제에 물건 보는 눈은 있구나.”

    유세프 상회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은 상품을 그대로 들고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필립이 차를 끓여 그녀에게 내어 오자 그녀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 새끼 고양이가 말문이 트였다고? 그런데 지금은 왜 말을 안 하느냐?”

    “그러게요. 분명히 어젯밤에는 말을 했었는데.”

    타니아는 다시 입을 꾹 다물고 평범한 고양이 행세를 하는 중이었다. 어제 필립과 꽤 정이 들었는지 그의 품이 편해 보였다.

    “딱 봐도 연기를 하고 있구나. 요 앙큼한 것이. 당장 입을 열지 않으면 한입에 삼키고 말 테다.”

    그 말에 움찔한 건 필립과 타니아 둘 다였다.

    “보거라. 말을 다 알아듣잖느냐. 이 조그만 털뭉치가 감히 드래곤을 속이려 들다니….”

    그녀가 타니아를 대하는 태도를 본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귀여워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가능하겠습니까? 이 아이가 아무래도 제 적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다만 좀 안 좋은 일로 엮였는지 반응이 좀 격합니다.”

    필립은 타니아를 보채거나 해치는 일 없이 정보를 얻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런 게 가능해 보이는 사람은 프리비아뿐이었다.

    드래곤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간단한 일이지. 일단 재워 놓고, 이 꼬맹이의 꿈을 보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 해 주기는 하겠다만, 이번에는 꼭 대가를 받아야겠다.”

    “…뭘 드리면 됩니까?”

    “목욕탕인지 수영장인지 재밌는 걸 만들더구나. 내가 원할 때 그걸 빌리고 싶은데.”

    “뭐 그 정도야.”

    생각보다 쉬운 조건이었기에 필립은 수락했다.

    “어린 새끼에겐 수면 마법이 좋지 않을 수 있으니 가서 우유나 따뜻하게 덥혀 오너라.”

    프리비아의 지시에 필립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저 드래곤은 고양이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곧 필립은 따뜻한 우유를 접시에 한가득 담아 타니아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이젠 말을 할 만큼 이성이 회복된 것 같으니 그녀의 의사 또한 중요하다는 걸.

    “그러고 보니 네 의견을 묻지 않았구나. 혹시 내가 네 꿈을 좀 봐도 괜찮겠니? 만약 네가 싫다면 지금 당장 그만둘게.”

    검은 고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필립은 타니아가 잠이 들 때까지 빗으로 그녀의 털을 빗겨 주었다. 곧 고로롱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가 잠들자 프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준비해라. 아마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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