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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망나니 검술 교관이 되었다-47화 (47/119)

047화

* * *

얼로이 백작가의 일처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빨랐다.

가장 먼저 블러핸 얼로이를 가문에 불러들였고, 프리비아 아카데미에 공식적인 항의가 담긴 서신을 보냈다.

고작 사흘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 가문에도 편지를 보냈어. 네가 찾아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복수하겠다고 하더라.”

펠리시아가 준 정보에 필립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자기 아들이 세 살이나 어린 학생을 집단 린치한 건 아예 관심도 없는 건가?”

“그쪽 가문이 원래 좀 그래. 가문 선조가 원래 흘로펠드 후작가의 사형집행인 출신인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인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어 귀족 작위를 받았지.”

그녀는 몇 분에 걸쳐 얼로이 백작가의 역사를 설명했다. 그것들을 모두 들은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대로 인성파탄자였구나.”

그야말로 배신과 협잡, 그리고 음모로 점철된 역사였다. 그들이 서부의 변경백이 된 건 전대 가주 시대였는데, 그 과정을 들은 필립은 기가 막혀 헛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서부 경제를 인질로 잡고 왕을 협박해? 그리고 그게 통해서 왕의 사위가 되었다 이거지?”

전대 얼로이 백작은 타고난 장사꾼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밀과 말 등등 군수품으로 쓰이는 물자의 산지를 잠식했고, 결국 곡창 지대의 대부분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거의 모든 신경을 북부에 쏟고 있던 왕가로서는 대비할 수 없을 만큼 음흉하고 치밀한 행동이었다.

밀과 군마의 가격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게 된 시점부터, 백작은 왕을 압박하기 시작한 듯했다.

“지금 얼로이 백작 부인은 현 국왕이신 벨로페르 2세께서 가장 아끼는 딸이었지. 얼마나 예쁘고 친절한 분이셨는지 몰라.”

얼로이 백작 부인은 펠리시아와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날 많이 예뻐하셨어. 아버님을 따라 왕궁에 들릴 때마다 달콤한 간식을 실컷 먹게 해 주셨던 게 기억나. 그분께서 얼로이 백작과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많이 울었던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필립이 탄성을 뱉었다.

“아, 그래서….”

펠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원작 게임에서 얼로이 백작은 종종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곤 했다. 그 내막을 조사하는 퀘스트도 있긴 했으나 내막은 절대 드러나지 않았다.

‘어쩌면 마누라한테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결론적으로 필립 너는 잘못한 게 없어. 그것만 기억하고 행동하면 돼. 증인도 있고 정황도 너무 명확한 데다 블러핸이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잖아.”

“그건 그렇지.”

빙의 전의 세상이었더라면 신문 사회 1면에 등장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으나 다행히도 이곳은 명분이 사실보다 조금 더 중요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필립은 모르고 있었다.

일반적인 사회 풍조 같은 건 완전히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현 서부 변경백인 안드리안 얼로이는 모든 이의 예상보다 조금 더 미친 사람이었다.

다음날 정오, 프리비아 아카데미는 서부 변경백의 봉신인 한 기사의 방문을 받았다.

* * *

“…아니, 애새끼가 좀 맞았다고 가문의 기사를 보내고 그러나?”

검술 학부 수석교수인 에밀 파노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자신을 찾아온 젊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부디 언사에 주의해 주십시오. 파노이 경. 귀 아카데미의 교관인 필립 오스왈드는 얼로이 가문을 모욕했습니다.”

얼로이 가문의 봉신인 카이어 셸보스는 서부 지방에서 꽤 이름을 날리는 기사였다. 고작 둘째 아들이 맞았다고 해서 찾아올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수석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젊은 기사의 버릇없는 태도는 둘째치고서라도, 이렇게까지 명확한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는 뻔뻔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쪽 도련님이 먼저 바로운 가문의 꼬맹이를 집단공격했다고 들었는데. 우리 교관은 그걸 말리려 끼어든 거고. 정황은 이미 전해 듣지 않았나?”

“그건 오직 아카데미 측 입장일 뿐입니다. 제 주인님께선 필립 오스왈드와 같은 인물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모든 조사를 마쳤다니까? 그 자리에 있던 당사자와 목격자의 증언까지 듣고, 얼로이 가문의 애새끼 잘못이라고 이미 결론이 났는데? 게다가 애새끼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카이어 셸보스는 수석교수의 설명에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 도련님께선 필립 오스왈드의 과한 손속으로 인해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셨습니다. 어쩌면 검사로서의 생명이 끝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게 사제의 소견입니다.”

“뭐라고?”

수석교수는 눈을 치떴다. 물론 정말로 그 말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 또한 블러핸 얼로이가 얼마나 다쳤는지는 이미 확인했었다.

“바다와 같이 넓은 아량을 지니신 저희 주인님께서는 필립 오스왈드가 직접 찾아와 사과한다면 이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의향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카데미 측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카이어 셸보스는 뻔뻔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밀 파노이는 그 태도에서 많은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명히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군. 이 사건을 키워서 뭘 할 생각인 것 같은데….’

그때 미리 수석교수의 호출을 받았던 필립이 연구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들어온 필립은 카이어 셸보스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저 친구? 얼로이 백작 가문의 봉신이지. 자네를 데려가려고 왔다던데.”

수석교수가 설명하자 필립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를 말입니까? 왜요? 자식 교육을 잘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하려고 부르는 겁니까?”

그 태연한 모습에 수석교수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카이어 셸보스는 욱하는 성질을 참아내지 못했다.

“…입을 조심해라. 필립 오스왈드.”

변경백의 기수인 카이어는 백작가의 아들인 필립보다 신분이 아래가 아니었다. 그가 필립을 노려보자 필립도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네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증인은 이미 확보해 두었다. 지금 얌전히 날 따라온다면 변경백께선 너를 용서하실 테지만, 반항한다면 오스왈드 백작 가문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필립은 카이어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에밀 파노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석교수님. 이 사람 지금 뭐라고 하는 겁니까?”

“자네가 블러핸 얼로이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는데, 그걸 말하는 모양이군.”

필립은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대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와. 진짜 대단한 양반들이네.’

분명히 이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둘째 아들의 다리를 직접 부러뜨린 것일 터였다.

그게 아니면 거짓으로 블러핸의 부상을 부풀린 것이겠지만, 필립의 직감은 블러핸의 다리가 진짜로 부러졌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필립은 혀를 내두르며 카이어 셸보스를 빤히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진짜 대단하십니다. 대체 변경백에게 뭘 받았길래 양심도 명예도 내던지고 주인을 대신해서 거짓말을 해 주는 겁니까? 그렇게 살면 인생이 재밌고 보람찹니까?”

“…뭐라고?”

난데없는 급발진에 카이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고작 그렇게 살려고 평생 검을 휘둘렀냐는 말입니다. 뭔가 좀 슬프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 처음 검을 잡았을 때부터 ‘아, 나는 커서 뻔뻔하고 비겁한 주군을 모셔야겠어. 그리고 온갖 더러운 일을 대신하면서 출세해야지.’…뭐 이런 꿈을 가지지는 않잖습니까. 저는 금화로 성을 쌓아준다고 해도 절대 못 그럴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필립의 말을 모두 들은 카이어는 손을 슬금슬금 허리에 찬 검으로 움직였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는 정신 공격이었다.

“…감히, 귀족 취급도 못 받는 개망나니 주제에 나를 모욕하고 내 주군을 모욕하다니….”

“뭐라는 겁니까? 내가 망나니라지만 그래도 본성을 속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망나니로 살았죠. 하지만 그쪽이나 그쪽 주인은…이크, 수석교수님. 저 사람 칼 뽑으려고 하는데요.”

필립은 카이어가 검을 뽑으려 들자 즉시 에밀 파노이의 뒤로 숨었다.

그 유치한 행동에 수석교수는 헛웃음을 뱉었으나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카이어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그만.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건 용납하지 않겠네.”

“하지만 파노이 경, 지금 저 망나니가 하는 말을 모두 들으셨잖습니까?”

카이어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으나 수석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나이를 먹으면 귀가 잘 안 들려서 말일세.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듣지 못했군. 불만이 있다면 귀족답게 결투로 해결하게.”

필립이 씨익 웃으며 끼어들었다.

“저는 싫습니다. 검이 흉갑만 스쳐도 목이 잘렸다고 호들갑을 떨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일을 키우려고 둘째 아들의 부상을 부풀린 일을 비꼬는 것이었다.

카이어 셸보스는 격한 분노로 어지럼증까지 느꼈다. 그는 이곳에 잠깐이라도 더 있었다간 자신이 칼을 뽑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를 갈았다.

“…파노이 경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는 필립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는 몸을 돌려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수석교수는 필립을 손님용 소파에 앉힌 뒤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대로 재미는 있었다만, 어쩌려고 그렇게 도발한 겐가?”

“어차피 절 물어뜯으려고 작정하고 온 사람인데, 좀 놀린다고 여기서 일이 더 커지겠습니까? 뭐 일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면 실베르 나이트 단장님께 도망가서 검신전에 들어가면 되죠.”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에 수석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다 계획이 있구만. 그래. 하지만 조심하게. 둘째 아들 다리까지 부러뜨린 걸 보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아카데미에 얌전히 붙어 있으면 별다른 수작을 부리진 못할 것이야.”

“예. 명심하겠습니다.”

필립은 그렇게 대답한 뒤 수석교수와 차를 한 잔 마셨다.

‘날 부득불 데려가려는 걸 보니 뭔가 함정을 준비한 것 같기는 한데. 어떻게 한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사건이 좀 길어질 것 같았다. 물론 그냥 당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필립은 미리 대비를 좀 해놓으리라 결심했다.

* * *

필립을 고립시키기 위한 수작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필립. 얼로이 가문에서 협박 편지가 왔어요. 당신을 향한 지원을 끊지 않으면 유세프 상회와 다시는 거래하지 않겠다는데요?”

가장 먼저 유세프 상회를 이용한 압박 시도가 있었다. 리즈리엘이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방문하자 필립은 기가 찬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교직원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데. 거긴 너무 좁아서.”

“그 농담 정말 재미없어요. 아무튼, 일단 제 개인적인 지원이라 상회와는 상관없다는 답장을 보내긴 했는데, 설마 정말로 거래를 끊을 생각인 걸까요?”

리즈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얼로이 백작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뭘 노리는 건지 알아야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울 텐데, 이 사건을 키워서 그가 궁극적으로 뭘 얻으려 하는지가 너무 희미했다.

“…아마 정말로 그럴걸?”

필립은 그렇게 대답한 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귀찮게 나온다면, 먼저 행동해야 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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