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 * *
검술 수업이 막 끝난 오후였다. 루아는 올리비아 누에스, 아니스 프랄린과 함께 휴게실에서 레몬즙을 넣은 시원한 홍차를 즐기며 꿀맛 같은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루아. 너 요즘 예쁜 것 같아.”
올리비아 누에스는 루아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대체 뭘 한 건지 모르겠지만, 루아의 피부에서 은은한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사람이 달라진 것만 같았다.
“사실 나도 느꼈어. 이상하게 피부가 좋단 말이야.”
옆에 있던 아니스 프랄린이 손을 뻗어 루아의 볼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나 루아가 그러지 않을 거란 사실을 올리비아와 아니스는 잘 알고 있었다.
“그애? 난 모루겟는뎅?”
아니스가 볼을 잡아당기자 루아는 뭉개진 발음으로 되물었다.
쌍둥이 동생과 헤어진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루아는 활발하고 귀여운 소녀였다.
또래보다도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외모 탓인지 검술 학부의 여학생들은 그녀를 딱히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다. 특히 아니스와 올리비아는 거의 애착인형처럼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아니, 분명히 뭔가 있어. 너 교관님하고 같이 산다고 하지 않았니? 대체 얼마나 잘해 주시길래 고작 몇 달 만에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거야?”
아니스가 루아의 볼을 놓아 주곤 머리카락을 매만지자, 올리비아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게. 게다가 검술 실력은 또 어때. 난 아홉 살 때부터 가문에서 검술을 배웠는데, 요즘 보면 루아 네가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단 말이야. 검술도 교관님이 따로 가르쳐 주시는 거야?”
“응.”
친구들의 질문에 루아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이 그렇게 늘려면 분명히 주말까지 열심히 훈련했겠네. 나도 열심히 해야겠어. 기사가 되어서 가문의 도움이 되려면 그래야겠지.”
올리비아 누에스는 주먹을 불끈 쥐며 그렇게 다짐했다. 그녀의 형제자매 중에선 검술을 깊게 익힌 사람이 없었기에, 그녀는 기사가 되어 가문의 기사단을 지휘해야 했다.
루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주말에 훈련 같은 걸 해 본 기억이 없었다. 타니아와 놀거나, 필립과 놀기 바빴다.
비록 세상 물정은 몰라도 기본적인 눈치는 있었기에 그녀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스가 루아의 팔짱을 끼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중엔 루아가 헤일리 바로운보다 더 강해지는 거 아닐까? 실력이 지금처럼 빨리 늘면 말이야.”
그러자 어디선가 대답이 들려 왔다.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아니스 프랄린은 키득대며 덧붙였다.
“에이,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루아는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는데, 지금 보면 어릴 때부터 검술을 배운 아이 같단 말이…… 그런데 방금 누가 대답한 거야?”
루아와 올리비아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걸 보자 아니스는 뜨끔한 표정으로 그녀들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쉽게 따라잡힐 만큼 내 수련이 얕지는 않거든.”
그곳에는 바로운 변경백 가문의 후계자, 헤일리 바로운이 테이블에 팔을 기대고 서 있었다.
“앗.”
아니스 프랄린은 급히 올리비아의 뒤로 숨었다.
헤일리 바로운은 1학년 학생 중에선 가장 신분이 높은 편에 속했다.
남작 가문의 딸인 올리비아 누에스나 상인 가문의 딸인 아니스 프랄린은 아카데미가 아니었다면 그와 마주칠 일이 없었을 터였다.
프리비아 아카데미가 명문가인 오스왈드 백작 가문 소속의 펠리시아를 교관으로 영입한 것도 학생 중 헤일리처럼 귀한 신분의 아이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헤일리 바로운은 여유롭게 웃으며 세 소녀를 바라보았다.
1학년 학생들은 벌써 나름대로 파벌을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여학생들은 서부 곡창 지대의 주인인 코미어 후작 가문의 딸, 엘리자베스 코미어를 중심으로 뭉쳤고, 명성 높은 기사단을 소유한 벨린저 백작 가문의 아들인 채플리 벨린저와 ‘흑사자’라고 불리는 검사, 호울센 브라이더의 아들인 헤롤트 브라이더가 남학생 세력을 양분하는 중이었다.
헤일리 바로운은 딱히 그런 무리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만한 신분의 학생을 누가 건드리지도 않을뿐더러, 그는 검술을 제외한 다른 것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자기 자신의 발전보다는 친분을 쌓는 데 매달리는 학생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딱히 널 놀리거나, 비난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그냥 우리끼리 하는 농담일 뿐이야.”
올리비아 누에스가 아니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헤일리 바로운에게 밉보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딱히 너희가 날 욕한다고 해서 화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도 잘 아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냥 내 이야기가 들리길래 끼어든 것뿐이야.”
헤일리는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적거렸다. 그는 자신처럼 아무 무리에도 속하지 않은 소녀들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안녕!”
문득 루아가 헤일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헤일리는 루아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다. 1학년 학생 중에서 유일하게 그보다 체력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다 죽어가는 얼굴로 다른 아이들보다 몇 바퀴나 앞서 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지금 내게 인사한 건가?”
헤일리의 질문에 루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애? 인사하면 안 돼?”
그가 놀란 이유는 평민 학생들은 보통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딱히 신분으로 잘난 척을 하고 싶지 않았던 헤일리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물론 아니다. 나도 반갑다고 말하고 싶군.”
그 모습을 보던 올리비아와 아니스는 적잖이 놀라 서로를 마주 보았다.
북부의 왕이나 다름없는 바로운 변경백의 아들을 저렇게 대하는 루아도 놀라웠고, 그걸 받아주는 헤일리도 놀라웠다.
루아는 헤일리가 자신의 인사를 받아주자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그럼 이제 인사도 했으니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알았지?”
헤일리 바로운은 그 몸쪽 꽉 찬 직구에 잠깐 움찔했다. 그러나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자니 유세를 부리는 것 같았고, 같은 학년끼리 친하게 지내자는데 싫다고 하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그,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얼떨결에 아카데미에서 첫 친구를 사귀게 된 헤일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루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14년을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간상이었다.
* * *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헤일리 바로운은 상점가를 걸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길지 않은 삶 속에서, 여자애 세 명과 함께 상점가를 거니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오늘에야 이름을 알게 된 소녀들, 올리비아 누에스와 아니스 프랄린의 표정은 매우 어색했다. 헤일리가 짓고 있는 표정과 완전히 같은 표정이었다.
“같이 놀러 나오니까 너무 좋아!”
신이 난 건 오직 루아뿐이었다. 그녀가 너희는 어떠냐는 듯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자 올리비아와 아니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너무 좋아. 아니스 너도 그렇지?”
“당연하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혼났어.”
가장 재미없는 문학 작품을 낭독하는 듯한 말투였으나 루아는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곧 헤일리를 향했다.
“헤일리는 어때?”
“…나도 좋다.”
자존심상 어색해 죽을 것 같다고 말할 수 없었던 헤일리 또한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아니스?’
‘나도 몰라. 왜 우리가 헤일리 바로운과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어.’
그들이 상점가에 나온 이유는 간단했다. 올리비아가 연습할 때 쓰는 날 없는 검이 고장 났고, 아니스 또한 새 잠옷을 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는 루아가 헤일리 또한 함께 가면 어떻겠냐고 말했고, 대놓고 거절할 수 없었던 아니스와 올리비아가 성의 없이 동의했던 것.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친화력이지.’
올리비아는 루아의 친화력에 혀를 내둘렀다.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북부의 왕자라 할 수 있는 헤일리를 저런 식으로 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애인 것 같긴 한데.’
그 신분 탓에 대하기 어려운 건 둘째로치고, 헤일리의 심성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딱히 권위적이지도, 독선적이지도 않았으니까.
“어디부터 갈 거야? 무구점? 옷가게?”
루아가 올리비아를 보며 물었다. 셋이 뭉쳐 다닐 때 리더는 보통 올리비아였다.
“일단 무구점에 들리자. 더 가깝잖아.”
잠깐 고민하던 올리비아가 대답했다. 네 아이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확실히 검술이었기에, 어쩌면 이 어색한 분위기가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헤일리는 소녀들을 따라 터벅터벅 무구점을 향해 걸었다.
“어서 오세요. 아이고, 아카데미 학생들이시네. 처음 보는 얼굴이니 1학년들이신가?”
무구점에 도착하자 주인으로 보이는 40대 사내가 학생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그래. 천천히 둘러들 보세요. 우리 가게에 있는 물건들은 질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하니까.”
“네!”
루아가 발랄하게 대답하자 주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저, 수련할 때 쓸 날이 없는 검을 찾고 있는데요.”
“그거라면 저쪽에 있어요. 튼튼하고 무게 중심도 잘 잡혀 있으니 졸업할 때까지 쓸 수도 있지요.”
주인의 말대로 검들은 제법 품질이 좋아 보였다. 올리비아는 신중히 전시된 검들을 살폈다.
“…확실히 괜찮긴 하네.”
손에도 잘 맞고 무게 중심도 주인의 말처럼 꽤 잘 잡혀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일리 바로운이 답답하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니, 검 그렇게 보는 거 아닌데.’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목검을 잡았고, 열 살 무렵부터 진검을 잡았던 그는 저렇게 검을 대충 살피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으음, 내가 잠깐 볼 수 있을까.”
답답함이 어색함을 이겼고, 헤일리는 결국 참견하기를 선택했다.
“어…? 아, 그래 주면 고맙지. 응….”
올리비아는 들고 있던 검을 헤일리에게 내밀었고, 그 자리에서 몇 번 들었다 내렸다 반복한 헤일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쓰면 쓸수록 무게 중심이 어긋날 거다. 나쁜 철을 쓴 건 아닌데, 장인의 솜씨가 부족한지 금속이 제대로 섞이지도 않았고 불순물이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어. 처음에는 잘 모를 수도 있는데, 몇 번 충격을 가하다 보면 슴베가 흔들리기 시작할 거야.”
검에 대해 말하는 헤일리는 이전까지의 과묵한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 상세하고도 설득력 넘치는 설명에 올리비아는 쉽게 납득했다.
“그, 그렇구나.”
헤일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검들을 하나씩 살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군. 이런 곳에선 제대로 된 검을 구하기 힘들 거다. 이렇게 된 이상 내가 아는 곳으로 가도록 하지.”
그렇게 말한 헤일리가 먼저 무구점을 나서려 하자 무구점 주인이 급히 소리쳤다.
“아니, 뭘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야?”
헤일리는 피식 웃으며 되받아쳤다.
“…이봐, 적어도 장인이라면 내 지적이 틀린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
주인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었다.
“이보세요. 1학년 손님. 손님 말이 물론 틀린 건 아닌데, 손님이 말한 조건을 다 맞추려면 단가가 얼마나 되는지 알기나 해요? 수련용 검 한 자루 사자고 금화 몇 개씩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저건 은화 세 개짜리 검이니 얼마나 합리적이에요?”
아니스와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주인 말이 맞았다.
“뭐라고? 장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없는 건가? 검을 만드는 이라면 항상 최고의 작품을 위해 그 삶과 장인혼을 불태워야 마땅……이거 왜 이래?”
더는 견딜 수 없었던 올리비아가 헤일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주인아저씨 말이 틀리지 않으니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때? 아저씨 죄송해요. 다음에 또 사러 올게요. 루아, 헤일리 팔 잡아. 부끄러우니까 빨리 나가자. 응?”
기사로서 교육받은 헤일리는 차마 소녀들을 거칠게 뿌리칠 수 없었기에 얌전히 끌려 나왔다.
“그러면, 내가 틀렸다는 건가? 내가 이해하도록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기분이 꽤 나쁠 것 같은데.”
헤일리가 씩씩대자 올리비아는 조금 겁먹었다. 그녀 대신 상회의 딸인 아니스가 나섰다.
“으음, 그러니까 그게…너처럼 품질만 생각해도 되는 학생이 있고, 우리처럼 가격 대비 성능을 생각해야 하는 학생들이 있잖아. 우리가 간 무구점은 그런 학생들을 위한 곳이야.”
아니스의 설명은 꽤 길었고, 다행히 헤일리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이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실례를 한 셈이군. 그런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다음에 찾아가서 사과해야겠어.”
‘확실히 나쁜 애는 아닌데. 뭔가 묘하단 말이야.’
올리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너희들도 곤란하게 했군. 미안하다. 사과의 뜻으로 네게 필요한 검은 내가 사도록 하지.”
헤일리는 그렇게 말하곤 앞장서 걸었다. 자신이 찾는 무구점으로 향한 것이었다. 아니스와 올리비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한 뒤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행은 그곳에서 4학년 학생들과 마주쳤다.
그들 중에는 바로운 백작 가문과 철천지원수 사이인 서부 변경백 얼로이 백작 가문의 아들, 블러핸 얼로이가 있었다.
“오, 이것 보게? 북부의 왕자님 아니신가? 아직 1학년인데 벌써 몇 명을 후린 건지 모르겠네. 능력도 참 좋으셔. 응? 1학년 아가씨들, 헤일리 도련님이 참 잘생겼지?”