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화
* * *
“미리 말해 두는데, 너희 넷 중에 혹시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뉘우칠 자세가 되어 있는 학생이 있다면 뒤로 좀 물러나 있어라.”
헤일리는 본래 필립을 싫어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체계적이면서도 엄한 예절 교육을 받은 그에겐 필립처럼 명문가의 후계자로서 응당 책임져야 하는 의무를 내팽개치고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사는 귀족은 같은 귀족도 아니었다.
하지만 1학년의 새 학기가 시작된 지도 벌써 몇 달.
헤일리가 지금껏 봐 온 필립은 소문으로 들어왔던 모습과는 좀 다른 듯했다. 학생들에겐 친절하고 상냥했고, 단 한 번도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얼마 전 마법 학부의 실습에서 일어난 사건에 관해 전해 들은 이후론 필립에게 존경심마저 들려고 했다.
뱀파이어는 굉장히 강력한 마족으로, 그런 괴물에게서 학생 두 명을 지켜내는 건 보통 실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필립이 교수에 근접한 실력을 지녔다는 건 증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 교관님. 절 모르시는 걸 보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저학년 교관이신 것 같은데. 후회할 일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블러핸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죽거렸다. 그는 교관이라 해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4학년쯤 되면 교관보다 강해지는 학생도 한둘쯤은 나오기 마련이었고, 블러핸 얼로이는 그중 하나였다.
블러핸을 제외한 다른 4학년생들은 전부 불안한 표정으로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 학생들은 필립이 누구인지 아는 듯했다.
‘서부는 멀고, 중앙은 가깝지. 블러핸 같은 머저리 편을 들다가 오스왈드 가문에 밉보일 수는 없잖아.’
‘뱀파이어를 만나고도 살아 돌아왔다는데… 아무리 블러핸이 강해도 어림도 없겠지.’
‘진짜 잘생겼다. 애인이 있으려나?’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학생들은 눈빛을 교환한 뒤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물러났다.
“…너희 뭐 하냐?”
블러핸이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모자란 병신들 같으니, 고작 교관한테 밉보이는 게 무서워서 날 배신해? 어디 두고 보라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필립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열여덟이면 말로 해서 들을 나이는 아무래도 지났겠지. 하는 행동을 보니 부모 말도 안 들을 것 같은데 내 말을 들을 리가 있나.”
그 중얼거림을 들은 블러핸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선을 넘으신 겁니다. 교관님. 제 가문을 모욕하셨잖습니까.”
필립은 대답하지 않고 블러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블러핸은 뽑지 않은 검을 손에 든 채 다리를 벌리고 필립의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별 망설임도 없이 교관을 공격하려 드는 그 모습에 필립은 기가 찼다.
“너는 좀 크게 혼나야겠다. 블러핸 얼로이.”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기척도 없이 땅을 박찼다.
블러핸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필립과의 거리는 고작 두 발자국에 불과했다.
‘주먹 한 대 정도는 맞아 주지. 교수도 아니고 교관 주제에, 감히 내게 무기도 없이 덤벼?’
제아무리 서부 변경백의 아들이라도 교관을 먼저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먼저 폭력적인 행위를 당한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가문의 명예를 들먹여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필립이 크게 한 걸음을 밟는 그 순간 블러핸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일단 필립의 자세가 너무 비범했다.
보통 사람은 주먹을 휘두를 때, 힘을 제대로 실어 치기 위해서 몸이 크게 움직이기 마련인데 필립은 뭔가 달랐다.
아차 하는 순간 그의 주먹은 이미 블러핸의 턱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어?’
블러핸은 뇌가 흔들리는 충격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오러를 끌어올려 신체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한 방에 기절했을 게 뻔했다.
나름대로 단련된 검사인 블러핸은 즉시 자세를 다잡고 반격하려 했으나 필립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펀치가 블러핸의 간, 명치, 비장, 그리고 턱을 노리고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헤일리는 홀린 듯 필립의 움직임에 몰입했다.
필립이 펼치는 저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일종의 무술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극도로 세련되었으며, 체계적으로 개발된 흔적이 엿보였다.
소름이 끼칠 만큼 합리적이면서도 효율적인 움직임. 속임수와 진짜 공격 간의 차이가 거의 없다시피 할 만큼 정교한 동작.
“와….”
얼마나 몰입했는지, 귀족의 체면도 잊어버리고 저절로 감탄이 나왔다.
“헤일리! 괜찮아?”
그때 루아와 올리비아, 아니스가 리즈리엘과 함께 나타났다. 그녀들은 곧 푸줏간을 털려다 걸린 개처럼 얻어맞는 블러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즈리엘은 문득 생각했다.
‘보통 저렇게 맞으면 사람이 죽지 않나?’
블러핸의 몸은 공중에서 내려오지도 못했다. 필립이 때리는 방향으로 날아가려다가 반대쪽으로 날아오는 타격에 다시 반대쪽으로 몸이 쏠렸다.
물론 필립은 최대한 사정을 봐 주고 있었다. 주먹을 찔러 넣는 대신 최대한 짧게 끊어쳤고, 맨 처음 펀치를 제외하면 오러도 쓰지 않았으니 블러핸은 딱히 크게 다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다만 죽고 싶을 만큼 아플 터였다.
필립은 블러핸이 졸도하기 직전까지 실컷 두들긴 뒤 주먹을 거두었고, 블러핸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어흐윽… 끄으으윽….”
체면도 자존심도 그의 비명을 막을 수 없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탓에 마치 고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우, 속이 다 후련하네.’
간만에 스트레스를 해소한 필립이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깊게 숨을 뱉었다.
“데리고 가라. 너희 친구잖니? 그리 세게 때리지는 않았으니 며칠 앓으면 다 나을 거다.”
“아… 네!”
필립의 말에 4학년 학생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4학년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블러핸이 저런 꼴이 된 걸 보고도 느리게 움직일 사람은 없었다.
“아악! 아아악!”
강제로 부축된 블러핸이 죽겠다는 듯 비명을 질러댔으나 결국에는 반쯤 끌려가다시피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필립의 시선이 헤일리를 향했다. 그 소년은 마치 기적을 경험한 신자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피가 나는구나. 헤일리 바로운. 먼저 상처를 돌봐라, 그리고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내게 설명해야 할 거다.”
“그런 거라면 저희가 설명할 수 있어요. 교관님!”
올리비아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필립은 그제야 한 여인과 세 소녀를 발견하곤 눈을 깜빡였다.
“…너희는 여기 왜 있는 거니?”
“그게 그러니까….”
전후 사정을 모두 들은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경백 가문 간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건 필립도 알고 있었다.
두 가문 사이의 시비에 루아와 친구들이 말려든 셈이었다.
“그런데 왜 다섯 명과 싸우고 있던 거지?”
필립이 묻자 헤일리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얼로이 가문은 원래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혼자서 덤비더니 제게 몇 번 진 이후로는 자기 무리를 이끌고 와서 입만 나불대더군요. 짜증이 나는 바람에 그냥 다 같이 덤비라고 했고, 그 무렵부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헤일리의 태도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으나 극도로 공손했다. 필립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역시 조연급이라 종자부터 다르구만.’
원작의 헤일리 바로운은 주인공의 동료가 될 수도 있는 캐릭터였다. ‘명예로운 귀족’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빼다가 박은 듯한 성격이라 여성 유저들에게 인기가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도덕심 파라미터가 너무 높아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며 주인 있는 아이템을 취한 적이 있다면 동료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획득 난이도가 높은 동료였다.
“어쨌든 네가 잘못한 게 없다니 되었다. 고생했구나.”
필립은 그렇게 헤일리를 격려했다. 리즈리엘이 필립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얼로이 백작 가문이면 서부 변경백인데, 그 아들을 저렇게 반쯤 죽여 놔도 괜찮은 거예요? 제가 그쪽 가문은 좀 아는데, 가만히 있을 만한 작자들이 아니거든요. 그쪽 가훈이 뭔 줄 알아요? ‘은혜는 내일 잊어도 원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말 것’. 얼마나 지독한 사람들인데요?”
보고 있자니 속은 시원했으나 그녀는 필립을 걱정했다.
“그건 우리 누나가 해결해줄 거야.”
“펠리시아 양이요?”
“그래.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별장에서 애들하고 같이 목욕이나 해 봐. 내가 왜 수영장을 지으려고 하는지 알게 될 테니까.”
필립은 그렇게 말한 뒤 헤일리를 비롯한 아이들을 데리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출근한 필립은 펠리시아를 찾아가 어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화를 낼 줄 알았던 펠리시아는 어째서인지 오히려 필립을 칭찬했다.
“잘했어. 필립. 그렇게 행동했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보니까 블러핸 얼로이도 크게 다치지도 않은 것 같네.”
“…잘했다고?”
필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자 펠리시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이 교관의 정당한 지시를 무시하고 오히려 대들었는데, 그걸 혼냈다고 널 탓할 수는 없잖아? 이번 일은 누나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얼로이 가문이 난폭하게 나올 수는 없을 테니까.”
펠리시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필립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누나.”
그는 펠리시아가 어떤 방법으로 얼로이 가문의 입을 닫게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얼로이 가문은 빌런 집단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원작에서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면 얼로이 가문과 부딪힐 일이 꽤 많았는데, 펠리시아가 조력자 포지션이라면 항상 쉽게 해결되곤 했다.
‘…오스왈드 가문은 서부 변경백, 코빙턴 얼로이의 약점을 알고 있지.’
그것도 아주 역겹고 추악한 약점을 붙들고 있었다.
필립이 신경을 쓰던 건 오직 기껏 올려놓은 펠리시아의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 정도.
지금 보니 그럴 걱정은 없어 보였다. 펠리시아는 진심으로 필립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수업이 끝난 오후, 필립은 헤일리 바로운의 면담 요청을 받았다.
필립은 곧 수락했고, 학부실까지 찾아온 헤일리는 비장한 표정으로 필립을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때 보여주셨던 그 무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부디 제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평생 은사로 모시겠습니다.”
블러핸 얼로이를 두들겼던 공격이 헤일리를 깊게 감화시킨 듯했다.
“어, 그게.”
필립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과연 판타지 세계관의 검사에게 복싱을 가르치는 게 옳은 일인지는 그도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단 오늘은 돌아가라. 생각을 좀 해 보고 말해 줄 테니.”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헤일리 바로운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학부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