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 * *
“…하아.”
헤일리 바로운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필이면 가장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마주쳐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블러핸 얼로이는 프리비아 아카데미 4학년생으로, 자신의 무리로 보이는 학생 네 명과 함께였다. 여학생이 둘에, 남학생이 둘이었다.
그들은 블러핸의 말이 꽤 웃겼는지 키득대며 루아 일행의 반응을 살피는 듯했다.
“…누구시길래 이렇게 무례한 거죠?”
올리비아 누에스가 블러핸을 째려보며 물었다. 블러핸 얼로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우리 북부 도련님이나 따라다닐 정도면 뻔한 신분일 텐데, 소개는 너희가 먼저 해야지. 응? 안 그래, 1학년 아가들아?”
블러핸은 꽤 잘생긴 미소년이었으나, 올리비아와 아니스는 그의 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경멸과 무시가 너무도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뭐라고요? 아가…?”
올리비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자 블러핸의 무리 중 남학생 한 명이 호들갑을 떨었다.
“오, 화낸다. 화내. 블러핸, 네가 누군지 모르나 본데?”
“뭐, 한적한 영지 출신이면 모를 수도 있지. 그걸 탓하지는 말자고. 날 모를 만한 가문 출신인 게 저 애들 잘못은 아니잖아?”
블러핸은 그렇게 대답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일리가 미간을 좁히며 앞으로 나섰다.
“내 친구들 그만 건드리고, 할 말이 있다면 내게 하지?”
“뭐? 친구? 도련님이 그런 것도 키웠어? 그보다 도련님, 여긴 아카데미인데 선배님이라고 불러야지. 여긴 네 아버지도 없잖아. 그렇게 건방지게 굴어도 되나?”
블러핸 얼로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네 아버지도 여기 없지 않나? 교류 대련에서 날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으면서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거지? 설마 네가 끌고 다니는 그 쭉정이들을 믿고 그러는 건가?”
헤일리는 세 살이나 많은 블러핸을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쯤에서 블러핸의 신분을 눈치챈 올리비아는 손을 떨기 시작했고, 아니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올리비아의 뒤에 숨었다.
“뭐? 쭉정이? 이봐요, 바로운 가문의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선배를 그렇게 무시하면 안 되죠.”
블러핸을 쫓아다니는 여학생 한 명이 도끼눈을 뜨며 따지고 들었으나 헤일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군. 불만이 있다면 결투를 신청해라. 아니면 거기 블러핸 얼로이에게 복수해 달라고 하던가. 저 사람에게 그럴 만한 인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한 헤일리는 끼고 있던 장갑 한쪽을 벗더니 블러핸의 얼굴에 힘껏 내던졌다. 블러핸은 장갑을 피하지 않았고, 하얗게 물들인 가죽 장갑은 블러핸의 뺨에 부딪혔다.
“…이 새끼가.”
블러핸 얼로이는 눈썹을 꿈틀했다.
“물론 나는 내 친구들의 명예를 모욕한 걸 용서하지 못하겠으니,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내게 덤빌 용기가 있나, 블러핸?”
뒷일이라곤 생각하지 않는 듯한 그의 행동에 루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순간 할 말을 잊고 침묵했다. 블러핸을 따라온 무리는 어떻게 하겠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따라와, 이 새끼야.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헤일리는 블러핸의 제안에 피식 웃더니 올리비아와 아니스, 그리고 루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는 이제 돌아가라. 이건 내 일이니까.”
“…싸우는 거야?”
조금 전에 상황을 파악한 루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묻자 헤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저 정도는 거뜬하다.”
단순 계산으로 오 대 일이었다. 제아무리 헤일리가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녔다지만 4학년 다섯 명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올리비아와 아니스는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가지.”
헤일리는 앞장서서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걸었다.
“죽이지만 않으면 내가 뒷수습을 할 테니 사정 봐주지 마. 알겠어?”
블러핸이 낮은 목소리로 4학년 학생들을 향해 일렀다.
그들이 멀어지자 아니스가 올리비아를 향해 물었다.
“…우린 어쩌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우리보고 친구라고 했는데, 다섯 명을 상대하게 놔둘 수는 없잖아. 어떻게든 도와줘야지.”
올리비아의 대답에 아니스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4학년 선배들을 상대할 수 있겠어? 난 아직 목검도 잘 못 다룬단 말이야.”
“도움을 청할 곳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카데미였다면 교수님이나 교관님께 말했겠지, 하필 여기는 밖이잖아…?”
올리비아 또한 뾰족한 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좋은 애 같던데.’
오늘 처음 이야기를 나눴으나 헤일리 바로운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머, 루아 아니니?”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루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루아는 낯익은 여인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리즈 언니!”
리즈리엘은 루아와 꽤 친했다. 벌써 몇 번이나 함께 밥을 먹거나 티타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필립이 돌보는 아이였기에 그녀는 루아와 억지로라도 친해져야 하는 상황이었고, 다행히 루아는 요즘 애들답지 않게 건방지지도 않았고, 애교가 많았다.
상인인 그녀는 필립을 공략하기 위해선 먼저 루아부터 공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친구들하고 뭘 사러 나온 모양이구나? 그러면 날 찾아오지 그랬니? 뭐가 되었든 최고급 상품으로 내어줬을 텐데.”
아니스가 입 모양으로 누구냐고 물었다.
“리즈 언니는 교관님 친구야.”
루아가 대답하자 올리비아의 눈이 반짝였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루아 친구고, 저는 올리비아 누에스라고 해요. 옆에 얘는 아니스 프랄린이고요. 저, 초면에 죄송하지만, 저희를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응? 무슨 일인데?”
리즈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희 친구가 무서운 4학년 선배들한테 끌려갔어요….”
사정을 들은 리즈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큰일이네, 어디로 갔는지는 아니?”
“저기 저쪽으로요.”
올리비아가 가리킨 방향을 본 리즈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킥, 하고 웃었다.
그 방향은 방금까지 그녀가 필립과 함께 수영장 건설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던 카페테리아 쪽이었다.
리즈리엘은 조금 급한 일이 생겨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던 참이었고, 필립은 아직 카페테리아에 남아있을 터였다.
* * *
저녁의 카페테리아는 꽤 한산했다. 필립이 찾은 가게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였기에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이가 좀 있는 인문학부 교수나 마법 학부 교수들, 혹은 그들을 보좌하는 교관들이 주로 찾는 곳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건 무조건 될 사업이지. 고작 수영장으로 끝날 게 아니야. 판타지 세상의 스파랜드? 금화를 갈퀴로 쓸어 담을 수도 있겠어.’
필립은 리즈리엘과 함께 구상한 사업 계획서를 검토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물단지로 여겼던 요정 유나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일단 지금 당장은 수영장만으로 만족해야겠지. 그녀를 너무 물건 취급하는 것도 좋지 않으니까.’
나중에 유나와 좀 친해지면 실컷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수영장이 완공되기 전까지 요정의 멘탈을 케어할 필요성을 느낀 필립은 대체 요정이 뭘 좋아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카페 주인이 필립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저, 검술 학부 교관님이시죠?”
이곳의 주인은 30대 초반의 여인이었다.
“예. 맞습니다만?”
그녀는 귀찮음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용건을 말했다.
“지금 아카데미 학생들이 뒷골목에 모여 있는데, 아무래도 싸움이 날 것 같다고 해서요.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해결하고 올 테니 혹시 제 일행이 오거든 제가 자리를 비운 이유를 좀 전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럴게요. 고마워요.”
필립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테리아를 나섰다.
필립이 뒷골목에 다다랐을 때 이미 싸움은 일어나 있었다.
아무리 막 나가는 학생들이라도 차마 검을 뽑을 수는 없었는지 검집째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다섯 명이 한 명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다섯 명과 싸우는 한 명은 필립의 학생이었다. 벌써 몇 대나 얻어맞았는지 목덜미에 시퍼런 멍이 들었고, 이마에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섯 명을 상대로 밀리지 않으려는 투지를 드러내는 모습이 보기에 좀 안타까웠다.
“뭣들 하는 거냐? 당장 멈추지 못해!”
필립이 크게 소리치자 나타난 인물이 교관임을 깨달은 학생들이 곧 하던 걸 멈추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아, 누구십니까?”
블러핸 얼로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땀을 훔쳤다.
그는 필립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4학년과 1학년 교관은 서로 마주칠 일이 없는 데다, 왕국 서부 출신인 블러핸은 중앙 귀족 출신인 필립과 엮일 일이 거의 없었다.
“아카데미 교복을 입고 거리에서 싸움을 벌이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헤일리 바로운, 네가 설명해라.”
“…죄송합니다. 교관님”
헤일리는 변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블러핸은 인상을 찌푸리며 오히려 필립에게 대들었다.
“후배가 좀 건방지게 굴길래 교육을 좀 하려고 했습니다. 딱히 일을 크게 벌릴 생각은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 넘어가시죠. 저희 학년 교관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뭐?”
필립은 블러핸에게서 익숙한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어이가 없던 나머지 웃음이 나오는 걸 느끼곤 미간을 좁히고 블러핸을 노려보았다.
“이름은?”
“저 말입니까? 블러핸 얼로이입니다.”
필립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리 신경을 쓸 가치가 없는 엑스트라였기에 저 소년이 얼로이 변경백 가문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만 겨우 알 뿐이었다.
“그래. 블러핸 얼로이. 너는 내가 책임지고 정학 처분을 받도록 하겠다.”
“교관님이 무슨 권한으로요? 정학 처분은 수석교수님께서 내리시는 것 아닙니까?”
헤일리 바로운은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경이롭다는 듯 감탄 섞인 눈빛으로 블러핸을 바라보았다.
북부의 수호자 가문의 후계자인 자신도 필립 오스왈드에게 대놓고 반항할 자신이 없는데, 가문의 둘째인 블러핸이 대체 뭘 믿고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모르는 건가?’
오스왈드 가문은 지방의 왕이나 다름없는 변경백 가문으로서도 함부로 대할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지금으로써는 블러핸이 필립의 정체를 모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멍청할 수가 있지?’
검술 학부의 교직원들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그 유명한 필립 오스왈드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인가. 헤일리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입 안이 터졌음을 깨닫고 피를 뱉어냈다.
“…블러핸 얼로이. 경고하는데, 태도를 좀 공손하게 바꾸는 편이 좋을 거다. 내가 너희 학년 교관이 아닌 건 맞지만, 잘못을 저지른 학생을 훈계하는 건 모든 교육자의 의무이기도 하니까.”
필립은 일단 한 번 참았다. 그는 아무리 학생이 화를 돋운다고 하더라도 두 번 정도는 용서할 수 있었다.
“너와 친구들에게 기회를 주마.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한다면, 정학만은 피하도록 해 주겠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너 때문에 네 친구도 함께 정학을 당하게 될 거다.”
필립 말에 4학년 학생들의 시선이 블러핸에게 향했다. 블러핸은 그 간절한 눈빛들을 가볍게 무시했다.
“뭐…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실 수 있으면요.”
그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는 듯했다.
필립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허리에 찬 검과 외투를 벗어 헤일리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잠깐 들고 있어 줄래?”
“예? 아, 예.”
헤일리는 필립의 물품을 받아 멀찍이 물러났다.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는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